책이 절판된 뒤 중고값이 30만원까지 치솟았다. 독자들의 재출간 요청이 출판사에 쇄도했다. 무게만 2㎏ 이상 되는 책이라서 제작비도 만만찮았다. 고심 끝에 출판사는 재출간 결정을 내리면서 온라인서점 알라딘에 북펀드를 신청했는데, 목표금액의 10배가 넘는 2천만원 이상이 모였다. 드디어 2024년 11월 중순, 책이 나왔고 곧이어 ‘판매 역주행’이 벌어졌다. 알라딘 역사서 분야 주간 3위. 2위는 유발 하라리의 신간 ‘넥서스’(김명주 옮김, 김영사 펴냄), 1위는 ‘이집트 상형문자 필사 노트’(유성환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였다.
2016년 한국에 첫선을 보인 ‘여신의 언어’(한겨레출판 펴냄)는 고대 유럽 유물에서 나타난 여신상의 상징을 풀이한 대작이다. (‘‘여신’ 불러낸 맹렬하고 논쟁적인 고전’, 한겨레 2016년 4월21일치) 2천여 장의 도판에 담긴 그림은 21세기의 디자인 감각과도 연결된다. 저자인 마리야 김부타스(1921~1994)는 리투아니아 출신의 미국 고고학자로 1963년부터 1989년까지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학(UCLA)에서 교수로 일했다.
그의 책을 번역한 고혜경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 교수(신화학자, 꿈 분석가)는 “관찰하고 기재하는 것을 넘어 분류하고 해석하는 일을 기피하던 당시 주류 아카데미에서 저항이 만만찮았고 여전히 반론이 많지만, 많은 선각자들이 그러하듯 그의 해석은 또 다른 눈을 열어준 혁신이었다”고 말했다. 2024년 11월18일 오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고 교수를 만났다. 그는 고대 그리스 여신들을 재해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현대인의 심리적 드라마를 분석한 책 ‘마음 오디세이아’(나무연필 펴냄) 1권을 2022년 출간한 데 이어 2권을 쓰고 있다.
—독자들 반응이 실감 나는지.
“실감 나지 않는다. 김부타스의 동료이자 내 친구인 고고학자 겸 신화학자 크리스티나 버그렌이 번역하라고 끌어들여 시작했는데 무려 5년이 걸렸다. 나에게도 강렬한 이끌림이 있는 책이었다. 남신 중심의 가부장제 문화는 길게 잡아 5천 년이지만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무려 3만 년 전의 석상이었다. 지금까지 알던 내 세상이 얼마나 짧은 역사였는지 새로이 알게 됐다. 모든 사람이 이런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순진함으로 시작했고 큰 제작비가 들어가는 책을 발간하자고 출판사를 설득하는 무모함도 있었다.”(웃음)
—역주행의 이유를 짐작하나.
“우리 사회가 뭔가 길찾기를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뿌리를 찾으려는 무의식적 염원이 작동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세상이 워낙 급변하는데다 딛고 설 기반이 흔들리니. 이집트 상형문자 관련 책이 많이 팔린다는 것도 내가 아는 언어 너머, 내가 인식하는 것 너머의 문을 열려는 뜻이 담긴 것 같다.”
—타투를 받으려는 여성들이 이 책에서 아이디어를 얻는다고도 들었다.
“이 고대의 문양들이 지금도 가치가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파인아트(순수미술)나 디자이너에게도 영감을 주리라 생각한다. 그리스의 크레타섬에 가면 미노스 문명(기원전 3000~1100년)을 전시한 박물관이 있는데 이처럼 굽이치고 휘도는 물결과 나선이 아로새겨진 유물들로 가득한 전시실이 있다.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생명력과 역동성을 뜻한다. 지나치게 경쟁하고 뭔가 잘 돌아가지 않는 에너지를 우리 사회가 감지한 게 아닐까.”
러시아와 나치 독일의 습격을 피해 미국에 정착한 김부타스는 동유럽 유물을 해석하면서 성공적으로 고고학자로서 경력을 쌓아갔다. 그러나 그는 후기 연구에서 가부장제가 확립되기 이전 고대 유럽에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시대, ‘위대한 여신’(Great Goddess)을 숭배하는 숭배 문화가 있었다는 학설로 논란을 낳았다. 이 시기 대표작인 ‘여신의 언어’는 1989년 미국에서 초판이 출간됐고 엄청난 반향과 함께 반동(백래시)도 불러일으켰다. 이 책은 미국의 페미니스트 대안운동과 신영성운동에 큰 영감을 주었지만 주류 고고학계는 냉담했고, 비과학적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고고학, 비교신화학, 민담을 아우르는 김부타스의 간학제적 방법론은 고고학의 전통적 방법론을 뛰어넘는 성과이기도 했다.
—가부장제 억압의 구조를 밝히기에 앞서 영성이나 ‘어머니 지구’처럼 모성을 강조하는 에코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있다. ‘여신’을 꼭 생명이나 어머니로만 해석해야 할까.
“(고개를 흔들며) 전혀 아니다. 김부타스는 ‘위대한 어머니’라는 번역은 잘못된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위대한 여신’과 모성은 다르다. ‘어머니성’(모성)이라는 건 여신의 여러 기능 중 하나다. (신화와 상징에선) 생명을 가져오는 존재가 죽음도 가져온다. 내가 학생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모성이 무조건적 사랑만 뜻하는 거라면 심리학이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내 실제 경험과 상관없이 ‘원형적 어머니는 이상적’이라는 프레임만 갖고 ‘어머니’의 어두운 측면을 보려 하지 않는다. 일부 페미니스트나 보수주의자나 자꾸 ‘어머니’나 ‘모계사회’를 이상화하는데, 편향적 해석은 언제나 위험하다. 가부장제의 억압에 대한 반작용으로 ‘아름다운 세상이 있어’라고 믿고 싶은 욕구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거기에 매몰되면 편파적인 그림이 될 수 있다.”
빛을 향해 달리면 그림자는 길어진다. 고 교수는 통합적인 관점을 강조했다. 2007년 출간된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로버트 존슨 지음, 에코의서재 펴냄)는 ‘여신의 언어’보다 더 많이 팔린 고 교수의 번역서다. 이 책은 카를 구스타프 융의 심리학 이론을 바탕으로 내면의 그림자를 설명한다. 주 독자층은 40대 여성. 고 교수는 “중년까지 자신이 아는 방식으로 살아왔다면 그 이후엔 그림자의 에너지를 써야 할 때”라고 말했다.
—내면의 그림자는 무엇이며 왜 중요한가.
“그림자는 어두움이라기보다 내가 받아들이지 않는 것, 지금까지 자신에게 밝혀지지 않은 측면을 가리킨다. ‘지금까지 잘 살았다’는 건 ‘세상이 원하는 대로 맞춰온 나’를 가리킬 수 있다. 중년 이후엔 그림자의 에너지를 써야 할 때다. 구원의 열쇠는 언제나 그림자 속에 있다고 융은 말한다. 중년은 위기가 아니라 전환, 새로운 초대다. 내 삶의 후반부 갈무리가 여기에 달려 있다.”
—너무 힘든 일이기도 하다.
“기존의 방식대로 인생을 산다면 계속 내가 아닌 세상의 필요에 따라 살 수밖에 없다. 나라는 존재는 단순히 ‘사회적 의무를 수행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개념을 넘어선다. 훨씬 그 이상이다. 지금까지 익숙하게 여겨온 방식으로 내 에너지가 바닥날 만큼 썼으니, 지금까지 써오지 않은 내 반쪽에서 보물을 캐내야 한다.”
바야흐로 ‘심리학의 시대’를 맞아 그는 반가운 동시에 아쉽다고 했다. “다수의 사람이 오로지 ‘내 상처, 내 아픔’에만 몰두하는 경우가 많다. 일생 자신을 희생자로 만드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도 덧붙였다.
—평소 개인 상담도 하는데, 최근 상담 현장에서 느껴지는 집단 무의식이 있나.
“2030 젊은 사람들을 보면 아직 피부막이 아직 덜 형성돼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부모의 간섭이 싫지만 독립적으로 설 수 없다는 인식이 강하다. ‘영웅의 여정’을 보면, 내가 나로 바로 서고, 내 힘이 생기는 동시에 부모 또한 그 부모에게 입은 상처나 유산이 있었구나, 이해하게 된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취득해야 한다는 ‘영끌’이라는 가슴 아픈 말의 중심에는 ‘아파트’가 있다. 아파트가 없으면 불안하다는 젊은 세대의 두려움은 우리 엄혹한 역사의 산물일 것이다. 내 몫만이 아니라 이글루처럼 선조들의 무게까지 젊은이들이 지고 있어 마음이 아프다.”
그는 내면으로 떠나는 여행을 주로 꿈을 통해 이끈다. 그의 스승이자 세계 꿈협회(Association for the Study of Dreams)를 창립한 꿈 분석가 제러미 테일러는 꿈이 한국의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마늘과 쑥이라고 설명했다. 곰이 인간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쑥과 마늘을 먹었듯, 꿈은 인간을 탈바꿈하기 위한 처방전이라는 얘기였다. 테일러가 만든 방법론이 바로 ‘그룹 투사 꿈작업’이다. 여러 사람이 서로의 꿈을 나누면서 ‘내 꿈이라면’이라는 가정하에 각자 자신을 타인에게 비추어 대입하는 ‘투사’를 통해 오류를 수정하고 집단적인 지혜로 길을 찾아나간다. 그가 지금까지 해온 꿈작업의 핵심은 ‘나의 꿈 사용법’(2014, 한겨레출판), ‘꿈이 나에게 건네는 말’(2019, 위즈덤하우스 펴냄)에 담겼다. 5·18 피해자들과 꿈작업을 한 기록은 ‘꿈에게 길을 묻다’(광주트라우마센터 기획, 2016, 나무연필 펴냄)로 묶였다. (‘개꿈은 없다. 오직 기억하라', 한겨레21, 2016년 5월27일 참고)
—꿈이 왜 중요한가.
“꿈은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마음의 청사진이다.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은 “꿈은 개인의 신화이고, 신화는 집단의 꿈”이라 말했다. 꿈과 신화는 같은 문법을 갖는다. 꿈은 인류의 집단 무의식 심층에서 올라오는 것이고 신화와 민담도 마찬가지다. 신화와 민담이 누대에 걸쳐 회자되는 것은 누구나 다 연결되는 보편적인 패턴, 원형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꿈은 인류의 보물 같은 정신세계, 매일 인류가 축적한 지성에서 올라오는 에센스 같은 것이다.”
—5·18 피해자들과 집단 꿈작업을 했다.
“미국에서 심리학을 공부할 때 트라우마가 치유되지 않으면 그 피해가 다음 세대로 유전된다고 배웠다. 우리 세대는 5·18이라는 상흔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부채감을 갖고 있다. 2003년 유학하고 돌아와 광주 출신 사람들의 꿈에 늘 5·18의 흔적이 보이는 걸 알게 됐다. 그 뒤 광주에 초청받아 가서 꿈작업을 하는데 지진의 진앙지에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인상적인 사례도 있었다고 들었다.
“피해자로서 증언을 자주 하신 분이 많았다. 사실적 묘사는 가능했지만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거나 담아낼 언어는 없는 것 같았다.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트라우마는 너무 심한 타격을 받아 삶에 박힌 옹이 같은 것이다. 잊고 사는 듯해도 한순간 갑자기 ‘1980년 5월’로 돌아가버린다. 어떤 이들에게는 시간의 흐름이 작동되지 않는다. 여전히 살아 있는 시간이다. 꿈 얘기를 통해 다시 시간이 흐르게 한다고 할까. 어느 한 분은 함께 있던 친구 세 명이 다 죽은 뒤 혼자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을 트라우마로 깊이 느끼고 있었다. 꿈작업을 마칠 때쯤 죽은 친구들이 꿈에 나타났다고 했다. ‘네가 힘든 것, 우리가 안다’고.”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분위기를 전환하는 질문을 던졌다. 초겨울 추위가 무색하게 나라 전체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권력자와 꿈에 대한 이야기였다. ‘윤석열 대통령 부부 공천개입 의혹’의 핵심 인물 명태균씨가 윤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와 꿈 얘기를 나누면서 “영적 대화”를 나눴다는 이야기가 나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국정농단을 저지른 최서원(최순실)씨의 아버지 최태민씨도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자신의 꿈 이야기를 들먹이며 ‘가스라이팅’을 시도한 바 있다.
—꿈은 미신과 연결되거나 터무니없는 해석이 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꿈은 은유와 상징이다. 꿈을 잘못 해석하는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가 특정한 의도와 편향성을 갖고 끼워 맞추기를 하는 것이다. 꿈해석은 투사일 수밖에 없고, 자기 개인의 욕망이나 맹점이 고스란히 담길 수 있다. 역사에 영향을 미치고 역사가 흘러가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세상 어떤 귀한 이론이라도 이기적인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다.”
—인터넷에는 해몽 이야기가 상당히 많다. 인공지능(AI)도 꿈해석을 그럴듯하게 해준다.
“세계 각 지역에서 사람들은 꿈을 보내주는 존재가 따로 있다고 믿는다. 꿈을 ‘지성체가 보내주는 메시지’라고 하거나 ‘하느님이 우리에게 보내주는 연애편지’ 또는 ‘수수께끼 할머니’라고도 일컫는다. 꿈이 보내는 언어를 모르기 때문에 꿈이 황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반면, 내가 ‘꿈말’을 알아서 척척 해석해주는 특별한 사람인 것처럼 가장하면서 위정자 곁에서 자아의 욕구를 충족하는 데 쓰는 사람들도 있다. 복잡한 상징의 해석을 단편적으로 만드는 순간 오류가 벌어진다. 꿈은 나의 본질에 대한 심오한 이야기다. 인터넷이나 AI도 각자 꿈의 고유함을 반영하지 못한다.”
—주술과 전통과 과학의 경계를 잘 모르겠다.
“과학이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있을까? 과학이라면 모두 믿을 수 있을까? 많은 과학적 이론이 시대적 맥락 안에 놓여 있고 계속 반박되고 수정된다. 우주의 대부분은 미지의 영역이고 내면도 마찬가지다. 그럼 비과학적인 주술은? 거기에는 맹신적인, 황당한, 이기적인 욕망이 종종 결합한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확신범이 언제나 위험하다는 걸 배웠다. 어떤 개연성도 없이 무지에 의존하는 것도 지성인으로서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대신에 나는 ‘합리적인 직관’을 믿는다. 잘 연마된 직관. 내 한계를 인식한 사람은 덜 위험하니까. ‘내가 주인’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 모르는 게 아직 너무 많다는 점을 인정하고 세상에 대해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배워야 한다.”
—계획이 있다면.
“결국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심리학적 다신관’이다. 일신관이 단일한 렌즈라면, 다신관은 모자이크 같은 다채로운 렌즈다. 다면적으로 나와 세상을 볼 때 좀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이분법적 세계관으로 살아온 역사를 넘어서서 앞으로는 우리 안의 다양성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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