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혼인신고를 할 수 있습니다. 미혼임을 증명하는 서류를 제출하세요.”
2024년 3월, ‘난민 복서’ 이흑산(41·본명 압둘라예 아산)은 예비 신부인 ㄱ씨와 서울 용산구청을 찾아 혼인신고서를 제출했지만 반려됐다. ‘중혼’을 금지하는 법(민법 제810조, 배우자 있는 자는 다시 혼인하지 못한다)에 따라 외국인이 국내에서 혼인신고를 하려면 미혼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서류를 함께 제출해야 한다고 구청 쪽은 설명했다.
문제는 그가 2015년 10월 고국 카메룬을 떠나 한국에 망명한 난민이라는 사실 . 평범한 외국인이었다면 한국에 있는 대사관을 찾아 증빙서류를 받거나 고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서류를 받아달라고 부탁할 수 있지만 난민인 이흑산은 그럴 수 없었다 .
카메룬 군대 소속 운동선수였던 이흑산이 2015년 10월 경북 문경에서 열렸던 세계군인체육대회에 참가한 뒤 숙소를 이탈해 망명을 신청한 지도 9년이 흘렀다. 그사이 고국에선 그의 주민등록이 갱신되지 않고 만료된 상황. 어디에서도 그의 미혼 사실을 증명할 서류를 발급받을 수 없었다. 이흑산 부부는 한 달 가까이 머리를 맞대고 방법을 궁리했으나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2017년 당시 난민인정 소송을 도와줬던 ‘공익법센터 어필’의 이일 변호사를 다시 찾은 이유다. 공익 변호사들이 이흑산을 도왔고, 3개월 뒤인 6월에야 혼인신고를 할 수 있었다.
결혼하기 위해서 결혼한 적이 없음을 증명해야 하는 것은 평범한 경험이 아니지만 , 한국 땅에 살면서 혼인하려는 외국인에겐 보편적이다 . 그리고 그 외국인이 난민이어서 미혼 사실을 증명하는 서류를 구할 수 없다면, ‘혼인’은 부부의 사랑만으로 넘을 수 없는 높은 문턱이 된다. 그나마 이흑산은 도움을 청할 변호사가 있었기 때문에 운이 좋은 편이었지만 대다수 난민은 그런 도움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일 변호사는 2024년 9월9일 한겨레21과 한 통화에서 “이흑산님은 미혼 사실을 증명할 서류를 제출하지 않고 어필의 변호사들이 공증하는 형태로 혼인신고를 마칠 수 있었지만 대다수 난민은 구청에서 혼인신고를 거절당하면 스스로 방법을 찾아보다 단념할 수밖에 없을 것 ”이라며 “난민이 결혼할 때마다 변호사들이 공증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정부가 난민 혼인과 관련한 제도를 정비하고 , 난민에게 먼저 알려줘야 한다 ”고 말했다.
“세계 챔피언은 언감생심이다. 피지컬이 워낙 좋고 자세나 기술이 좋아지고 있어 아시아 챔피언은 가능하다고 본다.”
2017년 6월 한겨레21 제1165호 표지이야기 ‘챔피언은 링 밖의 싸움이 더 두렵다’에서 강원 춘천 아트복싱체육관 이경훈 코치(전 한국 미들급 챔피언)는 이흑산을 냉정하게 평가했다. 하지만 이흑산은 아시아의 벽을 넘지 못했다. 2018년 7월29일 서울 홍은동 그랜드힐튼호텔에서 열린 세계복싱협회(WBA) 웰터급 아시아 타이틀전에 나섰지만 상대 선수와 비기고 말았다. 복싱 타이틀전에서 무승부가 되면 챔피언이 그대로 자격을 유지한다.
이흑산은 이후에도 세계 챔피언을 목표로 열심히 운동했지만,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몸무게가 늘지도 않고 꾸준하게 유지되는 67㎏에 상대적으로 큰 키 180㎝, 리치(팔 길이) 187㎝, 뛰어난 동체시력과 동물적인 반사신경도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약해져갔다. 그럴 만도 했다. 2017년 한국 챔피언이 됐을 때 이미 그의 나이는 35살. 현역 복싱 선수로는 적지 않은 나이였다.
“팔목에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이 자주 생겼는데, 좀처럼 낫질 않았다. 아무리 뛰어도 마르지 않는 샘처럼 지칠 줄 몰랐던 체력도 조금씩 나빠졌고, 언제부턴가 금방 지치고 회복이 잘되지 않았다.” 누구도 ‘노화’는 피할 수 없지만, 워낙 신체조건과 체력이 좋았던 이흑산은 자신의 기량이 절정에서 멀어지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고 무거운 표정으로 털어놨다.
이흑산이 평범한 운동선수들처럼 안정적인 환경에서 꾸준히 관리받았더라면 세계 챔피언도 불가능한 꿈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2008년께 군대의 허락 없이 민간이 개최하는 프로복싱 대회에 나갔다가 감옥에 끌려간 뒤로 줄곧 불안정한 삶을 살면서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려왔다. 2015년 한국에 망명한 뒤에도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아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였다.
설상가상으로 소속 체육관과 계약 내용을 놓고 갈등을 겪으면서 더욱 운동에 집중하기 어려운 환경이 됐다. 2018년 12월 춘천을 떠나 서울의 한 운동선수 매니지먼트사와 계약하고 다시 링 위에 올랐지만, 그의 성적이 오르막길을 걷는 일은 없었다. 전문적인 몸 관리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재능만으로도 2017년 5월 슈퍼웰터급 한국 챔피언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으나, 한국 챔피언이 그의 ‘커리어 하이’가 됐다.
2019년 말, 37살의 이흑산은 프로 복싱선수의 꿈을 끝내 내려놨다. 2002년 처음 복싱을 배운 뒤로 줄곧 세계 챔피언을 목표로 달려왔던 그가 꿈을 내려놓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이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동안 그의 미간은 수시로 찌푸려졌다. “목숨처럼 사랑했던 복싱과 세계 챔피언이라는 목표를 포기하는 그 순간은 너무 힘들었다.”
운동선수를 포기한 이흑산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링 밖의 싸움은 더욱 혹독했다. 그가 운동을 그만둔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코로나19가 세계적으로 유행했다. 복싱을 하면서 돈을 많이 모으지도 못했는데, 코로나19 감염을 막기 위해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되면서 복싱 강습 아르바이트 자리도 구하기 어려워졌다. 집 월세를 낼 돈이 없어서 지인들의 집을 돌아다니며 지냈다.
당장 먹고살 돈이 필요했던 그는 급한 대로 코로나19 때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택배 일에 뛰어들었다. 그가 맡은 일은 택배 창고에서 물품을 싣고 내리는 ‘상하차’ 업무였다. 그는 1년 넘게 이 일로 겨우 생계를 이었다. 이흑산은 당시를 회상하면서 몇 차례 한숨을 쉬었다. “정말 태어나서 그렇게 힘든 시간은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사각의 링 위에서 고독했던 챔피언은 링을 내려와서도 물러설 곳이 없이 외로운 싸움을 계속했다. 그의 조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고국 카메룬의 상황은 조금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카메룬은 영어를 사용하는 앵글로폰(북서부와 남서부) 지역의 치안이 특히 불안한데, 분리주의 무장단체(암바조니아)와 정부군 사이에 무력 충돌이 발생해 민간인까지 인명 피해를 보는 일이 잦다. 국제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는 앵글로폰 지역에 63만8천 명의 국내 실향민이 있고, 인도적 지원이 필요한 사람이 최소 170만 명에 이른다고 보고했다. 이런 카메룬에서 군인이 되면 58살이 될 때까지 스스로 그만둘 수 없고, 도망쳤다가 잡히면 감옥에 갇히거나 목숨을 잃기도 한다. 이흑산은 “군인이었던 친구들이 아직 많은데 최근에도 수시로 연락이 끊어지고,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면 ‘죽었더라’라는 소식을 듣게 된다”고 했다.
1983년 5월 이흑산이 태어나기 6개월 전이었던 1982년 대통령이 된 폴 비야(91)는 아직까지 카메룬의 대통령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23년 3월 총선거가 치러졌는데 카메룬 선거법에 따르면 상원의석 100석 가운데 70석은 지역의 선거인단이 선출하고 나머지 30석은 대통령이 지명한다. 10개 정당이 참여했지만 집권당인 카메룬국민민주운동(CPDM)이 70석 전석을 싹쓸이했다. 비야 대통령은 야당에 5석을 내주고, 25명의 상원의원을 집권당에서 임명했다. 민주적인 정치 개혁을 바라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렇게 생존과 노동, 고통으로 점철된 일상이었지만 사랑이 찾아오면서 그의 삶도 바뀌기 시작했다. 코로나19 유행이 조금씩 소강상태로 접어들면서 그는 체육관 복싱 강습 아르바이트를 다시 시작했고, 2022년 트레이너와 강습생으로 아내를 만났다. 이흑산은 “아내는 한국인이지만 외국어를 유창하게 잘 구사해 의사소통에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며 “1년 정도 친구로 지내면서 사려가 깊고 목표가 확고한 아내에게 매력을 느껴 2023년에 청혼했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 들어 경기 김포 지역에서 고속도로 포장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어느 때보다 무더웠던 2024년의 여름을 펄펄 끓는 아스팔트 위에서 치열하게 살았다고 했다. 이흑산은 “내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보다 훨씬 더워졌다. 어떤 날은 적도 부근에 있는 내 고향 카메룬보다 더 덥다”고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그는 자신이 세계 챔피언이 되는 꿈은 내려놓았지만, 자신이 아닌 새로운 세대를 ‘챔피언’으로 만드는 꿈을 꾸고 있다. 생계로 바쁜 중에도 꾸준히 체육관을 찾아 선수들을 가르치고 돕는 일을 하는 이유다. “내가 세계 챔피언이 될 수는 없었지만, 다른 선수가 내 실패를 반복하지 않고 세계 챔피언이 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난민 복서 이흑산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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