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가족부 폐지’는 윤석열 정부의 흔들리지 않는 기조다.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2022년 2월7일치 <한국일보> 인터뷰)고 생각하는 대통령의 인식 탓이 크다. 구조적 성차별이 없다는 말에 비판만 쏟아졌던 건 아니다. 동의하는 청년 남성도 다수였다. 2022년 6월 대학생활 플랫폼 ‘에브리타임’에서 연세대 청소노동자를 비난하는 게시글을 보고 ‘공정 감각’에 관한 수업계획을 제안해 화제를 낳았던 나임윤경 연세대 교수(문화인류학)는 “이제 학부생을 대상으로 한 여성학 교양수업에서 처음부터 ‘구조적 성차별’을 얘기하지 않는다”고 했다.
“학생들에게 ‘젠더’를 얘기하면 화를 낸다. 가부장제에 의한 구조적 ‘억압’(Oppression)보다 개인적 ‘억울함’(Depression)을 먼저 얘기해야만 수용성이 높아진다. 페미니즘이 ‘선한 윤리’를 기반으로 하는 사유 방식이자 실천임을 증명하고 설득하는 교육에는 수많은 난관이 존재한다.”(한국여성학회 춘계학술대회 기조세션 발표 가운데)
2024년 6월15일 서울 구로구 성공회대에서 열린 2024 한국여성학회(회장 이현재) 춘계학술대회 ‘한국여성학회 40+ 연대와 확장: 페미니즘의 과거, 현재, 미래’는 한국여성학회 창립 40년을 기념하는 큰 행사였다. 한국여성학은 1977년 이화여대 교양과목으로 채택돼 1980년대 후반을 거치며 전국 대학의 학과로, 협동과정과 교양과목으로 확산했다. 최근 여성학회 회원은 1040명에 이를 정도로 연구자와 활동가가 증가했다. 14대 학회장 조은 동국대 명예교수는 “처음 여성학회는 ‘여성’ 학자들이 말할 장소, 숨 쉴 공간이라도 확보하고자 모인 것이다. 우리 여성학이 가부장제에 흡착된 기득권적 사유와 담론에 저항하는 보루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축사를 건넸다. 24대 학회장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는 “인간인 것이 부끄러운 시대가 왔다. 1985년 제1회 학술발표회 개회사에서 윤후정 회장은 ‘인간화’를 이야기했지만 이제 우리는 ‘탈인간화’를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10년 페미니즘과 백래시에 관한 역동을 발표하고 토론하면서 행사장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페미니스트 연구웹진 <포워드>(Fwd) 필진 김미현(이화여대 여성학과 박사 수료) 연구자는 “한국여성학회 창립 40주년을 맞는 올해는 페미니즘이 리부트됐다고 천명된 지 10년차를 맞는 해”라며 “그간 일부 넷페미들은 (한국형) ‘래디컬 페미니즘’과 (억압의 교차적 관계를 사유하는) ‘교차 페미’로 양분돼 대립했다. 다른 한편 ‘페미니즘 백래시’에 대한 위기감이 부상하고 총여학생회 폐지를 시작으로 페미니즘의 ‘과격성’ ‘남성혐오’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고 돌아봤다. 김 연구자는 “단순히 페미니스트 정체성과 기표를 소비하는 ‘라이프스타일 페미니즘’을 넘어서기 위해서 페미니즘은 길고 지루하고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며 힘들더라도 어려운 길을 가자고 제안했다.
1984년부터 2023년까지 한국여성학회 학술지 <한국여성학>의 통시적 분석을 시도한 오혜민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과젠더연구소 강사는 “2015~2016년 이른바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는 여성학 연구에서 여성 청년층을 집단으로 호출하는 경향이 역사상 가장 활발하게 관찰된 시기”라며 “2016년부터 2023년까지 발간된 여성학 논문 245편 중 여성 청년층을 직접 다루는 주제의 논문은 55편에 달했으며 집계되지 않은 상당수 논문 역시 여성 청년 당사자가 생산한 것”이라며 그간의 분투를 설명했다. 오 강사는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청년은 신자유주의 체계 안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삶의 방식을 발휘하는 한편 좌절하는 존재였고 우울증, 자살, 번아웃과 관련된 연구 주제가 자주 나타났다”며 청년 당사자 연구가 집중된 과제를 설명했다.
‘초저출생 한국’의 원인을 알 수 있는 여성 청년에 대한 발표도 있었다. 황채린(전북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연구자는 ‘취업-결혼-출산’이라는 생애주기 정상성이 해체된 ‘포스트 로맨스’ 시대에 여성 청년들은 “결혼이 여자에게 행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낭만적 사랑 이데올로기의 해체를 수행한다고 분석했다. 반면, 남성 청년들은 핵가족적 가치를 중심으로 “결혼한다면 자식까지 있는 게 세트”라는 인식으로 남성 생계부양자 관념과 성별 분업에 기반한 결혼 규범이 여전히 남아 있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또한 “‘졸업-취업-결혼-출산’이라는 생애 경로 밖에서 도전의 기회가 열려 있는 서울에 견줘 비서울 지역에서는 근대 규범의 획일화된 생애 이행코스를 따르게 되는 경향이 있다”고 지역 간 청년들의 차이를 설명했다.
이날 청중의 가장 큰 관심을 모았던 주제는 디지털 공간의 젠더 폭력이었다. 연구자들은 2004년 벌어진 밀양 집단 성폭력 사건 피해자의 동의 없는 개인정보가 2024년 유튜브를 통해 느닷없이 널리 유포되며 피해를 다시금 양산하는 현실을 비판했다. 2015년 전후 페미니즘의 새로운 물결을 ‘페미니즘 리부트’라고 명명한 손희정 경희대 비교문화연구소 연구교수는 “최근 정의구현을 하겠다며 피해자의 삶을 자원으로 삼아 돈을 버는 시장이 생겼고 그 옆에 ‘여성혐오(여혐)가 표가 되는 정치’ 또한 열렸다”고 말했다. “화가 난 남자들이 밈 전쟁을 벌이는 한편 ‘남성 약자’ 서사를 구축했다. ‘반페미니즘’을 선거 전략으로 삼은 정치인이 표를 만들고 당을 만들고 끝내 국회에까지 진출했다. 사이버레커와 각종 성범죄 전시, 다크웹, 사채시장, 불법도박, 마약 거래까지 사이버스페이스를 거점으로 열린 시장은 ‘디지털 고어 자본주의’로 명명될 만하다.”
‘고어 자본주의’는 멕시코의 트랜스 페미니스트이자 활동가인 사야크 발렌시아가 제안한 개념이다. 그는 극단적이고 잔혹한 폭력을 특징으로 하는 영화 장르에서 ‘고어’라는 단어를 빌려왔다. 노골적 유혈사태, 인간의 신체와 생명을 상품화하는 과정에 개입하는 극단적 폭력의 약탈 기술과 폭력 구조를 가리켜 그는 ‘고어 자본주의’라 이름 붙였다. 손 교수는 “한국의 온라인 공간에서 일어나는 폭력은 이제 ‘온라인 유희’ 수준을 넘어 신체와 인간 존엄 훼손을 상품으로 하는 폭력 산업으로 확장되고 있다. ‘디지털 고어 자본주의’는 현실과 가상이 서로 영향을 미치며 상관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포착하려는 개념이며 디지털 세계가 더는 가상만이 아니게 됐다는 현실을 뜻한다”고 말했다.
또 “한국의 ‘고어 남성성’은 디지털을 거점으로 폭력을 정당화하고 이를 자본 축적의 자원으로 삼는다”며 “여성이나 소수자의 신체를 대상화하고 돈벌이 수단으로 삼으면서 한국의 ‘고어 남성성’이 거대 산업화하고 있다. 자유주의 시장경제 안에서 남성이 스스로 주변화하고 핵심에 진입하지 못한다는 점 때문에 돈 버는 경로를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찾는데, 유튜브 등은 이 경로를 제공한다”고 비판했다.
김수아 서울대 언론정보학(여성학협동과정) 교수는 “<대한민국 넷페미사>(권김현영·손희정 등 지음, 나무연필 펴냄)에서 보듯 오랫동안 온라인 공간에서 여성들이 의미를 만들어온 역사가 있었는데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비로소 (여성의 정치적 참여에 관한) 반향이 있었고 ‘디지털 행동주의’로 명확하게 해시태그 운동이 벌어진 이후에야 이전의 행동들도 의미 있게 포착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성들이 ‘안전한 온라인 공간에서 말하기’를 원하는 한계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미투 운동은 ‘진리 말하기’라는 점에서 ‘파레시아의 정치’이자 여성 간 경험의 공유를 통한 새로운 정치의 장을 열었다. 페미니즘 재부상은 청년 여성들에게 세력화의 경험을 갖게 하고 가시성의 정치를 실현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온라인에서 안전한 공간을 만들겠다며 특정하게 허용된 주제와 발화 방식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페미니스트 필터 버블’ 속에서 다른 의견은 차단되고 이런 ‘여성 범주화’ 과정에서 배제와 혐오가 비판적으로 검토되기 어려운 환경이 마련된다.”
지난 10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백래시도 있었지만 남성 지식인들의 연대 또한 이뤄졌다. 이들은 ‘페미니스트 동료’와 연결하고 ‘남자 페미니스트’로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청중 토론에서 <포워드>(Fwd) 필자 이민주씨는 “그동안 여성들이 ‘나는 페미니스트다’라는 해시태그를 달면서 연대했지만 이후 그 표식들을 찾아 공격하는 백래시가 이뤄진 뒤엔 표식을 달지 못하게 됐다”며 “이름을 밝혀도 안전한 남성 학자, 필자들이 나서서 ‘탱킹’(대신 맞아주는 일)을 하는 일이 나타났다. 여성의 말을 받아적을 수 있는 남성들이 여성의 목소리와 자원을 가져가는 측면도 있다. 남성 정치인이든 성폭력 피해 위험이 없는 사람에게 의탁하지 않는 운동방식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2024년, 피해 여성이 61명에 이르는 ‘서울대 딥페이크 성범죄’가 드러났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의 ‘2023 디지털성범죄 피해자 지원 보고서’를 보면, 2023년 합성·편집 등 불법 성착취물에 의한 피해 상담 건수는 423건이었다. 1년 전 212건보다 약 2배가 증가한 수치다. 이제 한국은 나라 밖에서도 ‘딥페이크 성폭력 공화국’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김애라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불법 성착취물을 이용한 딥페이크, 텔레그램 ‘엔(n)번방’ 성착취, ‘버닝썬’ 사건, 소라넷 성매매 및 친밀관계 성관계 불법촬영, 놀이공원과 화장실의 공공장소 불법촬영, 카카오톡 성희롱, 소셜미디어 메시지 성희롱 등을 ‘기술매개 성폭력’으로 범주화했다. 기술매개 성폭력은 새로운 기술을 이용한 여성 대상의 성적 공격 행위를 뜻한다. “1990년대 ‘온라인 성폭력이 진짜 강간인가’라는 질문이 나왔다면 2000년대 들어서는 산업화된 가상 플랫폼에서 성희롱, 성폭력, 살인이 벌어졌다. 2010년대 가상현실(VR) 고글을 쓰고 게임을 하던 여성이 남성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신고했다. 생생한 감각인데 이것이 실제 성추행이 맞는지 질문이 나온다. 현행법으로는 처벌이 어렵다.”
온·오프라인의 시공간성이 결합하는 이런 성폭력은 법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김 위원은 “기술매개 성폭력도 음란성·성적 수치심을 기준으로 삼아야만 처벌이 가능한데 개인정보 활용과 지속적인 연락 등은 ‘음란성’이라고 인정이 안 돼 성애적 목적이 분명하더라도 처벌이 어렵다”고 말했다. “불법촬영물과 함께 피해 여성들의 개인정보가 강탈, 활용, 업데이트되며 어떤 식으로든 유포된 뒤에는 재유포 및 불법유포 가해자가 양산된다”고 그는 덧붙였다. “기술매개 성폭력의 해악은 음란성이 아니라 개인정보의 수단화, 성별화가 핵심”이라는 얘기다.
김현미 연세대 교수(문화인류학)는 “피해자가 원치 않는 정보공개로 돈을 벌거나 비트코인, 불법도박, 악플 달기, 게임을 하면서 일상을 살아가는 남성 집단의 쾌락 문법이 사회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인공지능(AI) 테크놀로지가 여성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상황에서 기술로 약자를 통제하고 놀이화하는 ‘한국 빌런 사이보그 남성성’에 관한 연구가 시급히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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