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대 국회 임기 중 반드시 입법화해주시기를 바랍니다.”(연금개혁특별위원회 공론화위원회 시민대표 ㄱ씨)
2024년 5월3일 발간된 연금개혁특별위원회 공론화위원회(공론화위) 조사결과 보고서 말미에는 시민대표단의 소감과 당부가 빼곡하게 담겼다. 500명의 시민이 주말까지 반납하면서 공부하고 숙의해 내린 결론을 외면하지 말고 꼭 제21대 국회에서 연금개혁안을 통과시켜달라는 주문이 가장 많았다.
정치는 이러한 시민의 요구를 외면했다. 2024년 5월29일 제21대 국회는 국민연금 개혁안을 끝내 처리하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참여연대는 제21대 국회가 종료된 직후 입장문을 내어 “(연금개혁은) 국민의 노후를 책임지는 중대한 사안임에도 양당은 국민의 목소리가 담기지 않은 수치로 합의를 시도했으며, 이마저도 불발돼 연금개혁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2007년 이후 17년 만에 국민연금을 개혁하고, 1998년 이후 26년 만에 국민연금 보험료율을 인상할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친 것에는 윤석열 대통령의 책임이 가장 크다. 2022년 5월 취임한 윤 대통령은 연금·노동·교육 개혁을 3대 개혁과제로 꼽았다. 선거 공약집에서 “국민연금 제도는 급여만 낮추고 보험료율을 올리지 않아 소득대체율이 40%로 하락했고, 9%인 보험료율이 유지되면 현재의 2030세대 연금 부담률이 지나치게 높아지므로 세대 공존의 연금개혁이 필요하다”며 대통령 직속 ‘공적연금개혁위원회’를 설치해 연금개혁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공적연금개혁위원회를 만들지 않고 약속을 어겼다. 그래놓고는 2024년 5월9일 취임 2주년을 앞두고 열렸던 기자회견에서 “지난 대선 때 ‘정부를 맡게 되면 임기 내에 국회가 고르기만 하면 될 정도의 충분한 자료를 제출하겠다’고 약속드렸고, 작년 10월 말 그 공약을 이행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보건복지부가 2023년 10월 국민연금 재정계산을 토대로 국회에 제출한 5차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안)은 보험료율·소득대체율 개혁에 관한 정부 안이 담기지 않은 ‘맹탕안’이었다. 게다가 복지부의 종합운영계획 수립은 국민연금법 제4조에 근거해 정부가 5년마다 하는 업무일 뿐이다. 윤 대통령의 업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종헌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연금행동) 사무국장은 <한겨레21>에 “연금개혁은 정부의 의지가 강해야 야당이 협조하면서 추진될 수 있는데, 윤석열 정부는 개혁안조차 제출하지 않았다. 애초에 연금개혁 의지가 없었던 것”이라며 “이번 연금개혁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윤석열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이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공은 국회로 넘어갔다. 여당인 국민의힘의 요구로 2022년 10월 국회에 연금개혁특별위원회(연금특위)가 설치됐지만 논의는 지지부진했다. 그리고 2024년 1월에 와서야 시민들의 공론화를 통해 의견을 수렴하겠다며 공론화위를 출범시켰다.
시민대표단의 본격적인 논의를 앞두고 노동계(8명)와 사용자(8명), 지역가입자(8명), 청년(8명), 수급자 단체 대표(4명) 등 36명으로 구성된 의제숙의단은 2024년 3월 토론을 거쳐 국민연금 모수개혁 방안으로 ‘소득보장안’과 ‘재정안정안’ 두 가지를 추렸다.
2024년 4월22일, 공론화위는 서울 영등포구 국회 소통관에서 시민대표단 492명 가운데 56%가 국민연금 보험료율을 현행 9%에서 13%로 올리고 소득대체율도 40%(2028년 기준)에서 50%로 높이는 소득보장안을 선택했다고 발표했다. 보험료율만 12%로 올리고 소득대체율은 유지하는 재정안정안은 42.6%의 선택을 받았다.
그런데 대통령과 정부, 여당은 이 결과가 나온 뒤 돌연 태도를 바꿨다. 공론화위의 활동과 시민 의견 수렴과정에 의문을 제기하고, 유례없이 공론화위를 열어 시민이 숙의했는데도 논의가 부족하다고 트집을 잡았다.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5월26일 국회 기자회견에서 “청년, 미래 세대의 국민 공감대 형성도 없고, 제대로 여야 합의조차 안 된 상황에서 정쟁을 위한 소재로 활용할 이슈는 아니”라며 “(민주당이 주장하는) 모수개혁만 먼저 보내놓고 나면 (구조개혁을 포함한) 연금개혁은 진지한 논의가 진행되기 어렵다”고 밝혔다. 대통령실 관계자들도 언론 인터뷰를 통해 “연금개혁 논의에는 2030 청년들이 앉아야 한다”는 입장을 흘리며 엉뚱한 말을 했다.
공론화위 과정에 참여한 전문가들은 황당하다는 반응이다. 김연명 공론화위원은 <한겨레21>에 “공론화위에서 시민대표단의 토론 의제를 정하는 숙의단 구성을 놓고 격론 끝에, 미래세대인 청년의 목소리를 더 들어야 한다고 해 청년대표 8명, 수급자 대표 4명으로 정했다”며 “최근 언론의 주목을 받은 신·구연금 분리나 구조개혁에 대해서도 숙의단에서 토론했고, 구조개혁에 포함되는 국민연금과 기초연금의 관계(국민연금 급여구조와 기초연금 수급 범위를 현행 유지하고, 급여 수준을 강화하도록 노력한다)는 공론화위 결과에 포함됐다”고 여당·정부의 주장을 일축했다.
공론화위도 결과보고서에 별도의 질의·응답 페이지를 만들어 ‘청년세대가 인구구성비 대비 더 많이 참여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질문에 “청년 목소리가 더 많이 반영됐더라도 논란이 됐을 것”이라며 “공론화 의제가 전국민적 관심사라는 점에서 대표성 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전국의 만 18살 이상 성인남녀라는 보편적 기준으로 모집단을 규정했다”고 설명했다. 공론화위는 “청년세대가 더 많이 참여했더라도 소득보장안이라는 최종 결론은 바뀌지 않았을 것”이라고도 밝혔는데, 시민대표단 투표에서 18∼29살(20대)에서도 과반(53%)이 소득보장안에 찬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와 여당의 태도는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해)였다. 애초에 재정안정안이라는 연금개혁 방향을 정해놓았다는 얘기다.
이러한 정부 태도는 공론화위 이전에 정부의 연금 재정계산보고서 작성 과정에서도 이미 한바탕 논란이 됐다. 2023년 8월 5차 국민연금 재정계산위원 두 명(남찬섭 동아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주은선 경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이 “현재 (재정계산)위원회가 공적연금으로서 국민연금 본질을 구현하고, 합리적이고 공평한 재정안정 방안을 마련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다”고 말하며 사퇴한 것이다. 두 위원은 “논의 초반에 보고서를 ‘재정 중심’과 ‘소득대체율 인상’을 균형 있게 제공하기로 해놓고, 논의가 진행되면서 재정 중심으로만 보고서 내용이 구성됐고 최종적으로 재정계산위 자료집에 ‘보장성 강화’ 내용은 빠진 채 공개됐다”고 했다.
국민연금 ‘재정안정’은 분명히 중요한 요소다. 연금은 ‘소득보장’과 ‘재정안정’이라는 두 기둥이 굳건해야 ‘지속가능성’을 보장할 수 있다. 국민연금법 제1조는 ‘국민의 생활 안정과 복지 증진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명시하고 있고, 같은 법 제3조는 ‘국가는 연금급여가 안정적·지속적으로 지급되도록 해야 한다’고 국가의 의무를 명시하고 있다.
두 입장은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소득보장을 강조하는 쪽에서는 “당장의 노인빈곤율이 심각하기 때문에 재정안정성을 조금 저해하더라도 소득대체율을 높여 저출산·고령사회로 활력이 떨어진 사회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청년들이 출산을 기피하는 기저에는 ‘불안한 노후’(높은 노인빈곤율)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한국은 1988년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을 70%에서 40%로 낮춘 뒤 한 번도 올린 적이 없기 때문에 보험료율을 높이려면 소득대체율도 올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재정안정을 주장하는 쪽은 소득대체율을 높이는 것이 실질적으로 노인빈곤율을 낮추는 데 크게 도움을 주지 못하므로, 재정안정성을 유지해 최대한 기금 고갈 시기를 늦추는 것이 현세대의 의무라는 입장이다. 국민연금에서 세대 간 형평성도 중요하기 때문에 미래세대에 너무 과도한 부담을 지우는 방향으로 개혁이 이뤄져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둘 모두 일리가 있는 주장이지만 정부와 여당은 재정안정이라는 한쪽 방향만 정해놓고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재정안정 쪽 전문가들과 보수 언론이 잊을 만하면 연금 ‘고갈론’을 역설하면서 결과적으로는 대중이 ‘위험 분산’과 ‘소득 재분배’ 기능이 있는 사회보험을 불신하게 만드는 점도 문제다. 연금의 재정안정을 강조하는 보수 정부에서 과거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국민연금이 찬성하도록 압력을 가해 연기금에 손해를 입힌 경험을 떠올려보면 더욱 믿음이 가지 않는다.
이렇게 연금개혁을 둘러싼 시민들의 소중한 숙의 과정이 수포로 돌아갔다. 제갈현숙 연금행동정책위원(한신대 강사)은 “앞선 두 차례 연금개혁은 정부가 주도했는데 처음으로 공론화위원회에서 시민대표단이 숙의하고 의사결정을 했다는 역사적인 의미가 큰 결정이었다”며 “하지만 공론화위의 결정에 반대하는 전문가 집단의 오만과 독선, 시민의 뜻은 존중하지 않고 권력에 야합하는 정치세력, 무책임하게 말 바꾸는 정부 여당의 세 축이 연금개혁 실패의 원인”이라고 짚었다.
국민연금 개혁이 앞으로 언제 다시 합의에 이를지 기약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절망적이다. 제22대 국회에서 다시 연금특위를 구성하고 합의에 이르는 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밟아야 한다. 남찬섭 동아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여당과 야당 대표가 소득대체율 인상에 합의하고 국회의장까지 나섰는데도 개혁을 막은 정부는 연금개혁 의지가 없는 것으로 봐야 한다”며 “22대 국회의 과반 의석을 차지한 야당이 공론화위에서 결론 난 부분을 토대로 모수개혁이 담긴 연금개혁안을 통과시키고, 연금특위를 다시 구성해 긴 호흡으로 구조개혁 논의를 진행해야 한다”고 했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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