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겪어봤기 때문에 알거든요, 얼마나 잔인한지. 얼마나 사람들의 삶이 피폐해지고 무너지고, 희망의 끈을 놓고 싶은 순간이 많은지 겪어본 사람들만이 알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은 이런 일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저희가 침몰 참사의 원인을 밝히겠다고 나서는 거예요.”(허경주 스텔라데이지호 대책위원회 부대표)
2023년 12월16일 오후 3시께, 120여 명이 모인 서울 중구의 중대형 강의장에서 7분짜리 영상이 재생되자 영상을 보는 사람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2017년 스텔라데이지호 침몰 사고로 남동생을 잃은 허경주씨의 영상이 나올 무렵이었다. 약 30년 동안 한국에서 일어난 재난참사로 가족을 잃은 피해자들은 눈물을 참지 못했다. 1999년 씨랜드청소년수련원에서 일어난 화재참사로 유치원생 자녀를 잃은 어머니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눌렀고, 1999년 인천 인현동 화재참사로 고등학생 자녀가 숨진 아버지는 눈에 눈물이 고인 채 헛기침을 했다. 노란색 옷을 입은 세월호참사 유족들도 눈물을 닦았고, 유족들의 곁을 지켰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날 국내 재난참사 피해자들은 ‘재난참사피해자연대’를 발족했다. 재난참사 피해자의 권리를 보장하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제도 마련과 법 개정 등에 나서기 위해서다. 재난참사 피해자들이 연대체를 만든 것은 민관을 통틀어서 국내 최초다. 뜻을 모은 단체들은 8개 참사의 피해자들로 삼풍백화점 붕괴(1995년), 씨랜드청소년수련원 화재(1999년), 인천 인현동 화재(1999년), 2·18 대구지하철 화재(2003년), 가습기살균제 피해, 공주사대부고 병영체험학습 참사(2013년), 세월호 침몰(2014년), 스텔라데이지호 침몰(2017년) 등이다. 참사 피해자들은 “우리가 겪은 참사를 여러분이 겪지 않기를 바란다. 불가피하게 동일한 상황에 처한다면, 곁으로 찾아가 여러분의 손을 잡고 위로하고자 한다”고 발족선언문을 낭독했다.
재난참사 피해자 일부는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는 사람들과 닿으려는 마음이 강했다. 참사 현장에 가면 가슴이 아플 게 분명했다. 무엇을 도울 수 있을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든 재난참사 피해자들은 다른 참사 현장을 찾았다. 2013년 ‘7·18 공주사대부고 병영체험학습 참사’의 피해 가족들은 이듬해 2014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자, 참사 현장으로 갔다. 2011년 강원도 춘천으로 봉사활동을 떠났다가 산사태로 숨진 인하대 학생 유가족도 세월호 유족을 찾았다.
세월호 참사 유족도 다른 참사의 유족들을 찾았다. 2018년 충남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비정규직 하청노동자 김용균씨가 숨지자, 세월호 유족들은 장례식장을 찾아 조문했다. 다른 이들은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에게 ‘밥은 먹었느냐’ ‘밥을 먹어야 산다’는 말로 챙겼지만, 세월호 유족은 달랐다. “지금 밥이 목으로 넘어가겠느냐”며 식사를 권하는 사람들을 물러나게 했다. 김미숙 이사장을 시시각각 비추던 방송사 카메라도 다른 곳으로 옮겨달라고 요구했다. 겪어봤기에 다른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
4·16재단은 2022년부터 각기 다른 재난참사 피해자들을 만났다. 다른 재난참사 피해자 가족들을 위로하고 연대하는 일을 제안했다. 의아해하는 반응도, 기다렸다는 듯 함께하겠다고 나선 피해자들도 있었다. 이재원 인천 인현동 화재참사 유족회 회장은 “참사가 발생했을 때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는 빨리 참사를 수습하는 데 급급하다. 진상을 알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사고가 발생했을 때 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싶어서 합류했다”고 말했다.
박성현 4·16재단 나눔사업1팀장은 “한국 사회가 진상규명과 피해자 권리를 등한시했기 때문에 희망을 갖지 못하는 재난참사 피해자들도 있다. 다만 함께하기로 한 분들은 ‘내가 경험한 것을 다른 사람이 반복해서 경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강한 분들”이라고 설명했다.
4·16재단은 2024년 1월 말께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우리 함께’를 개소할 예정이다. 센터가 하는 일은 재난피해자 중심의 지원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12월16일 발족식에서 ‘한국 사회에서 재난피해자의 위치와 권리’라는 주제로 발제한 유해정 센터장은 “한국 사회는 재난 피해의 문제를 권리로서 보장하지 못한다”며 “이들이 직접 나서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해야 하고, 오늘 같은 재난참사피해자연대 발족식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센터는 재난 피해 경험을 가진 당사자들을 재난안전전문가로 양성해 이들이 또 다른 재난참사 피해자를 지원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또 4·16 긴급지원 기금운영 사업을 통해 재난피해자에게 기금을 지원하고, 의료·심리·법률 지원 등 전문인력과의 연계, 피해자 단체와 연결하겠다는 사업목표도 세웠다. 이 밖에 재난피해자의 권리를 증진하기 위한 콘텐츠 제작·배포와 더불어, 피해자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정책·제도를 만들기 위해 토론회를 지속해서 열려 한다.
이날 행사에서는 참석자들이 조별 토론을 통해 앞으로 센터가 어떤 일을 하면 좋을지도 이야기했다. 다양한 의견을 주고받은 뒤 포스트잇에 원하는 센터의 상을 적었다. “피해자들에게 치유의 쉼터” “피해자 중심의 권리 센터” “재난참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변할 수 있도록 노력” 등을 주문하고 “잊힌 재난참사를 다시 찾아내는 역할” 등 중장기 과제도 제시했다.
초중등 교육과정에서 재난 교육이 필요하다고 제언한 임기홍 경남연구원 연구위원은 “우리 사회가 재난을 바라보는 인식이 달라질 수 있도록, 정규교육에서 누구나 재난을 겪을 수 있고 재난이 사회구조적 문제임을 인식하게 해야 할 것 같다”며 “자연재난이든 사회적 참사든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서혜미 기자 h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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