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얘길 해주고 싶어요. 한국에 계신 여성분들, 꼭 외국기업에서 일해보세요. 한국만 나서면 지금 사태가 얼마나 황당한지 아실 수 있을 겁니다.”
2023년 12월4일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 데이터과학자 주한나(44)씨를 줌(화상) 인터뷰로 만났다. 2017년 <여혐민국>(베리북 펴냄)을 출간하는 등 여성 정보기술(IT) 업계 종사자로서 한국의 성차별 문제에 목소리를 내온 그가, 최근 벌어진 ‘넥슨 사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서다. 넥슨 사태는 2023년 11월23일 넥슨이 공개한 게임 홍보영상에 ‘남성 혐오를 상징하는 집게손가락 자세를 한 캐릭터가 등장했다’며 특정 남성 이용자들이 거세게 항의해 결국 넥슨 외주업체에 근무하던 여성 애니메이터가 퇴사 의사를 밝힌 사건이다.
후속 보도로 해당 장면은 여성이 아닌 남성이 그렸단 사실이 밝혀졌지만, 이용자들은 믿지 않았다. 이때 여성 애니메이터의 이름, 개인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이 공개돼 그는 각종 욕설 문자에 시달려야 했다. 문제는 이런 패턴이 IT업계에서 처음 등장한 일이 아니란 점이다. 2016년부터 게임 이용자 사이에서 ‘페미니스트 검증’을 하면서 ‘마녀사냥-사이버 괴롭힘-회사에 퇴출 요구’가 유형화되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영국·미국 등에서 개발자 생활을 이어온 주씨는 “한국 기업들이 이제 패턴을 깨야 할 선택의 기로에 섰다”고 지적했다.
—주한나(페이스북 활동명 ‘양파’)씨를 잘 모르는 독자를 위해 간단히 하는 일을 설명해달라.
“미국 워싱턴주 커클랜드에 살면서 마이크로소프트 데이터사이언티스트(데이터과학자)로 일한다. 인공지능(AI) 언어모델 지피티(GPT)로 큰 기업용 소프트웨어 기능을 구현하는 팀에 있다. 한국에 알려진 건 페이스북에 업계 얘기나 여성인권 얘기를 쓰면서인데, 현재 3만 명 정도가 페이스북에서 내 페이지를 팔로(구독)하고 있다. 업계 여성 가운데는 내 페이지를 팔로하기만 해도 페미니스트로 찍혀 표적이 될 수 있어, 팔로하지 않고 글을 읽기만 한다는 분도 있다.”
—한국에서 10살까지만 살고 남아공에 이민해 이후 영국과 미국에서 개발자로 일했다. 한국에 살지도 않는데 한국 성차별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며 페이스북 활동을 하는 이유는?
“한국에도 여성 개발자가 많아진 것 같지만, 여전히 목소리를 내기 힘든 환경이란 느낌을 받는다. 똑같은 말을 해도 외국기업에서 일하는 나한텐 회사 압력이 가해질 리 없고, 한국에 학연·지연도 없으니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 가끔 나 때문에 국외에서 IT업계 커리어를 시작했다는 분들 메시지를 받는데, 그럴 때 정말 힘이 난다. 트위터에서 ‘유럽·미국 마초보수 가부장남이 한국 기준 페미니스트급 사상을 갖고 있는 거 사실임?’이란 글을 본 적 있는데 사실이다. 외국에선 여성이 ‘페미’라며 자르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다. 페미니즘은 기본값이다.”
—같은 IT업계 종사자로서 넥슨 사태를 어떻게 봤나.
“최근 한국을 방문했을 때 네이버 등 한국 IT업계도 분위기가 정말 많이 좋아졌다고 들었다. 하지만 넥슨 사태처럼 손가락 모양에 발작하는 건 황당한 일이다. 문제가 된 손가락 모양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지 않나. (관련 보도가 나왔는데도 믿지 않는 건) ‘혐오 표현이라고 보기엔 너무 흔하고 어중간한 손모양이 문제인지 아닌지는 이용자인 내가 결정하겠다’는 자세다. ‘내 생각에 네가 페미라면 그게 혐오 표현인 것으로 결정하겠다’는, 말하자면 ‘페미니즘 관련 발언을 하는 사람 누구든 그의 미래를 결정할 힘을 갖고 싶다’는 거다. (페미니즘) 관련 담론은 조금이라도 (개인 SNS를) 뒤지면 나올 수 있지 않나.”
—외국 IT업계와 분위기를 비교하면 어떤가.
“오히려 반대 상황이다. 예를 들어 구글의 전 직원 제임스 다모어는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차이로 남자 개발자나 리더가 더 많은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여성을 더 포함하려는 시도는 의미 없다’는 식의 발언을 했다가 바로 구글에서 잘렸다. 사티아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 최고경영자(CEO)는 여성 임금과 관련해 ‘열심히 하면서 기다리다보면 보상이 돌아올 것’이란 취지의 발언을 했다가 엄청나게 비판받고 공식 사과했다. 2017년 나델라는 책 <히트 리프레시>(흐름출판 펴냄)에서 그 사건에 대해 반성하며, 그 일이 회사에 변화(임원 보상과 다양성 개선을 연계 등)를 가져오는 계기가 됐음을 설명하기까지 했다. 여성에 대한 차별적 발언은 곧 회사 이미지라고 생각하는 게 보통 회사의 분위기다. 한국도 분위기가 많이 좋아졌다고 들었는데, 넥슨 사태처럼 여성혐오적 발언에 대놓고 선을 긋진 않는 분위기인 거 같다. 정말 놀란 게 한국 IT업계 종사자들은 종종 자기 회사 이름도 걸려 있는데 성차별적 내용을 페이스북에서 공개적으로 말하더라. 최근 블라인드에서도 회사 이름이 걸려 있는데 ‘여대 이력서는 무조건 거른다’고 하지 않았나. 놀라웠다. 미국 회사에서는 인사고과를 할 때 ‘내가 D&I(Diversity and Inclusion·다양성과 포용성)를 위해 뭘 했는지’ 써야 한다.”
—한국은 왜 분위기가 유독 다를까. 한국 젊은 남성들의 분노가 ‘윗세대 남성이 혜택받았는데, 왜 젊은 세대 남성이 반성해야 하느냐’는 반감이란 분석도 있더라.
“어느 나라나 백래시(반발)가 있다. 가령 남아공은 인종차별적 과거가 있으니 젊은 백인들이 억울해한다. 우리 부모 세대가 했는데 왜 나까지 그런 시선을 받아야 하느냐는 것이다. 자신은 수혜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근데 사실 수혜자가 맞는다. 백인은 교육제도 등 문화적 토양이 다른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다. 다만 한국이 특이한 건 남성들끼리 똘똘 뭉칠 수 있었던 점 같은데, 언어적 이유가 아닐까 싶다. 남아공 젊은 백인은 불만을 품더라도 영어를 쓰기 때문에 국제사회의 시선을 정확히 안다. 전세계가 어떻게 판단하는지 알기 때문에 섣불리 그런 말을 못한다. 한국 사회는 영어를 쓰는 사회와 단절된 면이 있다. 그런 문제는 단절된 상태에서 더 심해지기 쉽다.”
—최근 미국의 한 개발 콘퍼런스에서도 없는 여성 연사를 허위로 있는 것처럼 기재했다가 논란이 생겼는데.
“사실 웃겼다. 비판받을 만한 사건이지만, 한국과 정반대의 강박이 외국기업에 있단 걸 보여준다. ‘초청할 여성 연사가 많은데 왜 안 했냐’는 비판도 있지만, 여성 개발자 중에 나서길 좋아하는 사람이 드문 것도 사실이다. 여성이 나서면 아직도 더 눈길을 끌고, 개발자 가운데 딱히 나서는 걸 좋아하는 성향이 많지 않아서이다. 그런데 해외 기술 콘퍼런스 등에서는 백인 남성들로만 가득 찬 패널은 지적받는 분위기여서 그런 구성을 피하려 한다.”
—한국 대기업들이 어떻게 이 상황을 개선해야 한다고 보나.
“가령 미국 대학을 보면 성차별·성추행 관련 규정이 생기면서 처벌받는 사례들이 생겨났고, 그 선례가 생기자 다음부터는 ‘보통이 아니구나’ 해서 조심하게 되지 않았나. 한국도 그런 기로에 섰다고 본다. 중요한 시점이 왔다. 지금까진 ‘우린 페미니즘 몰라’라는 자세였고 젊은 남성들이 그런 회사를 향해 패턴을 만들려 하지 않았나. 무리수를 뒀는데 한 번 먹히는 걸 보니까 룰처럼 정착시키려 한 거다. 이 시점에서 기업에 먹히냐 안 먹히냐에 따라 남성 이용자들의 행보가 달라질 거다. 여성혐오적 발언에 선을 그어야 한다. 한편으론 우리 기업들이 영미권에 더 많이 진출해 영미권 정책을 지키면 자연스럽게 변화할 수도 있다. 외국에 많이 나간 회사일수록 영향받을 수밖에 없다. 국외 이용자들을 보고 ‘어, 여기선 다르네’라고 느끼고 기업들도 자연스럽게 변해갔으면 좋겠다.”
—한국 성차별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면 SNS에서 공격도 많이 받지 않나.
“많다. 하지만 나한테 하는 공격은 세진 않다. 외국기업이라 회사에서 잘리게 할 수도 없고, 나에게 학연·지연도 없으니까. 그리고 나에 대해서도 정말 이상하게 해석하더라. 내 페이스북을 보고 ‘외국의 제대로 된 페미니스트는 이렇게 돈도 잘 벌어오고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집안일도 하는 것 같은데, 한국 페미는 다르다’는 거다. 황당한 이야기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석사를 하고 회사에 다닐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특별히 좋은 상사를 만나서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했는데.
“한국처럼 출산·육아휴직을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나는 임신 중에 연봉이 더 오르고 진급도 했다. 남아공·영국·미국 중에서도 특히 유럽은 그런 분위기가 좀더 강한데 임신·육아를 하는 여성에게 불이익을 주는 건 굉장히 불명예스러운 일이란 인식이 있다. 보통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했고, 근무시간 조절이 가능해 오후 4시에 퇴근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늦으면 밤 10시에 퇴근하기도 하지만. 남편도 골드만삭스에 다녔기에 둘 다 만만한 직장은 아니었다. 그래도 ‘애가 아파 일찍 간다’ 하면 남편이나 나나 그것이 허용되고 조율이 됐다. 임신·출산하러 가서 일 떠맡게 됐다고 눈치 주는 동료도 전혀 없었고, 그래서 여성도 자신이 민폐라는 인식이 없다. 남편도 내가 아이를 낳고 몇 주 정도 아이와 시간을 가졌다. 가사와 육아를 하나하나 나눌 필요 없이 다 같이 한다.”
—한국 여성들에게 외국기업 취업을 추천한다고 했는데.
“강력 추천한다. 난 개인적으로 게으른 사람이고 엄청 열심히 하는 편은 아니다. 19살에 남아공에서 공대에 입학했는데 곧바로 취업했다. 이후 영국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일하며 소프트엔지니어링 석사를 밟았지만 비자 때문이었고, 직장 때문은 아니었다. 외국기업은 처음에야 학벌·학점을 좀 보지만 그다음부터는 무조건 경력이다. 정말 좋아하는 분야가 있으면 오히려 취업하기 쉽다. 지금 연봉이 25만달러(약 3억3천만원) 정도인데 미국 테크업계에서는 엄청 높은 편도 아니다. 미국에서는 아시아계 여성 하면 오히려 기업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일 잘하고 수학 잘한다는 긍정적 의미의 선입견이 있다. 언어와 비자 문제만 준비됐다면 많은 한국 여성이 외국기업에서 일해보면 좋겠다.”
손고운 기자 songon1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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