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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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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 쓰자 하니…이런 작가 네가 처음이라고

③ 외주제작사 방송작가 편
구두계약 거부하고 세 차례 요구해 계약서 작성했지만 출근 시간만 존재하는 장시간 노동 환경은 바뀌지 않아
등록 2023-09-16 02:10 수정 2023-09-18 01:09
한 방송작가가 원고 작업하는 모습을 직접 찍었다. 채윤 제공

한 방송작가가 원고 작업하는 모습을 직접 찍었다. 채윤 제공

“고등학생 때부터 방송작가가 꿈이었어요.”

중학교 때부터 글 쓰는 걸 좋아하던 학생이 고등학교 방송부에 들어가면서 꿈을 구체화했다. 김가영(가명) 작가는 방송도 할 수 있고 글도 쓸 수 있는 ‘방송작가’가 되고 싶었단다. 대학교도 방송 관련 학과를 나와 방송작가라는 직업을 가지게 됐지만, 현실은 꿈과 너무 달랐다.

“출근 시간은 정해져 있는데 퇴근 시간은 따로 없었어요. 새벽 4시에 퇴근해도 오전 10시까지 출근해야 했죠. 선배들이 퇴근하지 않으니 저도 퇴근을 못하죠. 방송 전날 밤새우는 건 당연하고요.” 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게 불합리하다고 느꼈지만 이제 막 방송작가를 시작한 새내기가 문제를 제기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가장 먼저 배운 건 순응하는 방법이었다.

쉴 수 있는 방법은 퇴사뿐

퇴근해도 퇴근한 기분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촬영 중인 피디의 전화와 메인 작가, 팀장의 전화는 언제 걸려와도 꼭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종일 앉아 있고, 또 퇴근한 뒤에도 업무 스트레스에 시달리니 몸에서 이상이 느껴졌다.

“쉬고 싶으면 방법은 딱 하나예요. 그만두는 거죠.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요.”

가영씨는 중학교 때까지 태권도 선수 생활을 했다. 선수 생활을 그만둔 뒤에도 꾸준히 운동했다. 그래서 건강 하나는 자신 있었지만, 방송작가를 시작한 지 4년 만에 몸이 위험신호를 보냈다. “저는 허리가 너무 안 좋아서 주기적으로 치료받고 있어요. 신경주사도 맞고 도수치료도 받고. 주변에 허리 안 좋은 작가는 너무 많고요. 전화 오는 게 너무 스트레스여서 정신과 약을 처방받는 작가도 있어요.”

작가들끼리 모이면 ‘작가를 갈아서 프로그램을 만든다’는 말을 한단다. 가영씨는 자기 허리를 갈아 프로그램을 만든 셈이다.

가영씨의 첫 방송 생활은 지상파방송사에서 시작했다. 지상파에서는 가영씨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계약서를 가져왔다. 지상파에서도 밤샘작업, 정해지지 않은 퇴근 시간은 똑같았지만 계약서는 쓰고 일했다. 외주제작사는 계약서조차 쓰지 않았다. 모두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아무도 계약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이게 무슨 경우인가 싶어 선배 작가들에게 물었죠. 혹시나 임금체불이 생겨도 계약서가 없으면 증명할 길이 없으니 웬만하면 쓰는 게 좋다고 하더라고요. 웬만하면? 당연한 게 아니었나 싶었죠.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할 때도 계약서는 쓰잖아요.”

2020년 서울 상암동에서 열린 방송사 비정규직 스태프 노동 환경에 대한 거리 캠페인 모습. 청주방송 고 이재학 피디 사망 사건 대책위원회 제공

2020년 서울 상암동에서 열린 방송사 비정규직 스태프 노동 환경에 대한 거리 캠페인 모습. 청주방송 고 이재학 피디 사망 사건 대책위원회 제공

편의점 아르바이트할 때도 계약서는 쓰는데

가영씨의 ‘당연한’ 요구는 세 차례나 거부당했다.

“우리 회사는 작가와 계약서를 쓴 경우가 한 번도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계약서가 없다고요. 그래도 써달라고 하니 어디에다 제출할 것인지 목적을 말하라 하고. 위에다 물어보겠다는 말을 세 번을 들은 거죠. 계약서도 제가 문화체육관광부 누리집에 들어가 (표준계약서 양식을) 다운받아서 가지고 갔죠.”

계약서를 썼지만, 업무 환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출근 시간은 있지만, 여전히 퇴근 시간도 없고 정해진 휴일도 없이 일해야 했다. 다행히 임금체불은 없었다. 겨우 계약서를 쓸 수 있었던 제작사에서 1년 넘게 일하고 그만둔 지금까지 가영씨 외에 계약서를 쓴 작가는 없다고 한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에 비정규직이 등장했다. 처음에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이 다른 만큼, 업무에도 차이를 두는가 싶더니 시간이 갈수록 업무 경계는 모호해지고 그저 지칭하는 단어만 달리하는 경우가 늘어나는 추세다. 하지만 방송작가는 태생부터 비정규직이었다. 능력이 뛰어나도, 학벌이 높아도 예외는 없다.

방송작가는 오랜 시간 프리랜서라는 가면을 쓰고 있지만 출근하면 자기만 앉는 책상이 있고, 지시받은 범위 안에서만 업무를 진행한다. 최근 방송작가의 근로자성을 인정하는 판결이 계속 나오지만 ‘관행’이란 벽에 부딪혀 현실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관행은 그저 굳어지기만 하지 않는다. 거기에 구두계약, 퇴근 없는 노동이라는 살이 붙어 더 단단해지고 있다. 그저 방송을 만드는 작가가 되고 싶어 일을 시작한 가영씨. 하지만 방송계는 20대 사회초년생이던 가영씨에게 만만치 않은 곳이었다.

일해도 ‘결방’하면 무임금

방송작가들의 가장 큰 화두는 ‘결방’이다. 송출을 기준으로 임금을 받기 때문에 일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의미가 없다. 결방의 이유는 다양하다. “야구·축구 같은 스포츠가 편성되면 결방이고요. 추석과 설 때도 결방, 올림픽·월드컵처럼 기간이 긴 행사는 2주에서 3주 동안 결방이죠.”

문제는 결방 사실을 언제 알려주느냐다. “월드컵이나 올림픽 같은 경우는 보통 2주 전에는 알려주죠. 근데 야구는 비가 오면 경기를 안 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한번은 비 예보가 있어 방송을 다 만들어놓고 출근해서 기다리다가 비가 안 와서 그냥 퇴근한 적도 있어요.”

송출만 안 했을 뿐인데 임금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올림픽 때문에 결방된다고 쉬는 것도 아니다. “2~3주 동안 방송이 안 나가면 그동안 미리 방송을 만들어놓거나 새 코너를 기획해야 해요. 일은 하는 거죠. 자발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시켜서 하는 거예요. 하지만 방송이 안 나가니까 임금은 없어요.”

한 달이 보통 4주인데 2주 이상 결방되면 월급은 반토막 난다. 최소한 일한 만큼의 임금도 받지 못하는 방송작가라는 직업에 고민이 많다는 가영씨. 그는 요즘 혹시 모를 미래를 위해 컴퓨터자격증 학원을 열심히 다니고 있다.

채윤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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