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아홉 살 해원(가명)씨는 드라마 조명팀에서 일한 지 2년이 조금 넘었다. 조명일을 시작한 계기는 학교 다닐 때 촬영수업에서 라이팅(lighting)을 선택하면서였다. 조명일은 흥미로웠다. 빛의 색깔과 밝기 등을 미세하게 조절하고 그것을 알아보는 선배들이 신기하고, 그 방법을 배우는 재미도 컸다.
“연출 쪽 일도 해봤는데 재미가 없었어요. 장비 쓰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조명을 맞추는 일을 잘 몰라서 혼나기도 하고, 아직은 ‘막내’*라 조명을 들고 하루 종일 서 있기만 하는데 괜찮아요. 다른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온종일 서 있어봐서 그건 힘들지 않아요.”
해원씨는 뭐든 힘들지 않다고,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본인을 “어디든 잘 적응하는 스타일”이라고 소개한 해원씨는 주어진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노동시간과 임금에 대해서도 그랬다.
일일드라마 촬영에 참여하는 해원씨의 노동시간은 하루 15시간인데 미니시리즈나 주말연속극보다 짧은 편이라고 했다. 보통 주 3~4일 일하고 일당 18만원을 받는다.
“한 달에 일하는 날이 열흘 넘고 쉬는 날 알바하면 (다 더해서 월) 200만원 넘게 받으니까 살 만해요. 모이는 돈은 없지만 만족해요. 사촌언니랑 같이 사니까 월세도 나눠 낼 수 있고요. 다른 직군은 150만원도 안 되는 경우도 많더라고요.” 일하다 다치거나 사고 난 적이 있냐고 물었을 때는 “조명 올리다가 고리를 잘못 푸는 바람에 조명에 머리를 맞았는데 엄청 무거운 건 아니어서 괜찮았다”고 했다.
긍정적인 해원씨에게도 힘든 점이 없는 건 아니다.
“저는 밤샘 촬영이 너무 힘들더라고요. 일하는 시간은 똑같은데 밤 촬영이 길면 엄청 처지고 일하기 싫어져요. 아침 일찍 모여서 밤 10시에 끝나는 게 최고인 것 같아요. 영화는 12시간 촬영한다는데 드라마도 그랬으면 좋겠고요. 그런데 영화가 12시간이라는 게 사실이에요?”
드라마 현장의 초장시간 밤샘 노동은 악명 높다. 퇴근하지 못하고 모텔이나 여관에서 자야 하는 날도 많고, 제작사에서 숙소를 잡아주지 않아 먼 거리를 출퇴근하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지방에서 이틀 연속 촬영하는데 숙소를 안 잡아주고 그 늦은 시간에 출퇴근을 시키더라고요. 촬영버스 기사님도 욕할 정도였어요. 뭐, 저는 괜찮았어요. 생각보다 멀지 않더라고요.”
15시간 일하고도 촬영이 안 끝날 때는 제작사에서 “1시간만 더 촬영할 수 있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어차피 한 명이라도 안 된다고 하면 못 찍는 거거든요. 그래서 강요 아닌 강요를 하기도 해요. 당장 다음주 방영인데 오늘 안 찍으면 못 찍는 거니까.” 그래서 가끔 1시간씩 더 일하는 날이 있기도 하다.
대표적인 ‘남초’(남성이 많음) 직군인 조명 쪽에서 여성 스태프를 만나는 건 쉽지 않다. 20대 여성 해원씨를 만난 건 내게도 행운이었다. 해원씨도 기술팀에서 여성을 많이 보지 못했다. “연출부, 제작부나 의상팀, 소품팀에는 여성이 많은데 조명팀에서 여성은 딱 한 번 봤고요. 촬영팀에서는 그래도 자주 봤어요. 막내가 여성인 촬영팀이 생각보다 많더라고요. 그립(장비)팀은 한 번도 못 봤고요.” 남성이 많은 직군에서 일하는 애로사항도 있다.
“조명 장비가 무겁다보니 일을 아예 안 시킬 때가 있는데 그게 좀 싫어요. 저도 들 수 있는데 지레 안 된다고 짐작하고 ‘넌 안 돼’ 그럴 때요. 물론 제가 힘이 달리기는 하지만, 그걸 못하면 더 높은 자리까지 못 올라가는 거잖아요. 체력을 기르려고 헬스장에 다니는데 딱히 효과가 없는 거 같아요.(웃음)”
2023년 9월1일 출범한 방송 비정규직 인권단체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름 엔딩크레딧’이 발표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방송현장에서 일어나는 괴롭힘이 직장인 평균의 두 배 이상이었다. 성차별적 발언과 행동, 음담패설, 성희롱이 무수히 많은 곳이 방송현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괴롭힘이나 성폭력 예방 교육이 제대로 되지 못하고 있다. 해원씨도 관련 교육을 들어본 적이 없다. 드라마 대본 앞에 ‘괴롭힘(성폭력) 예방수칙’ 등이 간략하게 붙어 있을 뿐이다. “드라마판에서는 소리 지르고 면박 주는 일이 너무 많으니까 그러려니 하는 거죠. 쟤 또 그러나보다 그러고 말아요.” 문제를 제기하거나 그러지 말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굳이 다른 팀한테 말 얹는 걸 안 하는 분위기라 그냥 지나가요. 혼난 막내한테 ‘아휴 고생한다’ 그 정도 하는 거죠.”
그래도 요즘엔 성희롱 발언이 수위가 세지면 “대본 앞(예방수칙)을 보라”고 하고, “그런 말 하면 안 된다”고 얘기해주는 사람도 있다. 해원씨 앞에서 누군가 성희롱적 발언을 했을 때 조명팀 선배가 제지해준 적이 있다. “요즘엔 스태프끼리 대놓고 하는 경우는 별로 없고, 남자 스태프가 여성 배우의 얼굴과 몸매를 품평하는 일이 많아요. 그걸 듣는 게 너무 불편하죠.”
해원씨가 일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때는 혼자 조명을 잘 맞춘 날이다. “대부분 혼나는데, 딱 한 번 잘했다고 엄지척 받은 적이 있는데 그때 좋더라고요.” 해원씨는 오랫동안 조명일을 하고 싶다. “웬만하면 계속하고 싶죠. 조명감독까지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조명감독은 인맥 관리가 중요하잖아요. 제가 그런 걸 잘 못하거든요. 감독님 밑에서 ‘퍼스트’ 하며 살고 싶어요.(웃음)” 드라마 작업은 힘들지만 드라마산업은 비전이 있다고 생각하는 해원씨. 요즘 드라마 제작 수가 많이 줄어든 걸 체감하는지 물었다. “솔직히 좀 줄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너무 많아요. 다 찍어놓고 방영하지 못하는 드라마도 수십 개잖아요.”
드라마 현장의 많은 노동자가 드라마판에서 오래 일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하곤 한다. 장시간 노동, 불규칙한 일상, 부당한 대우도 문제고, 삶의 안정적 보장 없이 어떻게 버틸지 걱정되기도 한다. 남성이 대부분인 조명팀에서 여성인 해원씨는 더 큰 차별과 어려움을 마주할지도 모르겠다. 해원씨가 좋아하는 조명일을 오랫동안 할 수 있도록 방송현장의 노동환경이 개선되기를 바라본다.
진재연 엔딩크레딧 집행위원장
*‘막내’는 전문성을 깎아내리는 단어로 지양해야 하지만, 인터뷰이가 사용한 방송 제작 현장의 용어를 그대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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