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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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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결정에… ‘실업자’ 된 정신장애인

전일제 정신장애인 특화 일자리사업 중단 그 뒤
서울시 “중복된 사업” 주장하지만 참여 대상·임금 다 달라
등록 2023-03-27 06:37 수정 2023-03-29 05:01
<한겨레21>과 인터뷰하는 원세희씨. 정신장애 당사자인 그는 동료상담가로 일하며 생계를 꾸렸지만 서울시가 2023년 관련 사업을 중단해 실업자가 됐다. 사진 고경주 교육연수생

<한겨레21>과 인터뷰하는 원세희씨. 정신장애 당사자인 그는 동료상담가로 일하며 생계를 꾸렸지만 서울시가 2023년 관련 사업을 중단해 실업자가 됐다. 사진 고경주 교육연수생

“당장은 실업급여로 생활하지만 실업급여 지급이 6월께 끝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동료상담가 외엔 전문성 있는) 경력이 없으니까요. 뭐든 일을 구해야 할 텐데 할 일이 있나 싶고요.”

원세희(36)씨는 2023년 1월 실직한 뒤 어떻게 구직활동을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다. 20대 초반에 조현정동장애 진단을 받은 원씨는 2년 동안 정신장애인 동료상담가로 일했다. 폐쇄병동 강제입원을 경험한 뒤 기초생활수급자로 수급비를 받으며 생계를 유지했던 그다. 원씨는 서울시의 ‘정신장애인 동료상담가 양성사업’을 알게 된 뒤 동료상담가로 일하며 비로소 수급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서울시가 2020년부터 시행한 이 사업은 정신장애 당사자가 동료 정신장애인을 전문적으로 상담하는 일을 지원한다. 드물게 정신장애인 특성에 맞춰 설계된 전일제 일자리다.

동료 상담하며 수급자 벗어나

오롯이 생계를 꾸리게 된 지 불과 2년 만에 원씨는 실업자가 됐다. 서울시가 2023년부터 해당 사업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원씨와 함께 서울시 ‘정신장애인 동료상담가 양성사업’에 참여했던 23명 중 약 10명은 여전히 실업 상태다.

서울시는 다른 사업과 중복되는 점을 폐지 이유로 든다. 서울시 경제정책실 관계자는 3월21일 “‘정신장애인 동료상담가 양성사업’과 복지정책실에서 진행하는 ‘맞춤형 중증장애인(동료지원) 일자리사업’이 중복된다고 판단해 사업 중단을 결정했다”며 “‘지방자치단체 보조금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라 주기적으로 진행하는 ‘지방보조금관리위원회’ 심의 결과”라고 말했다.

두 사업은 ‘동료상담’이라는 형식 면에선 유사하지만 참여 대상과 임금수준 등에서 모두 차이가 있어 완전히 중복된다고 보기 어렵다. ‘정신장애인 동료상담가 양성사업’은 2022년 기준 정신장애 당사자 18명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하지만 서울시 장애인자립지원과에 따르면 2023년 ‘맞춤형 중증장애인 일자리 사업’에 참여하는 정신장애인은 전체 참여자 38명 중 1명뿐이다. 이정하 ‘정신장애와 인권 파도손’ 대표 역시 “(후자는) 정신장애인을 위한 독립적인 참여 기회를 보장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기존 사업은 최저시급(9620원, 2023년 기준)보다 많은 서울형 생활임금(1만1157원, 2023년 기준)을 지급하며 주 30시간 근무한다는 조건으로 월 약 140여만원을 지급했다. 정신장애인이 기초생활수급자로서 지원받지 않아도 생활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반면 ‘맞춤형 중증장애인 일자리사업’의 경우 이보다 적은 월평균 89만원(2023년 예산설명서, 기본 운영비 기준)을 지급한다. 한 달 생활비로 충분치 않지만 동시에 의료급여수급 기준액(83만1157원, 2023년 1인가구 기준, 보건복지부 고시)은 넘어 의료비 지출이 많은 정신장애인으로선 참여할 유인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정신장애인의 특성을 고려한 사업의 필요성도 계속 제기되는 상황이다. 정신장애인은 장애인구 중에서도 고용 면에서 특히 취약하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이 실시한 ‘2022년 상반기 장애인 경제활동 실태조사’에 따르면 정신장애인 고용률은 11.3%로 전체 15개 장애유형 중 가장 낮고, 실업률은 14%로 두 번째로 높다. 같은 시기 전체 장애인의 평균 고용률은 36.4%, 평균 실업률은 4.5%였다. 시각장애인이나 발달장애인의 경우 보건복지부가 장애인 일자리 사업의 일환으로 지원하는 ‘안마사파견사업’ ‘요양보호사 보조일자리사업’이 운영되고 있다. 각자 장애 특성에 맞춘 일자리다. 반면 정신장애인은 복지부 지원을 받는 특화형 일자리사업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취업 어렵고 맞춤형 일자리 없고… 이중고 겪는 정신장애인

경제적으로도 어렵다. 중앙정신건강복지사업지원단의 <정신건강동향 22호>(2017년 기준)에 따르면 정신장애인의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생계급여) 비율은 54.7%로 전체 장애인 평균인 15%에 견줘 세 배 이상 높다.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는 이런 상황을 반영해 2022년 “정신장애인의 노동권을 보장하는 조치를 도입하라”고 한국 정부에 권고하기도 했다.

이선혜 중앙대 교수(사회복지학)는 “이전의 정신장애인 관련 사업은 전일제가 아니라서 생계를 유지하기 힘든 수준의 일자리를 제공했거나 정신장애인의 특성에 맞추지 못했다”며 “전일제 일자리를 보장하는 ‘정신장애인 동료상담가 양성 사업’이 지속돼야 한다”고 말했다.

게다가 이 사업은 정신장애인의 전문성을 기르고 경제적 자립도 가능하게 한다는 면에서도 긍정적이다. 이 교수는 “정신장애인 당사자의 경험이 곧 ‘직업적 전문성’으로 발휘될 수 있고 당사자성을 숨기지 않아도 된다. 또 정기적인 병원 진료를 보장하고 적절한 휴식 조건을 마련하는 일이 가능해지는 등 맞춤형 업무환경을 조성할 수 있어 정신장애인의 안정적인 근무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성과도 뚜렷하다. 동료상담가로 일하며 원씨처럼 기초생활수급자에서 벗어난 이도 여럿이다. 사업 첫해인 2020년에 3명이 기초생활수급자와 차상위계층에서 탈피했다. 이어 2021년 5명, 2022년 8명이 경제적 취약계층에서 벗어났다.

회복 측면에서도 효과가 컸다.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22년 보건복지부와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입원병동에서 퇴원한 정신질환자의 27%는 평균 두 달 내 재입원(2020~2021년 기준)한다. 하지만 서울시의 ‘정신장애인 동료상담가 양성사업’에 상담가로 참여한 당사자들은 3년간 단 한 명도 병동에 재입원하지 않았다.

동료상담가로 활동하던 ㄱ씨는 “40년간 조현병을 앓았고 폐쇄병동에 입원까지 했지만 내 증상을 제대로 말해본 것은 동료상담 프로그램 때가 처음”이라며 “항상 낙인찍힌 사람 같았는데 (동료상담 시간에는) 모두가 똑같아 기분이 좋았다. 충동적 증상도 완화됐다”며 사업 중단에 아쉬움을 표했다.

해당 사업이 갑작스레 중단된 점은 상담가뿐만 아니라 내담자로 참여했던 44명(2022년 기준)에게도 고통이다. 이정하 대표는 “아직도 왜 상담사업이 중단됐냐고 물어오는 내담자들이 있다”고 말했다. 사업에 참여한 내담자의 59%는 기존 사회복지 서비스를 이용하기 어려워 복지 사각지대에 있던 정신질환 당사자다. (서울시 정신장애인 동료상담가 양성사업 성과보고서, 2022년) 동료상담가 ㄴ씨는 “정신장애의 특성 중 하나는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것”이라며 “내담자들이 다시 집에 고립되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상담자도 내담자도 고립될 우려

정신장애인들이 동료상담가 양성교육을 받아도, 올해 폐지된 서울시 ‘정신장애인 동료상담가 양성사업’처럼 안정적으로 생계를 꾸릴 수 있는 ‘일자리다운 일자리’는 거의 없다. 이선혜 교수는 “해당 사업은 입원환자의 증가를 막고 정신장애인의 수급 탈피를 돕는 등 장기적으로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만큼 (폐지하기보다) 법적·제도적 기반을 정립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고경주 교육연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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