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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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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 자급률이 자란다, 소득이 자란다, 환경이 자란다

제2의 주식이지만 자급률 0.7%에 불과,
식량안보·농가소득 보장·기후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기특한 작물
등록 2023-01-03 22:57 수정 2023-01-04 14:04
2022년 12월15일 전북 부안군 백산면 금판리 밀밭이 새싹으로 파랗게 물들었다.

2022년 12월15일 전북 부안군 백산면 금판리 밀밭이 새싹으로 파랗게 물들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박목월이 시 ‘나그네’를 읊은 풍경 같다. 파릇파릇 새싹이 뒤덮은 밑밭이 지평선까지 이어졌다. 여느 황량한 겨울 농토가 아니었다. 2022년 12월15일 호남평야 서쪽에 있는 전북 부안군 백산면 금판리 들녘에 파종 한 달여 된 밀밭이 펼쳐졌다. 이렇게 겨울을 나야 늦봄에 알곡을 맺는다.

“좋지 않아요? 저 지평선까지가 전부 밀밭이에요. 고속도로 타고 가다가 사람들이 (밀밭을 보고) ‘우리나라에 저런 데가 있었냐’고 그래요. 금판리에만 11월 150㏊(150만㎡)에 (밀을) 파종했어요. 여름에 쌀·콩을 키운 땅에 심으면 1㏊에 400만~500만원을 더 법니다. 그뿐입니까. 밀이 잎을 틔워 열심히 광합성을 하니 탄소는 잡고 산소는 내뿜습니다. 씨 뿌릴 때 한 번 골을 파고는 땅도 거의 안 건드려요. 자연스럽게 무경운(농토를 갈지 않는 재배법)까지 되는 거예요.”

유재흠 부안군 우리밀영농조합법인(부안조합) 대표가 말했다. 부안은 국내 최대 밀 산지 가운데 한 곳이다. 조합 소속 190여 농가가 한 해 밀 3200t을 생산했다. 2022년 전국 밀 생산량(약 3만5천t 추정)의 10%가량이다.

밀은 쌀만큼 친숙한 먹을거리다. 국수·수제비·만두 등 오래전부터 한국 음식에서 밀은 ‘제2의 주식’이다. ‘2022년 농림축산식품부 주요 통계’(2021년 기준)를 보면 한국 사람이 1년에 먹는 곡물은 모두 123.9㎏으로, 이 가운데 밀이 29.8%(36.9㎏)다. 쌀(56.9㎏·45.9%)에 이어 두 번째다. 콩(6.4㎏·5.2%)과 옥수수(3.6㎏·2.9%)까지를 ‘4대 곡물’이라고 한다.

농산물 수입 확대가 식량안보 대책?

그러나 자급률은 암담한 수준이다. 밀의 곡물자급률은 0.7%. 국민 100명 중 1명이 먹을 것조차 우리 땅에서 못 키운다. 사료용을 뺀 식량자급률도 1.1%다. 이 때문에 2021년 밀 수입량은 443만5997t(약 1조7528억원)에 이른다. 쌀(84.6%)을 제외한 옥수수(0.8%), 콩류(5.9%)의 곡물자급률도 미미하다. 2021년 우리나라 곡물자급률은 20.9%.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최하위권이다.

더욱이 최근엔 기후위기로 세계 곡물 가격이 요동치는 일이 잦아졌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2월)에 이은 인도의 밀 수출 금지 발표(5월)에 국제 밀값(선물 가격)이 하루 만에 6% 급등하기도 했다. 주요 곡물 생산국들은 자국 보호주의를 강화하지만 한국 정부는 여전히 ‘싼값에 사 먹으면 된다’는 기조를 유지한다. 2022년 8월 농림축산식품부는 대통령 업무보고 때 ‘농산물 수입 확대’를 식량안보 주요 대책이라고 발표했다. 이근혁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은 “자급률을 높이기보다 식량문제 해결 방안을 외부에서 찾는 것이 우리나라 곡물자급률 하락의 핵심 원인”이라며 “정부는 밀가루값 급등 등으로 음식값이 뛰어 국민 호주머니에서 돈이 나가는 건 외면한다”고 꼬집었다.

우리 땅에서 키운 농작물을 먹지 못하는 일은 기후 문제와도 밀접하게 연관됐다. 수입밀의 이동거리는 트럭·기차·선박 등 화석연료 운송수단을 이용해 1만㎞ 이상이나 되지만, 국산밀은 멀어야 300㎞ 정도다. 더구나 운송거리나 운송기간이 길어지면, 부패하거나 훼손되는 걸 막기 위해 농약을 추가로 더 써야 한다.

국산밀을 키우는 게 환경에도 좋다. “밀 등 겨울작물은 다른 작물이 재배되지 못하는 늦가을이나 봄의 풍부한 일조 조건하에서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탄수화물로 동화해 저장하는 동시에 산소를 배출함으로써 대기 정화에 큰 역할을 한다.”(농촌진흥청 ‘밀 재배의 공익적 기능’)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는 1㏊ 밀밭에서 밀을 재배하는 기간에 배출하는 산소가 4.46t, 흡수하는 이산화탄소는 6.13t으로 ㏊당 경제적 가치가 165만원 이상일 것으로 추정한다.

최우정 전남대 농업생명과학대학 교수는 “국산밀 재배가 늘면 안정적 식량생산이 가능하고, 화석연료로 운송되는 수입밀을 대체할 수 있어 의미가 크다. 겨울에 농토를 밀로 덮으면 바람에 의해 먼지가 생기는 것도 막고 온실가스도 흡수하는 등 효과가 추가로 생긴다”고 말했다.

‘밀 포기 정책’에 대항해 시민운동 성장

국산밀의 역사를 톺아보면 국산밀의 명맥이 이어지는 것만도 ‘기적’이다. 농촌진흥청 자료를 보면 1970년대까지 미국의 무상공급 등으로 밀 생산량이 크게 떨어졌다. 그럼에도 1980년 초까진 10만t 가까운 생산량을 유지했다. 하지만 1982년 밀 수입 자유화와 1984년 밀 정부수매 중단 조처 이후 1985년 1만517t, 1990년 889t으로 곤두박질쳤다. 밀 포기 선언이었다. 정부가 나 몰라라 하는 사이 국산밀 농업을 지킨 건 1991년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 발족으로 대표되는 ‘시민운동’이었다. 김경아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 사무총장은 “(국산밀 산업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와 같다. 키우기 위해선 해결할 일이 많다”고 말했다.

국산밀의 종자개발·재배·저장·제분·가공·유통에 이르는 산업 인프라는 걸음마 단계다. ‘보급 종자’는 금강·새금강·조경·백강 등 국수용(중력분) 4종에 불과하다. 미국·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 등 주요 밀 생산국이 1천~5천 종의 종자를 심어, 지역·재배 방법별로 구분한 뒤 가공업체의 요구에 따라 알곡을 섞어 공급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일본도 100여 종의 밀 종자를 재배한다.

저장·건조 시설도 마땅치 않다. 국산밀 전용 제분시설은 전남 구례군 광의면특품사업단우리밀가공공장영농법인(광의면 영농법인) 한 곳뿐이고, 대부분 인근 대기업 제분시설에 위탁한다. 밀가루는 용도에 따라 크게 빵으로 쓰이는 강력분(단백질 함량 13% 이상), 국수를 만드는 중력분(10~13%), 과자로 쓰는 박력분(8~10%)으로 구분한다. 국산밀은 제분량이 너무 적어 기본 용도 구분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다.

현재 정부수매(2022년 기준 1만7천t) 외 2만t가량의 국산밀은 소규모 민간 수매처들이 사들이고 있다. 부안조합, ㈜우리밀, 한국우리밀농협, 천안우리밀영농조합 등이 1천~6천t 정도씩 사들인다. ㈜농심 신라면에만 한 해 7만t가량의 수입밀이 사용된다고 하니, 국산밀 소비량은 새 발의 피 수준이다. 밀은 한 해 250만7천t(사료용 제외, 2021년 기준) 소비량의 95% 정도가 가정이 아닌 식품제조사나 빵집·식당 등 업소에서 대량 소비된다.

국산밀 농가와 소비처들은 스스로 ‘지혜’를 짜내고 있다. 2년 전부터 국산밀을 사용하는 부안 ‘우리밀해물짬뽕’ 조영훈 대표는 “오래전에 국산밀로 반죽하면 퍼석퍼석해서 툭툭 끊어지는 느낌이라 쓸 수 없는 정도였는데, 지금은 그런 건 없다. 밀만 반죽하면 쫄깃쫄깃한 맛은 떨어지지만 감자전분을 조금 섞는 등 개발한 방식으로 좋은 면발을 뽑아낸다”고 말했다.

부안군 하서면 청호리의 저장창고에 밀 알곡이 담긴 포대들이 쌓여 있다.

부안군 하서면 청호리의 저장창고에 밀 알곡이 담긴 포대들이 쌓여 있다.

3~4년 전부터 종자별·지역별 데이터 축적

이날 둘러본 부안군 하서면 우리밀영농조합의 밀 저장창고에는 800㎏ 포대가 수십 개 쌓여 있었다. 포대 위엔 국산밀을 생산한 지역과 품종, 생산 농민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유재흠 대표는 “같은 금강밀이라도 해남과 부안에서 생산된 것의 단백질 함량이 2% 차이가 난다. 이걸 다 같이 섞으니까 품질이 들쑥날쑥했다. 그런데 3~4년 전부터 국산밀을 종자별·지역별로 단백질 함량 등을 구분하고 데이터도 축적해가고 있다”고 말했다. 국산밀을 가공·유통하는 아이쿱생협은 강력분에 글루텐을 첨가하고 박력분엔 전분을 첨가하는 방식으로 밀가루 품질을 관리한다.

정부도 2018년 국산밀 생산·유통·가공 현장의 요구를 받아들여 35년 만에 밀 수매를 재개했다. 2019년 제정된 ‘밀 산업 육성법’을 바탕으로 △국산밀 품질관리 강화 △공공기관 국산밀 우선구매 요청 등의 내용을 담은 5년 단위 ‘밀 산업 육성 기본계획’도 마련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정부의 이런 장밋빛 구상을 믿는 사람이 드물다. 정부가 2008년부터 2018년까지 네 차례 걸쳐 ‘밀 자급률 10% 목표’ 등을 내걸었지만 모두 빈말에 그쳤기 때문이다. 밀 자급률은 1% 안팎에서 제자리걸음이다.

2022년 국산밀 6200t을 수매한 한국우리밀농협의 김태완 상무는 “정부 계획에 구체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정부의 종자 보급이 늘어나 2023년 밀 생산량이 6만5천t가량으로 추정되는데도 정부가 계획한 수매량(2만t)을 더 확대하려 하지 않는다. 자급률을 높인다고 했으면 지방자치단체, 교육청, 국방부 등과 어떻게 협의해서 늘리겠다는 소비 쪽 계획이 있어야 하지만 그런 게 없다”고 지적했다.

송동흠 우리밀세상을여는사람들 운영위원장은 “국산밀 산업은 블루오션이 아니다. 수입밀 시장을 치고 들어가려면 국산밀이 수입밀보다 뛰어나야 하는데, 정부가 그 고민을 하고 있나? 국내 밀 산업 조사도 제대로 안 하고 있다. 국산밀의 경쟁력을 높이려면 가격을 어떻게 끌어내릴지부터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부안읍 우리밀 전문판매장에 우리밀 가공식품들이 진열돼 있다.

부안읍 우리밀 전문판매장에 우리밀 가공식품들이 진열돼 있다.

일본밀이 수입밀보다 싼 비결은 화끈한 직불금

국산밀은 2022년 국제 밀값이 급등했음에도 수입밀보다 2배 가까이 비싸다. 일본은 자국산 밀 가격이 수입밀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싸다. 일본 농림수산성의 ‘2022년 밀 수급 전망 발표’ 자료를 보면 2021년 기준 이바라키 지역의 사토노소라 품종의 경우 수입밀보다 8.8% 저렴했다. 일본은 밀농사에 대한 직불금을 ㏊당 800만원가량 지급한다. 한국의 밀 직불금은 50만원이다. 일본의 2021년 밀 자급률은 17%다. 김경아 사무총장은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통한 가격경쟁력 향상은 국산밀의 자급률을 올리는 필수 요소”라고 지적했다.

김보람 농림축산식품부 식량산업과장은 “일본만큼 직불금을 지급하는 것이 지속가능할지 의문”이라면서도 “민간 소비가 제일 중요한 문제라 그쪽으로 많이 투자하려 한다. 또 밀의 공익적 가치에 대한 연구도 충분히 해나가겠다”고 말했다.

기후 문제에 도움이 된다는 것 외에 국산밀의 강점은 뭘까. 2016년 문을 열어 한 해 국산밀을 100t가량 소비하는 전남 구례 ‘목월빵집’ 장종근 대표는 “제빵성은 수입밀보다 다소 떨어지지만 신선하고 풍미가 살아 있으며 통밀빵으로 만들면 그 향이 그대로 전달된다”고 말했다. 2005년부터 국산밀을 쓰는 부안 ‘슬지제빵소’ 김종우 대표도 “누가 생산했는지, 어떻게 재배했는지 눈으로 확인이 가능하고 안전해서 국산밀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충남 천안 ‘우리밀진미칼국수’ 김복례 대표는 “수입밀로 만든 짜장면과 칼국수는 더부룩하고 소화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국산밀 칼국수는 밀가루 못 먹는 사람들까지 배불리 먹는다”고 설명했다.

2014년부터 천안 호두과자에 수입밀 대신 국산밀이 쓰이는 데 기여한 이종민 천안우리밀영농조합법인 대표는 “국산밀이 품질이 나쁜 게 아니라 특성이 다르다. 수입밀엔 없는 개성이 있다”며 “우리는 밀가루를 팔 때 특성에 맞게 수분량을 어떻게 하고 발효할 땐 뭘 주의해야 하는지 등 가공법까지 알려준다. 그랬더니 ‘천안 국산밀은 빵이 되네요’라고들 한다. 국산밀 가공법을 전파하는 교육기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맨논에 씨 뿌려 이모작 가능

밀은 겨울철 노는 논밭에 심는 이모작 작물이다. 소비처가 충분히 확보되고, 가능한 모든 논밭에 밀을 심을 수 있다면 완전 자급도 가능하다. “요즘 쌀값이 떨어져 농가 저소득이 문제인데 밀농사를 지으면 농민 소득이 2배가 됩니다. 맨논에 씨앗을 뿌려놓고는 수확 때까지 인력이 많이 안 들어가고 경비도 별로 안 듭니다. 농민들 주머니가 두둑해지면 그 돈이 어디로 가나요? 비료도 사고 밥도 먹고 옷도 사고 지역경제가 삽니다. 그래야 농촌에 청년들이 오겠지요.” 우리밀살리기운동 1세대인 최성호 구례 광의면 영농법인 대표의 말이다.

부안(전북)=글 김양진 기자 ky0295@hani.co.kr, 사진 박승화 선임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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