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발표한 국정과제에서 ‘국민연금의 적정부담 적정급여’를 언급했다. 지금의 국민연금 보험료 부담은 적정하지 않으니 앞으로 보험료를 올리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봐야 한다. 사실 오랫동안 9%로 유지되는 국민연금 보험료율을 고령화에 따라 늘어나는 연금급여 지출에 맞춰 점진적으로 조정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적정부담 적정급여’는 지향으로는 적절하다. 물론 ‘적정’이 어떤 의미인지, 국민연금 가입자가 받는 급여에서 ‘적정’ 기준이 무엇인지는 논쟁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국민연금 보험료율 인상을 점진적 문제로 접근하는 것, 나아가 국민연금 급여 인하를 도모하며 급여 인상을 후세대 착취로 묘사하는 것은 ‘적정부담 적정급여’를 논하는 것과 전혀 다른 문제다. 정말 지금 당장 큰 폭의 보험료 인상을 단행하지 않는다면 이는 후세대에 감당할 수 없는 과중한 부담을 안기는 일일까? 보험료를 빠르게 올려서 국민연금기금을 대규모로 쌓아놓지 않는다면 미래세대에 대한 도덕적인 책무를 저버리는 것일까? 지금 국민연금 급여를 깎는 것이 정말 미래세대의 부양 부담을 해결해주는 길일까?
기초연금이든 국민연금이든 어떤 형태를 띠든지 공적연금을 통한 부양은 세대 간 부담으로 이뤄진다. 공적연금은 현 노동세대가 자원을 동원해 노인세대를 부양하는 제도다. 이에 공적연금제도는 경제성장의 결실을 노동시장에서 물러난 은퇴세대도 고루 누리도록 한다. 이 때문에 대부분 공적연금은 그해 보험료를 거둬들이고 바로 연금을 지급하는 부과 방식(pay-as-you-go)으로 운영된다.
그런데 연금보험료를 거둬들여 바로 연금지출을 충당한다는 공적연금임에도 국민연금에는 900조원 넘는 기금이 형성돼 있다. 그 기금의 의미와 용도는 무엇인가? 한국 국민연금기금은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대규모 기금으로, 한국 경제 규모에 견줘서도 그 규모가 크다. 이는 지난 30여 년 동안 매해 지출분을 넘어서는 보험료를 오랫동안 쌓아온 결과다. 그럼에도 국민연금기금은 미래에 지출해야 할 연금액을 다 충당할 목적으로 쌓아놓은 것은 아니다. 미래 지출분을 다 쌓아놓지 않았다고 제도에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니다. 미래의 급여는 미래의 기여로 재정 조달하는 것이 원칙이다. 국민연금기금은 인구·경제 등 급격한 변화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한 완충기금(Buffer Fund)으로, 특히 경제성장 속도보다 고령화 속도가 빠른 국면에서, 연금보험료율이 지나치게 빠르게 올라가는 것을 막아줄 수 있다.
900조원 국민연금기금은 ‘완충장치’‘2057년 국민연금기금 소진’은 흔히 예정된 시한폭탄처럼 거론되곤 한다. 그러나 이는 2057년까지 국민연금이 보험료를 부과하는 소득 기반을 확대하고 보험료율을 조정하는 등 인구변화에 제도를 적응시킬 시간이 있다는 뜻이다. 물론 기금 소진 시점은 무엇보다 보험료율을 언제 어떻게 조정하느냐에 따라, 그리고 재원 다변화, 앞으로의 인구, 경제성장, 기금 수익 추이 등에 따라 계속 달라진다. 당장 2023년에 보험료율을 1%포인트 올린다면 기금 소진 시점은 달라진다.
보험료율 인상은 국민연금기금의 완충 기능을 고려해 설계될 수밖에 없고, 향후 인구구조가 새로운 균형을 이루기까지 점진적인 보험료율 인상으로 연기금이 완충 효과를 발휘하도록 한다면, 소득대체율 회복 역시 불가능하지 않다. 요컨대 미래세대 연금 부담의 증가 속도를 늦춰주는 장치로서 국민연금기금이 존재하며, 이는 보험료율 인상 속도를 늦추는 동시에 국민연금 급여의 적절성을 포기하지 않도록 한다. 즉, 연기금의 존재는 국민연금 보험료와 급여에 관한 정책 결정을 할 때 중요한 고려 요소다.
국민연금은 장기간에 걸쳐 작동하는 노후보장제도로 ‘세대 간 계약의 지속성’이 그 본질이다. 각 세대는 앞세대의 노후 보장에 사회적 책임이 있고, 세대에 걸쳐 이것이 지속된다는 신뢰가 국민연금제도의 존립 기반이다. 그러나 세대 간 공평성을 명목으로 연금급여를 축소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공적 이전이 줄어들면 당연히 개인의 부양 책임은 더 커지기 마련이다. 즉, 사회적 책임의 총량이 줄어들지 않은 채 연대적 책임 자리에 개인 책임이 들어설 뿐이다. 문제는 이렇게 공적연금의 역할을 줄이고 각자의 책임을 늘리는 경우 세대 내 불평등은 커지고 노인이 빈곤할 가능성은 더 커진다는 것이다.
국민연금 개혁을 제도 안에서의 이익 다툼, 세대 대립 문제로 빠뜨리는 것은 제도의 목표와 작동 원리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됐다. 세대 간 계약을 지속하는 요소로서 재정적 지속가능성은 중요하지만 이는 해당 시기 사회의 부담 능력으로 판단하는 것이 적절하다. 한 예로 지금 국민연금 개혁으로 영향받을 2050년의 부담 가능성 문제는 지금 노인세대와 2050년 노동시장 활동세대의 수익 비교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2050년의 생산력으로 판단할 문제다. 그런 의미에서 국민연금 급여를 무조건 깎는 것이 답이 아니다. 여러 세대에 걸쳐 안정적 소득이전 조건을 창출하는 것이 더욱 근본적인 해법이다.
그렇다면 세대 간 부양을 지속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핵심은 후세대가 노인 부양 역량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다. 아동과 청년에 대한 교육, 보건의료, 돌봄, 주거, 고용 등에 지원을 대폭 늘려야 하는 이유는 후세대의 역량을 높여 세대 간 복지 순환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다. 사회가 자신을 키워냈다고 느낄 때 청년은 앞으로 부모세대와 자녀세대 부양을 받아들일 것이다. 즉, 복지를 받은 경험이 복지를 위한 지출을 낳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교육보다 사교육을 선호하고, 계층 간에 뚜렷이 차별화된 돌봄, 양육의 계층재생산 구조가 고착되는 것은 공적연금을 위한 사회연대 기반을 침식한다. 공교육 질을 높이는 데 충분히 투자하고 이를 통해 계층 격차를 줄이는 것은 공적연금의 지속가능성에도 중요하다. 적정 노후 보장에 대한 사회적 책임의 핵심인 국민연금을 둘러싼 세대 연대는 연금제도 안에서 이익 다툼이 아니라 전 생애에 걸친 복지와 부담의 순환에 기반한다.
주은선 경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공적연금강화 국민행동×<한겨레21> 공동기획: 코끼리 옮기기, 연금개혁 : 윤석열 정부가 연금개혁을 첫 번째 개혁 과제로 꼽고 있다. 연금 연구자들과 함께, 개혁의 필요성과 논쟁점을 짚어보는 글을 5주 연속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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