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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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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마 ‘공기’가 스크린에 뜰 때

가습기살균제 사건 다룬 첫 상업영화 <공기살인>
참사 피해자와 제작진이 전하는 영화, 그리고 현실
등록 2022-04-30 03:16 수정 2022-04-30 11:49
2022년 4월28일 오후 <공기살인> 제작진인 유재환 프로듀서(왼쪽)와 소재원 작가(오른쪽)가 서울 종로구 SK서린빌딩 앞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농성장을 찾았다. 김진수 선임기자

2022년 4월28일 오후 <공기살인> 제작진인 유재환 프로듀서(왼쪽)와 소재원 작가(오른쪽)가 서울 종로구 SK서린빌딩 앞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농성장을 찾았다. 김진수 선임기자

가습기살균제 사건을 다룬 상업영화가 처음으로 나왔다. 2022년 4월22일 개봉한 <공기살인>은 가습기살균제 사건 피해자가 진실을 파헤치는 이야기다.

수많은 피해자의 교집합인 주인공

2011년 어느 날, 대학병원 의사 정태훈(김상경)의 6살 아들이 수영하다 숨을 쉬지 못해 정신을 잃고 병원으로 실려 간다. 아들의 병간호에 필요한 물건을 챙기러 집에 간 아내는 갑자기 숨진 채 발견된다. 아내와 아들은 병원에서 ‘급성 간질성 폐질환’이라는 질병을 앓았다고 진단받는다. 정태훈의 처제인 현직 검사 한영주(이선빈)는 언니의 5개월 전 건강검진에서 아무 문제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을 의아하게 여긴다. 아내의 주검을 부검하니 딱딱하게 변해버린 폐가 나온다. “이게 뭐야? 폐가 어떻게 이렇게 굳었지?” 정태훈은 울부짖는다. 2022년을 살아가는 우리는 이 일의 진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다큐멘터리가 아닌 드라마의 문법으로, 픽션과 논픽션을 오가며 진실을 다루는 일은 쉽지 않았다. “주인공은 수많은 사건과 사람이 얽히고설킨 교집합에 근거해 창조된 인물이다. 2011년 전만 해도 가습기살균제를 쓰면 사람이 죽는다고 의사나 변호사가 말해도 믿지 않았을 때다. 진실이 드러나고 공론화되는 11년이라는 시간을 영화 상영 108분 동안 주인공이 전달할 수 있게 하려고 했다.” <공기살인>을 만든 조용선 감독의 말이다.

다시 영화 밖 현실의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1994년 유공(SK)은 ‘인체에 전혀 해가 없다’고 홍보하며 가습기살균제를 시장에 선보였다. 17년 가까이 가습기살균제가 팔렸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원인불명 폐질환으로 입원한 산모 4명이 숨지며, 진실의 조각 일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의사들은 신종 바이러스를 의심했고 당시 질병관리본부(현재의 질병관리청)에 신고했다. 역학조사를 거쳐 가습기살균제의 독성이 세상에 알려졌다. 정부가 KC 마크를 달아 가습기살균제의 안전을 보증해준 동안, 1천만 개 넘는 제품이 쓰였다. 이 제품을 사용한 소비자 가운데 2만여 명이 숨졌고 95만여 명이 폐질환 등 피해를 입었다. 영화 속 이야기처럼 현직 의사조차 가습기살균제 탓에 자녀를 잃기도 했다.

<공기살인> 제작에는 무려 6년이 걸렸다. “제가 쓴 소설이 영화로 나오기까지 2년을 넘긴 적이 없었어요. 영화 <터널>도 <소원>도 2년 안에 만들어졌어요.” <공기살인>의 모티브가 된 소설 <균>을 쓴 소재원 작가의 말이다. 그는 2016년 5월 가습기살균제를 다룬 소설을 낸 뒤 이를 영화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해 8월은 소 작가의 또 다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터널>이 개봉해 관객 700만을 향해가던 때였다. 옥시·SK·애경 등 대기업을 비판하는 영화라서였을까. 투자자도, 영화를 만들겠다는 감독도 잘 나오지 않았다. 소 작가는 친분이 있던 조 감독에게 영화 제작을 부탁했다. 조 감독은 흔쾌히 승낙했다.

새로 밝혀진 사실 앞에 수정만 97번

영화에 들인 총제작비는 30억여원이다. 2021년 한국영화 실질개봉작 200편의 평균 총제작비 12억원에 견주면 적잖은 액수다. “이 영화는 대기업 자본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중소 투자자와 배우들의 도움으로 나온 작품이라 의미가 더 크다.” 유재환 프로듀서의 설명이다. 주연배우들이 번번이 섭외를 거절할 때, 김상경 배우가 조 감독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이거 아무도 안 하니? 나라도 괜찮겠니?” 조 감독은 “그때 많이 울었어요. 김상경 선배에게 고마워요. 용기 내준 투자자들에게도 감사해요”라고 말했다.

영화 대본을 고친 횟수는 97번이다. 2016년부터 새롭게 밝혀진 사실이 나올 때마다 대본에 반영했다.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을 원료로 쓴 옥시레킷벤키저(옥시)의 가습기살균제 제품의 인체 위해성은 2011년에 확인됐다. 이후 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메틸이소티아졸리논(CMIT·MIT)으로 가습기살균제를 만든 제조·판매 업체인 SK케미칼(현 SK디스커버리)과 애경산업도 문제가 됐다. 기업 관계자들은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기소됐으나 2021년 초 1심에서 전원 무죄 판결을 받았고,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피해자들이 호소했듯 가습기살균제로 폐만이 아니라 온몸이 아플 수도 있다는 사실이 연구로 밝혀지기도 했다. 영화가 피해자의 슬픔을 담는 일을 넘어 가습기살균제의 진실을 둘러싼 싸움까지 나아가는 이유다.

<공기살인> 브이아이피(VIP) 시사회가 열린 4월18일 오후 서울 용산구 씨지브이(CGV)용산아이파크몰.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이 제작진과 함께 영화를 관람했다. “세월호 참사 때는 전 국민이 죽음을 다 목격했어요. 가습기살균제 참사는 각자의 집에서 일어났죠. 폐가 아프던 아버지는 119구급차에 실려가며 돌아가셨어요. 국민은 이 일을 못 본 거죠. 영화에서는 배우가 대신 죽음을 보여줬어요. 국민이 우리 죽음을 못 봤으니까….” 가습기살균제로 아버지를 잃은 김미란씨는 딸과 함께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4월28일 오후 영화 제작진이 SK서린빌딩 앞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농성장을 찾았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인 박준석(14)군의 어머니 추준영씨도 박군과 함께 영화를 봤다. “어른은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고 가르치는데, 주인공이 의사와 변호사니까 이길 수 있던 거네. 힘없으면 그냥 죽는 거네.” 영화를 본 박군이 이렇게 말했다고 추씨가 전했다. 돌이 되기 전부터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했던 박군은 전신 질환을 앓고 있어 뛰거나 힘든 운동을 하지 못한다. 폐는 정상인의 50%가량밖에 기능하지 못한다. 박군은 영화를 보고 나서야 옥시의 ‘실험보고서 조작 사건’을 알았다. 서울대 조명행 교수 연구팀이 옥시로부터 실험보고서를 의뢰받아 주요한 데이터를 빠뜨리고 자의적으로 결론을 수정한 사건이다.

국회 상영회 날 ‘피해구제 조정위’ 연장 여부도

영화에서는 주인공들이 재판에서 승리하는 모습까지만 나온다. 현실은 어떨까. 증거위조, 수뢰후 부정처사 혐의로 검찰에 기소된 조 교수는 2016년 9월 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듬해 항소심 재판부는 증거위조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다. 그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2021년 대법원은 항소심 판결을 최종 확정했다.

가습기살균제 사건에 항의하며 국회의사당으로 몰려든 시민을 보여주며 영화는 끝난다. “관객이 가습기살균제 사건을 경험할 수 있었으면 했어요. 그러면서도 지치지 않기를 소망했어요. 소설 <균>을 모티브로 하되 디테일한 사실에 근거해 희망이 섞인 시나리오로 새롭게 만든 이유예요.”

세상에 알려진 뒤 11년이 넘도록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가습기살균제 사건. 4월29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원회관에서 <공기살인> 시사회가 열린다. 같은 날 옥시와 애경의 거부로 무산될 위기에 처한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 조정위원회’의 활동 연장 여부도 결정될 예정이다.

이정규 기자 j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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