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 2월21일 전남 여수국가산업단지 여천엔씨씨(NCC) 3공장 사고희생자 합동분향소 인근 철망에 걸린 하얀 리본. ‘죽이지 마라’라는 글씨가 빨갛게 적혀 있다. 이정규 기자
쿠우우우우우웅. 비행기가 지나갔나 싶어 고개를 돌렸다. 누렇게 녹슨 첨탑 꼭대기에서 연소하는 불꽃이 굉음을 냈다. 공장 철망 너머로 보이는 표지판에는 새빨간 녹이 번져 몇몇 글씨를 파고들었다. 고압가스인 에틸렌, 프로필렌, 수소가스가 배관에 흐르고 있으니 가스가 누출되면 즉시 연락하라는 문구였다. 길바닥 하수구와 솟아오른 굴뚝에서는 하얀 수증기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화학물질 때문인 걸까. 목이 따끔거리고 속은 니글거렸다. 2022년 2월21일 찾아간 전남 여수국가산업단지 여천엔씨씨 여수3공장 인근의 풍경이다.
이곳에서는 2월11일 오전 9시26분께 일어난 폭발사고로 노동자 4명이 숨졌다. 하얀 리본들이 걸린 철망을 지나 공장 정문에 가보니, 숨진 노동자들을 위한 분향소 천막이 보였다.
사고는 열교환기를 청소한 뒤 최종점검을 하다가 터졌다. 열교환기에 공기를 주입해 압력을 높이며 시험가동을 하다가 갑자기 폭발이 일어났다. 현장에 화재나 화약 흔적은 없었다. 무게 1t, 지름 1.8m 크기의 열교환기 덮개가 튕겨 나가 노동자들을 덮쳤다. 사고 현장에는 여천엔씨씨 정규직 1명, 하청업체인 영진기술이 파견한 일용직 노동자 7명이 있었다. 이 가운데 4명이 숨지고, 2명은 중상, 나머지 2명은 경상을 입었다. 경찰은 정확한 사고 원인을 밝히려 수사 중이다. 고용노동부는 여천엔씨씨가 중대재해처벌법을 위반한 혐의가 있는지 조사하고 있다.
사고 원인은 아직 불분명하다. 노동자들이 덮개로부터 충분한 안전거리를 확보하지 못한 채 열교환기에 공기를 주입하는 누출검사(Leak Test)를 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에 대해 여천엔씨씨 관계자는 2월11일 열린 브리핑에서 “통상의 경우에 열교환기 누출검사시 압력을 볼 때 작업자들이 그 앞(열교환기 덮개)에 서 있지 않는다”면서도 “(당시 작업자들이 덮개 앞에 서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상황을 모르겠다”고 말했다. 전국현 여수플랜트노조 노동안전1국장은 “사고 당시 열교환기 덮개 바로 앞에서 작업한 것인지 정확히 확인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사고 현장에서 다친 뒤 회복한 노동자를 면담한 전국현 국장은 “마무리 작업으로 누출검사를 한 뒤 문제가 없으면 바로 후속 공정에 들어가고자 욕심내다보니, 8명이나 되는 인원이 함께 대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누출검사에 필요한 최소인원 2명을 넘어서는 작업자가 사고 현장에 머물다가 피해가 더 커졌다는 것이다.
여천엔씨씨에서 일어난 산재 사고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2001년 10월 폭발사고로 1명이 숨지고 1명이 다쳤다. 2006년 1월 냉매 오일이 유출돼 2명이 중화상을 입었다. 2008년 5월에도 화재가 발생해 2명이 다쳤다. 여천엔씨씨가 위치한 여수산단의 산재 역시 잦았다. 김회재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한국산업단지공단에서 입수한 자료를 보면, 2017년부터 2022년 2월까지 여수산단의 산재 사망자는 15명, 부상자는 10명으로 집계됐다. 불과 두 달 전만 해도 이일산업에서 폭발사고가 발생해 작업자 3명이 숨졌다.
경미한 부상까지 합치면 여수산단에서 일어나는 산재는 더 많다. 2021년 여수플랜트노조에 접수된 산재 사고만 해도 모두 72건이었다. △작업 중 산 성분 유출로 인한 화상 △작업하다 쓰러져 뇌졸중으로 병원 입원 △철재를 나르다가 디스크가 터지는 사고 등이 있었다. 여수플랜트노조는 “신고되지 않은 사고가 더 있을 것”이라고 본다.
민주노총과 산재피해자가족네트워크 주최로 2022년 2월24일 서울 중구 정동 민주노총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고 정순규씨(경동건설 산재 사망자) 유가족 대표인 정석채씨가 발언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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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여수산단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공단 노후화로 언제 또다시 사고가 날지 모른다고 입을 모았다. “2019년 여수산단에서 밸브 교체를 할 때, 손으로 밸브를 잡았는데 밸브에 구멍이 났다. 긴 시간을 지나오며 밸브가 부식돼 약해진 것이다. 화학물질이 새어 나왔을 걸 생각하면 아찔하다.” 25년 동안 여수산단에서 배관을 고치며 일해온 여진탁씨의 말이다. 15년 동안 파이프를 지지해주는 철골을 수리해온 ㄱ씨는 “황산 때문에 철골이 녹아서 덜렁거리는 모습을 보곤 했다”며 “벤젠 등 위험물질이 지나가는 배관 파이프가 썩어 있는 현장도 목격했다. 부분 교체가 아니라 모든 라인을 완전히 교체해야 하지 않나 싶다”고 말했다.
공장이 노후할수록 산재 사고 발생 수는 증가한다. 한국산업단지공단이 관리하는 국가산업단지 등 64개 산업단지 가운데 40년 이상 된 노후 산단에서 발생한 사망자 수는 66명으로 전체 산업단지 사망자 102명 가운데 65%에 달했다. 여수산단은 1967년부터 조성돼 50여 년 된 노후 산단이다. 여천엔씨씨도 나프타 분해시설 공장으로 1979년 10월 가동을 시작했고, 사고가 난 열교환기는 30년 넘은 노후 기계로 알려졌다.
이에 노동계는 ‘노후 산단 안전관리 특별법’을 제정하는 것이 대안이라고 주장했다. 민주노총은 2월24일 기자회견을 열어 “화약고 같은 노후 국가산단에서 노동자들은 어제도 오늘도 일하고 있다”며 “국회에 계류된 건설안전특별법을 통과시키고 국가산단에 대한 안전대책으로 산업단지시설 안전관리 특별법을 제정하라”고 밝혔다. 산단 내 노후 설비에 대해 정부가 관리감독권을 갖고, 중소규모 사업장에는 관리비용을 지원해주는 내용을 담은 법이다. 여수플랜트노조 관계자는 “사고 예방을 위해 노조가 명예산업안전감독관으로 위촉돼 현장에서 위험을 발견하면 작업을 중지시키는 권한을 받았지만 사실상 공장 출입을 막아 제도가 유명무실인 상태”라며 “사고가 나면 노동자들도 조사단에 들어가 사고 원인을 함께 규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노동자들이 여수산단에서 가장 부식이 심한 공장이라며 꼭 가보라고 말한 ㄴ화학 공장을 2월22일 찾아가봤다. 바닷가 근처 공장으로 가니 철망 너머로 황산이 담긴 탱크에는 녹이 슬어 있었다. 여수산단에는 산 너머 바닷가 인근까지 이런 공장이 즐비하다. 입주업체 294곳에서 노동자 2만4390명이 일하고 있다(2020년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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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노동자 4명이 있다. 이 가운데 하청노동자 3명은 오랜 시간을 함께한 관계였다. 이아무개(30)씨와 박아무개(41)씨는 사촌 관계이고, 박씨와 신아무개(38)씨는 여수 삼산면 초도에서 중·고교 시기를 함께 보낸 동네 형·동생 사이였다. 이들은 팀을 이뤄 열교환기 세척 작업 등을 함께 해왔다. 이씨는 결혼을 앞둔 예비신랑이었다. 신씨는 1남6녀 가운데 막내아들이었다. 박씨에게는 어렵게 얻은 태어난 지 50여 일 된 아기가 있었다. 여천엔씨씨 정직원 하아무개(57)씨는 정년을 2년 앞둔 상태였다.
분향소를 나가는 길. 철망에 걸린 100여 개의 하얀 리본이 바람에 나부꼈다. 한 리본에는 ‘죽이지 마라’라는 빨간 글씨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여수=이정규 기자 j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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