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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잠’에서 계속 꿀잠 잤으면

‘고 문중원 한국마사회 경마기수’의 부인이 보내온 ‘꿀잠’이 사라지면 안 되는 이유
등록 2021-12-07 16:27 수정 2021-12-08 02:04
2017년, ‘꿀잠’ 착공식. 한겨레 자료

2017년, ‘꿀잠’ 착공식. 한겨레 자료

거리에서 한뎃잠을 자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마음 편히 몸을 누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뜻을 모아 2017년 시민 후원금으로 지어진 ‘비정규노동자 쉼터 꿀잠’이 문을 닫을 처지로 내몰렸다. ‘꿀잠’이 있는 서울 영등포구 신길2구역에서 재개발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기 때문이다. 꿀잠 쪽은 대책위원회를 설립해 꿀잠 건물을 계속 유지하고 싶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한국마사회 경마기수로 일하다가 마사회의 승부조작 등 비리 의혹을 고발하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문중원씨의 부인 오은주씨가 꿀잠이 사라지면 안 되는 이유를 글로 보내왔다. _편집자

2019년 11월 남편이 한국마사회의 부당함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저는 상경투쟁을 위해 서울로 무작정 왔습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낯선 서울에 온 저는 그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남편이 너무 갑작스럽게 떠나버려 제가 할 수 있는 건 남편의 억울함과 한을 풀어주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100일간의 긴 싸움 동안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 있는 ‘비정규노동자 쉼터 꿀잠’이라는 곳을 알게 돼 머물 수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고통과 슬픔을 휘감은 채 겨우 버티며 투쟁했습니다. 눈뜨면 광화문으로 나가 ‘문중원을 살려내라’ 목 놓아 소리치고, 저녁이 되면 온몸이 녹초가 돼 꿀잠으로 돌아왔습니다. 꿀잠에 오기 전 장례식장에서 지낼 때는 잠을 잘 수도 없어서 울면서 졸았고 아무것도 먹지 못해 마시는 수액으로 겨우겨우 버티며 남편 옆을 지켰습니다.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을 녹였다

그 무엇도 감당하기 힘들고 한순간에 무너져버렸던 저는 그렇게 꿀잠에서 지내며 조금씩 밥을 먹고 잠잘 수 있게 됐습니다. 꿀잠에서 상근으로 계시는 활동가분들이 제가 편히 잘 수 있게 따뜻한 이불을 마련해주시고 조금이라도 먹을 수 있게 매일 끼니를 챙겨주셨습니다. 꿀잠이라는 공간은 저에게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을 서서히 녹게 하고 100일이라는 힘든 시간을 헤쳐나갈 수 있게 해줬습니다.

꿀잠에서 100일간 지내는 동안 가장 힘들었던 점은 떨어져 있는 아이들을 볼 수 없다는 거였습니다. 매일 전화가 와서 “엄마 언제 와?”라고 묻는 아이들에게 눈물을 꾹꾹 삼키며 기다려달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꿀잠에선 많은 노동자와 시민사회, 종교계 분들이 마음을 모아 저희 아이들을 위한 ‘아빠와 크레파스’라는 선물잔치를 열어주셨습니다. 아이들 선물이 가득했고 꿀잠 1층에 많은 분이 모여 함께 정성 가득한 음식을 준비해주셨습니다.

너무 아프게도 당시 저는 단식투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꿀잠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꿀잠으로 달려갔습니다. 문을 여는 순간 꿀잠에는 따뜻한 온기와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꿀잠에서 지내면서 가장 기억에 남고 가장 감사했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날만큼은 저희 아이들도 아빠의 빈자리를 잠시 잊고 너무나도 환하게 웃던 모습이 생생히 떠오릅니다.

이렇듯 비정규노동자 쉼터 꿀잠은 비정규직, 해고자뿐만 아니라 저처럼 가족을 잃고 벼랑 끝에 서 있는 유족들에게도 따스한 손을 내밀어준 곳입니다. 저 말고도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 해고자분들이 힘든 투쟁 과정에서도 꿀잠에서만큼은 지쳤던 몸과 마음이 잠시라도 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며칠 전 남편의 2주기가 지났습니다. 2년이 지난 지금도 꿀잠으로 다시 쉬러 가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꿀잠에서 선물받은 따뜻한 온기를 다시 우리 아이들에게 나눠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2021년 11월17일 효성첨단소재 해고노동자들이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꿀잠’에서 잠을 청하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2021년 11월17일 효성첨단소재 해고노동자들이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꿀잠’에서 잠을 청하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따스한 손을 내밀어준 외갓집 같은 곳

비정규노동자 쉼터 꿀잠은 많은 노동자에게 따뜻한 안식처입니다. 그런데 재개발 사업으로 꿀잠이 하루아침에 철거될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꿀잠은 비정규노동자들의 외갓집 같은 공간으로 눈치 보지 않고 언제든 밥 먹고 잠자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이자 투쟁하는 비정규노동자, 열악한 비정규직 운동단체와 다양한 부문 활동가들이 소통·연대하는 공간입니다. 2017년 3월 지금은 돌아가신 백기완 선생님과 문정현 신부님을 비롯해 수천 명의 마음이 모여 쉼터 건물을 매입했습니다. 100일 동안 연인원 1천여 명의 자원봉사로 리모델링 공사를 해서 2017년 8월19일 문을 열었습니다. 비정규노동자, 다양한 부문의 활동가, 학생 등 연인원 4천여 명이 이용하고 정부 지원 없이 시민 후원금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쉼터 문을 연 이듬해부터 재개발 추진 움직임이 있더니 2020년 3월 신길2구역주택재개발조합(이하 재개발조합)이 설립되고 현재 재개발 급물살을 타고 있습니다. 재개발조합 설립 이후 꿀잠은 ‘존치돼야 한다’는 입장을 담은 공문을 조합 쪽에 보냈습니다. 2020년 11월 말 꿀잠을 지키기 위해 100여 개의 단체와 개인이 ‘꿀잠을 지키는 사람들’(이하 꿀잠대책위)을 결성하고 영등포구청에 꿀잠을 존치해야 한다는 입장서를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재개발조합 쪽과 영등포구청, 꿀잠 대책위 3자가 만나 간담회도 하고 영등포구청장도 만났습니다.

꿀잠이 공공재임을 모두가 인정했고 방안을 마련해보겠다는 답변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재개발조합 쪽은 영등포구청과 시청 유관부처들과 사전협의를 하고 보완 의견을 수렴하여 정비계획변경신청서를 영등포구청에 제출했습니다. 영등포구청과 재개발조합 쪽은 정비계획변경 내용에 대해 사전협의를 하면서 꿀잠과는 어떤 협의도 하지 않았고, 정비계획변경신청 내용에 수차례 제기해온 꿀잠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존치 의견이 있다는 언급조차 없었습니다. 재개발조합은 정비계획변경(안)에 대해 일용직노동자를 고용해 동의서를 받고 있습니다.

꿀잠은 공공재… “존치돼야 한다”

이에 꿀잠대책위는 2021년 11월16일 영등포구청 앞에서 ‘비정규노동자 눈물로 지은 집, 시민사회 연대의 땀방울로 지은 집 꿀잠을 지켜주세요’ 기자회견을 열고, 현재 시민사회 릴레이 1인시위를 영등포구청 앞에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모두 한마음으로 꿀잠을 지켜내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저도 꿀잠 지킴이가 되어 온기 가득한 봄 같았던 꿀잠을 지켜내겠습니다.

오은주 ‘고 문중원 한국마사회 경마기수’의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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