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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죽음은 최종적 형태의 가해였다

성추행 고소당하자 스스로 목숨 끊는 가해자들… 진실은 어떻게 밝혀질 수 있는가
등록 2021-06-12 02:45 수정 2021-06-12 10:36
2021년 5월31일 로펌 대표변호사에게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인 변호사를 법률 대리하는 이은의 변호사가 서울 서초구 사무실에서 녹취록을 공개하고 있다. 연합뉴스

2021년 5월31일 로펌 대표변호사에게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인 변호사를 법률 대리하는 이은의 변호사가 서울 서초구 사무실에서 녹취록을 공개하고 있다. 연합뉴스

2020년 12월, 서울의 한 중소 로펌에서 일했던 초임 변호사가 대표변호사를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 강제추행 등의 혐의로 고소했다. 2019년 변호사시험에 합격한 뒤 이 로펌에서 실무수습을 마치고 취업한 피해자는 2020년 3~4월 수차례 성폭행과 성추행을 당했다고 한다. 이 사건이 언론보도로 알려진 뒤인 2021년 5월26일 대표변호사는 사무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사건은 ‘공소권 없음’으로 불송치됐다. 피해자는 6월8일 법률대리인인 이은의 변호사를 통해 “저는 법률이 보장하는 절차에 따라 가해자를 형벌에 처하기 위해 고소했는데, 가해 사실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게 됐지만 저는 순식간에 사람을 죽인 꼴이 돼 이중의 피해를 보고 있다”고 호소했다.

‘공소권 없음’으로 묻히는 진실

일반적으로 수사받던 피의자가 숨지면 수사기관은 수사를 중단하고 수사 결과도 발표하지 않는다. 경찰수사규칙 제108조를 보면, 피의자가 사망한 경우 경찰은 수사를 마무리하고 ‘공소권 없음’으로 불송치 결정하게 돼 있다. 검찰도 조사받던 피의자가 숨지면 검찰사건사무규칙 제115조에 따라 불기소 결정한다. 수사하고 재판에 넘길 대상이 사라졌으니 더 수사할 필요가 없다는 논 리다.

그러나 최근 성폭력 피해자 사이에선 수사기관이 숨진 피의자를 재판에 넘길 순 없더라도 가능한 범위에서 수사를 더 진행하고 수사 결과도 발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피의자에 대한 기소나 처벌은 불가능하지만, 실체적 진실 규명과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막으려면 수사기관이 추가 수사하고 지금껏 수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수사 결과도 밝혀야 한다는 주장 이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폭력 의혹 사건이 대표적 사례다. 경찰은 2020년 7월 박 전 시장이 숨진 채 발견됐음에도 사안의 중대함 등을 고려해 전담팀(TF)을 꾸리고 성추행 의혹을 수사했다. 하지만 5개월 뒤인 같은 해 12월 경찰은 ‘공소권 없음’으로 수사를 마무리하며 수사 결과도 발표하지 않았다. 경찰이 이렇다 할 결론 없이 수사를 종결하자 일각에서는 박 전 시장의 무고함을 재차 주장하고 나섰다. “경찰 조사에 의해 고소인 측의 주장이 거짓이거나, 억지 고소·고발이었다는 점이 확인됐다”(오성규 전 서울시 비서실장 페이스북)는 식이다. 수사 결과를 발표하지 않았다고 해서 피해 사실이 없다는 뜻은 아님에도 ‘공소권 없음, 수사 종결’을 자의적으로 해석했다.

피해자는 어쩔 수 없이 법원으로, 인권위로

이은의 변호사는 “피의자가 사망해 사건이 공소권 없음으로 귀결된 것과 사건 수사가 중단되거나 결과가 함구돼 피해의 실체가 규명되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며 “피의자의 사망으로 피해자가 떠안을 2차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도, 피의자의 극단적 선택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도 (추가 수사와 수사 결과 발표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이윤호 동국대 교수(경찰행정학)는 “피의자가 사망하면 (수사 대상이 사라지므로) 더는 수사할 필요가 없다. 수사 결과라는 것도 완전히 수사가 끝나야 발표할 수 있다”며 “피해자 쪽에서는 자신을 2차 가해하는 이들에 대해 명예훼손이나 무고로 고소·고발해 조사를 계속하게 하는 방법을 강구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수사기관에 절망한 일부 피해자는 민사소송 등 다른 방법으로 사건 실체를 드러내려고도 한다. 피의자와 피해자가 같은 회사에서 근무했다면 회사를 상대로, 공무원으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보았다면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니다. 피해자인 원고의 입증책임 부담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피의자가 숨진 사건은 아니지만, 2018년 타이대사관에서 상급자로부터 성추행 등 성폭력 피해를 본 하급자가 가해자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낸 사건에서, 법원은 가해자의 행위가 불법행위라고 판단하면서도 국가 배상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다. 관련자들이 사전조처를 소홀히 해 상급자의 불법행위가 발생했다거나, 사후조처가 미흡해 피해자의 정신적 손해가 확대됐다고 볼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하물며 가해자가 숨진 사건은 원고의 입증 부담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서혜진 변호사(한국여성변호사회 인권이사)는 “행위자가 속했던 곳에까지 책임을 물으려면 상당히 높은 강도의 입증책임을 부담해야 하는데, 피해자 입장에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법원의 판단을 받아보기 어렵다면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 조사에서 피해 사실을 인정받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인권위법에 따르면 사람이나 단체로부터 인권침해나 차별행위를 당한 경우 인권위에 조사를 요구할 수 있다. 박원순 전 시장의 성추행 의혹을 직권조사한 인권위는 2021년 1월 “박 전 시장이 업무와 관련하여 피해자에게 행한 성적 언동은 인권위법에 따른 성희롱에 해당한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피해자·참고인 조사, 피해자 휴대전화 디지털 포렌식 등을 거쳐 박 전 시장이 밤늦게 부적절한 메시지와 사진을 보냈고 피해자의 손을 만지는 등 신체접촉을 했다는 점을 사실로 인정했다.

피해자의 충격과 고통, 사회가 치유해줘야

그렇지만 인권위에서 피해를 공인받았다고 해도 의문은 남는다.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 사실을 인정받기 위해 경찰로, 검찰로, 법원으로, 인권위로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현실은 과연 온당한가.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를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확인받고자 여러 번 자신의 피해를 복기하고, 설명하고, 이해시켜야 했다. 가해자가 모든 짐을 내려놓은 사이에 말이다.

서혜진 변호사는 수사 결과나 법원의 판단을 받아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에만 매몰돼선 안 된다고 했다. “성폭력 신고율이 10%를 안 넘는데 그렇다면 나머지 90%는 피해자가 아니냐. 이런 방식은 한계가 있다. 우리는 가해자의 죽음까지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피해자가 겪어야 할 트라우마나 충격, 고통을 사회가 어떻게 치유해줄 수 있을지, 피해자를 어떻게 보호해줄 수 있을지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


신민정 <한겨레> 기자 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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