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 민주화운동 41돌을 앞둔 2021년 5월6일, 광주에 있는 옛 전남도청에선 특별한 전시회가 열렸다. 1980년 5월27일 새벽 계엄군이 최후의 진압 작전을 끝낸 직후 도청 안의 처참한 상황을 기록한 사진들이 최초로 공개됐다. 당시 <아시아월스트리트저널> 기자이던 노먼 소프가 찍은 사진 중에는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의 불에 그을린 주검, 소설가 한강이 쓴 <소년이 온다>의 주인공인 고등학생 문재학과 친구 안종필이 총에 맞아 숨진 모습도 고스란히 담겼다.
2021년 5월19일 <한겨레21>은 광주에서 김상집(65) 광주전남6월항쟁 이사장을 만났다. 바로 전날, 김상집이 ‘최후의 시민군’ 윤상원의 삶을 재조명한 <윤상원 평전>(동녘 펴냄)이 출간된 참이었다. 김상집도 1970년대 중후반 광주에서 민중운동을 했고, 5월 항쟁 당시엔 윤상원 등과 함께 시민군으로 활동하며 <투사 회보>를 찍었다. 현재 윤상원기념사업회 이사이기도 하다.
김상집과의 인터뷰는 광주시 광산구 지산동에 있는 용진정 활터(국궁장)에서 이뤄졌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호남 유림이 의병을 일으켰던 터인 이곳에서 활을 쏘며 심신 수양을 한다고 했다. 김상집은 광주일고 재학 시절 ‘유신 반대’ 시위를 주도했다가 정학당했다. 그게 빌미가 돼 전남대 입학 시험에 합격하고도 입학을 거부당했다. 그 뒤 녹두서점을 운영하며 노동운동과 들불야학에 헌신했고, 광주항쟁 시민군으로 싸웠으며, 1985년에야 서른살 늦깎이로 전남대에 입학해 졸업했다. 그에게 ‘5월’은 어떤 의미일까.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이 강하지요. 그래서 저희들(시민군 생존자)은 망월동(국립5·18민주묘지)에 가기를 싫어해요. 가면 죄인이 되니까…. 하지만 또, 먼저 가신 영령들의 뜻이 ‘새로운 세상’을 여는 것이기 때문에 살아남은 자로서 의무감이랄까, 진정한 민주화를 위한 싸움을 멈출 수 없다는 의무감에서 5월을 맞게 되죠.”
1980년 5월21일 계엄군이 전남도청 앞에서 스피커의 애국가 방송을 신호로 시민에 집단 발포했다. 그날은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1979년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신군부의 본격적인 학살극은 광주 시민의 무장 저항을 촉발했다. ‘해방 광주 공동체’도 잠시, 5월27일 새벽 3시, 최후의 진압 작전에 나선 계엄군은 탱크를 앞세워 시내로 진입했고, 새벽 4시에는 헬기에서 내려온 공수부대가 도청에 들이닥쳤다. 윤상원은 최소 160여명의 시민군과 함께 마지막 순간까지 도청에 남아 싸우다 서른살 삶을 마감했다.
그 전날인 5월26일,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은 외신 기자회견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입니다.” 기자회견을 마친 윤상원은 시민군 앞에서 투쟁 의지를 다지는 연설을 하며 물었다. “끝까지 싸울 수 있습니까?” 시민군 모두 우렁한 목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다. 윤상원과 김상집은 곧바로 도청 1층 무기고로 가서 시민군들에게 무기를 지급했다. 여성과 고등학생들에게는 “살아남아 역사의 증인이 돼야 한다”며 귀가를 독촉했다. 이는 살아남은 자들의 빚이 됐고, 1987년 6월 항쟁으로 군부 독재 시대를 끝내는 밑거름이 됐다.
그로부터 41년이 지난 2021년 5월, 윤상원은 출판계에서도 새삼 재조명됐다. 김상집의 <윤상원 평전>이 나온 5월18일, 인문학자 황광우가 편저자로 정리한 <윤상원 일기>와 윤상원의 아버지가 쓴 <윤석동 일기>도 함께 나왔다. 윤상원은 초등학교 시절인 1960년부터 1979년까지 19년 동안이나 꾸준히 일기를 썼다. 앞서 2007년에도 <윤상원 평전>(박호재·임낙평 공저)이 출간된 적 있으나 지금은 절판됐다. 김상집은 왜 다시 윤상원에 주목했을까.
“지금도 윤상원이란 인물에 대해선 낭만적 시각이 강해요. 들불야학 활동이 중심이었던 ‘계몽주의자’ 이미지가 일반적이죠. 그게 아닙니다. 윤상원은 헌신적인 노동운동가였다, 당시 국민연합(재야 민주화운동 협의체)이 생각하던 ‘선거를 통한 순조로운 민주정부 수립’이 불가능하다고 본 사람이었다, 노동운동가로서 ‘노학(노동자-학생) 연대’를 통한 민중혁명을 꿈꾼 사람이었다, 이런 게 정확히 알려져야 하겠다는 게 책을 쓴 첫 번째 이유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이렇다. “5·18 항쟁이 가능했던 건 광주·전남 지역의 엄청난 운동 역량이 바탕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습니다. 농민운동·노동운동·청년학생운동·종교운동으로 대중과의 접촉을 넓히고, 엄혹한 긴급조치 시대에 광주 앰네스티 같은 합법조직을 통해 대중강연을 하고, 양서협동조합 회원 교사들이 각 학교에 독서회를 만들어서 중·고등학생들에게 사회와 역사를 제대로 보는 학습을 해오고 있었지요. 또 송백회라는 단체에선 전국의 모든 양심수에게 영치금과 책뿐 아니라 직접 짠 스웨터와 양말을 넣어주는 옥바라지 활동을 했고요. 그런 역량이 쌓여서 5월 항쟁 때 모두가 합심해서 전라 민중 무장봉기에 나서고 마지막 ‘결사항전’까지 갈 수 있었다는 사실이 정확하게 알려져야 하지 않겠는가, 이게 두 번째 동기가 됐지요.”
김상집과 윤상원의 짧고 굵은 만남의 시작은 1975년 가을. 윤상원은 군복무를 마치고 전남대 정치외교학과에 복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광주 지역 민중운동가 김상윤을 만났다. 김상집의 친형인 김상윤이 민청학련 사건(1974년 4월)으로 구속됐다가 출소한 지 열 달이 지났을 때다. 당시 윤상원은 “한 손에는 <타임>을, 다른 한 손엔 테니스 라켓을 들고 다니며” 외무고시 공부에 전념하던, 가난한 농부 아버지의 장남이었다. 그런 윤상원이 김상윤을 시작으로 윤한봉·이강·김정길·박형선·윤강옥·김남주 등 당대의 수많은 운동가를 만나면서 유신체제의 폭압에 눈뜨고 민중운동에 뛰어들었다. 윤상원이 복학하기 몇 달 전인 1975년 4월, 박정희 정권은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로 꾸민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지 채 하루도 안 돼 피고인 8명의 사형을 집행하는 ‘사법 살인’을 저질렀다. 윤상원이 복학하던 즈음의 살풍경이다.
김상집은 자기보다 6년 선배인 윤상원이 대학에 복학해서 전남도청에서 산화하기까지 5년의 청춘을 내내 함께했다. 운명의 5월27일, 그는 전남도청이 아니라 녹두서점에 있었다. 투쟁 속보를 전하는 <투사회보>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삶과 죽음이 엇갈렸다. <윤상원 평전>을 쓰기 위해 지난 기억을 하나하나 들춰내는 것도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테다. 그는 “좀 그랬지요. 책을 쓰면서 이빨이 막 들썩이고…”라며 말을 아꼈다.
처음 출판 제안을 받고 1년 3개월 만에 책이 나오기까지 취재와 집필 과정도 만만치 않았다. “다행히 그동안 구술 증언이랑 책도 많이 나왔잖아요. 50~60권의 책을 방바닥에 늘어놓고, 이쪽저쪽 다 맞춰봐야 하니까 하나하나 확인했지요. 제가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객관적인 상황을 알고 있잖아요. 팩트 체크를 하다 보니 그동안 잘못 알려진 내용이 많더라고요. 특히 개인의 기억에 의존한 구술은 세월이 오래됐기 때문에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서 반드시 다른 사람의 이야기와 맞춰보고 객관적으로 정리하고, 이러다 보니까 시간이 엄청 걸리더라고요.”
윤상원을 재조명하는 작업은 김상집이 책 서문에서 “시민군과 지도부인 민주투쟁위원회는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왜 자리를 지켰을까?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의연히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그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라고 화두처럼 던진 의문의 답변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특히 김상집은 1980년 5월26일 항쟁 지도부 다수가 결사항전을 결의하고 국민연합이 이끌던 ‘수습위원회’를 ‘민주투쟁위원회’로 전환한 과정을 자세히 밝혔다.
“재야 수습대책위원 중에 이성학 장로님이 큰 힘이 되셨지요. 그분이 1906년생(당시 74살)으로 최연장자셨고 제헌의회 의원을 하셨습니다. 이분께서 아주 열정적으로 ‘절대 항복해선 안 된다. 어떻게 평화시위를 하는 시민들을 향해 백주대로에서 집단 발포를 할 수가 있나. 이건 학살이다. 자네들이 나라를 구해야 한다’ 이렇게 당부하셨지요.”
김상집은 책에서 ‘전라 민중 무장봉기’란 표현을 썼다. 국가가 정한 공식 명칭인 ‘5·18 민주화운동’은 물론, 흔히 쓰이는 다른 별칭들과도 구별된다. 여기엔 공식적으로 ‘5·18 민주화운동’으로 명명된 1980년 5월 사건의 성격과 의미를 역사적으로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항쟁 당사자들의 고민이 담겨 있다.
“1980년 5월27일 저를 포함해 많은 사람이 체포돼 재판을 받고 광주교도소에 수감됐어요. 어느날 가족 면회를 나갔다가 마침 남민전 사건으로 수감중인 이학영(현 더불어민주당 의원) 선배를 만났는데, 얼굴은 외면한 채 자꾸 발을 건드는 겁니다. 겨울인데 맨발이었어요. 자세히 보니, 발가락 사이에 종이쪽지가 있어요. 몰래 받아와서 보니 시 2편을 썼는데, 그중 하나에 5·18 항쟁을 ‘전라 민중혁명 무장봉기’라고 썼더라고요. 수감자들 사이에 5·18의 성격을 두고 열띤 토론이 벌어졌죠. 광주가 중심이긴 했지만 광주에 국한되지 않은 저항이었다, 일부 명망가 중심이 아니라 각계각층 민중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무장투쟁으로 맞섰다는 사실에는 모두 동의했죠. 그렇지만 당시만 해도 처참하게 진압된 봉기를 ‘혁명’으로 규정하는 게 맞는지를 두고는 의견이 갈렸어요.” 김상집은 그 쪽지에 적힌 시를 공동번역 성서에 연필로 흐리게 필사한 뒤 밖으로 내보냈고, 그뒤로 외신에도 시가 소개됐다고 했다.
3년 전부터 김상집은 그림(서양화)을 배운다. 광주 항쟁 당시 중요 장면들을 사실대로 묘사한 기록화를 남겨야겠다는 결심에서다. 5·18을 그린 민중미술 작품의 주류가 시민들의 투쟁 장면이나 공동체 광주를 추상적이고 상징적으로 표현한 걸개그림과 판화에 치중된 것에 답답했다고 한다.
“그전까진 유화를 그려보긴커녕 물감 타는 법도 몰랐지요. 그런 제가 그림을 배우겠다고 나서니 주변에선 흘려들었어요. 기록화는 풍경화나 정물화보다 인물화가 중심인데, 화가도 소개받고 미술학원도 가보고 우여곡절을 거쳐 지금 오광섭 선생님 화실에서 배움과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30여 점을 그렸다는데, 최후 결사항전을 결의한 ‘민주투쟁위원회 회의’(5월26)와 ‘윤상원의 최후’(5월27일)가 대표작이다. 인물들의 몸짓과 표정이 사진처럼 생생하다.
일부에선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기시감과 피로증을 주장하기도 한다. 2021년 5월 현재, 나아가 미래의 ‘5월 광주’는 어떤 의미일까?
“‘사자 명예훼손’ 재판이 진행 중이지만 전두환은 한 번도 반성한 적이 없지요? 광주 항쟁을 기리는 기본 원칙이 있어요.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명예 회복, 정신 계승, 기념사업, 이런 순서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발포 명령자가 밝혀지지 않았어요. 용서와 화해라는 건 가해자의 진심 어린 반성이 선행돼야죠.”
김상집은 광주 항쟁을 이어간 1987년 6월 항쟁의 결실이 형식적 민주주의로 고착화한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87년 체제’가 30년 넘게 지속되고 있어요. 이제는 새롭고 미래지향적인 방향으로 헌법을 개정해야 합니다.” 헌법 전문에 ‘5·18 정신’과 ‘6월 항쟁’을 명기하고 그에 걸맞게 법령을 정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5·18 정신의 미래지향적 계승을 위한 ‘민주시민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 국가보훈처가 2천억원 넘는 예산을 들여 ‘나라사랑 교육’이란 걸 했어요. 5·18을 폄훼하고 반공 교육을 했죠. 촛불정부 들어 민주시민 교육을 해야 한다는 요구가 컸는데 여야 정쟁에 휘말려 예산도 쥐꼬리란 말이에요.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라는 민주주의의 절차적 과정만 가르치는 걸 민주시민 교육이라고 한정하는 우를 범하는 건 아닌지….”
김상집은 긴 인터뷰의 마지막을 1980년 5월26일 밤에서 27일 새벽까지 최후의 몇 시간을 되돌아보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당시 많은 사람이 항쟁 지도부에게 (전남도청에서) 나올 것을 간곡하게 권했어요. 뒷날을 도모하라고. 그들은 거부했지요. ‘민중이 봉기했는데 우리가 항복하거나 도망치면 결국 유신헌법과 군부 쿠데타를 인정하는 꼴이 된다.’ 이 사람들 하나하나가 위대한 철학자여서라거나 가장 용감한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라, 총을 들고 있는 그 작은 몸짓 하나로, 자기 몸을 내던지면서까지 전 국민과 후세인들에게 ‘민주주의’라는 희망을 외치고 싶었던 거예요. 그것이 ‘광주 정신’입니다. 저는 그걸 꼭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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