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을 무릅쓰고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의로운 행동을 한 시민들. 우리는 이들을 흔히 ‘의인’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의인들이 정부 차원의 예우와 보상을 받는 길은 ‘의사상자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의사상자법)이 규정한 의사자나 의상자(부상 정도에 따라 1~9급)로 인정받는 것이다. 의로운 행동을 하다 숨진 시민의 유족, 부상을 당한 당사자·가족이 관할 지방자치단체에 의사상자 지정을 신청하면, 시·도지사를 거쳐 보건복지부가 설치한 의사상자심사위원회에서 인정 여부를 결정한다.
의사상자가 되기 위해선 △자신의 직무가 아닌 행위로 △생명·신체상 위험을 무릅쓰고 △급박한 위해에 처한 다른 사람의 생명·신체, 재산을 구하기 위한 △직접적·적극적 행위를 하다 숨지거나 다쳤음을 ‘입증’해야 한다. 이러한 기준에 따라 2019년 복지부 의사상자심사위는 진료 도중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의사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최근 이 처분이 부당하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소송 쟁점은 ‘직접적·적극적 행위’ 여부
법원 판결문과 복지부 의사상자심사위 회의록, 시시티브이(CCTV) 화면을 종합한 사건 발생 당시 상황은 이렇다.
2018년 12월31일 서울 강북삼성병원을 찾은 환자 박아무개씨는 13호 진료실에서 임 교수와 대화를 나누다 진료실 문을 잠그고 흉기를 꺼낸다. 임 교수는 13번 진료실과 연결된 12번 진료실로 가 복도로 통하는 문을 여는 과정에서 마주친 ㄱ간호사에게 ‘도망가’라고 말하며 복도 오른쪽으로 뛰어간다. 범인은 12번 진료실 문을 나와 ㄱ간호사에게 달려들려다 의자에 부딪히면서 멈칫했고, 그사이 간호사는 복도 왼쪽으로 피신한다. 그와는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다 멈춰 선 임 교수는 돌아서서 ㄱ간호사와 범인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접수처에 있던 또 다른 간호사에게 손짓해 ‘신고해, 도망가!’라고 말한다. 간호사를 쫓던 범인은 방향을 바꿔 임 교수를 쫓아갔고, 끝내 비극이 발생한다.
2019년 3월 임 교수 유족은 서울시 종로구에 의사자 인정 신청을 했다. 마지막까지 책임을 다한 의인으로 명예롭게 기억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다고 한다. 앞서 유족은 “안전한 진료 환경과 마음이 아픈 사람이 차별 없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라던 고인 뜻을 지키는 데 써달라”며 조의금 1억원을 대한정신건강재단에 기부했다.
안건을 받아든 의사상자심사위는 2019년 4월, 6월 두 차례 회의 끝에 임 교수를 의사자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한겨레21>이 기동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확보한 회의록을 보면, 최대 쟁점은 간호사에게 도망치라고 소리친 행동이 ‘직접적·적극적 구조 행위’에 해당하느냐였다. 6월 회의에 참석한 위원 다수는 임 교수가 직접적·적극적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동안 범죄를 제지하려는 ‘물리적 행위’가 있을 때 의사자로 인정했으나 이 사례에선 물리적 행위가 없었다는 것이다. 한 위원은 “위험에 처한 교수님이 (문을 열고 나왔을 때) 마침 간호사가 있었고 도망가라고 얘기한 것은, 위험한 상황을 알린 정도에 불과하다고 보인다”며 “의사자에 해당하려면 (진료실을) 나와 간호사와 마주쳤을 때 손을 잡고 같이 뛰었다거나 하는 어느 정도의 행위가 포함돼 있다면 적극적인 행위로 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족·친구들 CCTV 100번 이상 보며 입증 노력
유족은 이 처분을 취소해달라며 소송을 냈고, 9월10일 서울행정법원 행정14부(재판장 이상훈)는 유족 손을 들어준다. 재판부는 고인이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행동을 했으며 이는 ‘직접적·적극적 행위’로 평가할 수 있다고 보았다. 특히 12번 진료실을 빠져나와 범행을 당하기까지 불과 ‘11초’가 걸렸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다른 방식의 구조를 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흉기를 든 범인은 운동화를 신고 있었으나, 고인은 별다른 방어 수단이 없었으며 실내용 슬리퍼를 신고 있어 스스로 공격에서 벗어나기조차 쉽지 않았던 점, 도망치다 멈춰 서서 약 3초 동안 접수처에 있는 간호사에게 신고·대피할 것을 말하지 않았다면 더 안전한 지역으로 대피할 수 있었던 점 등이 고려됐다.
법원의 법 규정 해석은 의사상자심사위에 견줘 유연했고, 유족 입장도 더 자세히 반영됐다. 복지부 공무원이 위원장과 부위원장을 맡은 의사상자심사위는 논의 내용이나 구체적인 불인정 사유를 신청자 쪽에 전달해주지 않는다. 유족 등 당사자 입장을 위원들이 직접 청취하는 과정도 없다. 반면 유족 소송대리인 김민후 변호사(법무법인 원)는 “사건 현장을 찾아 고인이 진료실 문을 열고 나와 3초간 멈춰 있다 대피한 경우와 멈추지 않고 쭉 대피한 상황을 비교하는 동영상을 촬영해 재판부에 제출했다”고 전했다. 또 그는 “형사사건 기록을 보면 범인이 임 교수만을 특정해 범행 대상으로 삼은 게 아니라 불특정 다수에 대한 범행을 결심했다는 점이 드러난다. 이를 근거로 다른 사람도 대피해야 할 상황이었음을 재판부에 설명했다”고 말했다.
의사상자 신청자 절반은 인정 못 받아
소송을 통해 의사상자 인정 여부를 다투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임세원 교수와 막역했던 백종우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임 교수가 의사자임을 입증하기 위해 사건 당시 시시티브이를 100번도 넘게 보는 것이 너무 괴로웠다. 이러한 짐을 왜 유족과 친구들이 짊어져야 하나란 생각도 들더라”며 “임 교수의 경우 그나마 시시티브이도 있었고 소송을 낼 여력이 있었지만 정말 힘없는 사람 가운데는 의로운 행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사례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의사상자 제도는 의인의 희생과 뜻을 기리는 동시에 유족이나 부상자의 생활 안정을 위한 사회보장적 성격이 강하다. 의사자로 지정되면 유족은 보상금이나 의료급여, 취업보호 등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 복지부가 기동민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2014년~2019년 9월 최근 5년간 의사상자 신청 224건 가운데 의사상자심사위가 의사상자로 인정한 사례는 109건(48.6%)이다. 같은 기간, 복지부 결정에 불복해 소송을 통해 의사상자로 인정받은 사례는 2건이었다.
의사상자 심사 과정이 사회적 신뢰와 권위를 지니려면 치밀한 사실관계 확인과 다양한 의견 청취가 필요하다. 그러나 심사가 제대로 진행되는지 의심스러운 사례도 있었다. 사실관계를 잘못 파악해 의사자로 인정하지 않은 경우다. 2016년 7월 한 50대 남성이 야유회를 가서 강에 빠진 일행을 구하기 위해 강에 뛰어들었다가 급류에 휩싸여 결국 숨진다. 그해 11월, 의사상자심사위는 고인이 술에 취해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과실로 숨졌다며 의사자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2017년 6월 서울행정법원은 사고 발생 당시 경찰서에 출석해 고인이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한 일행의 진술 등을 근거로 만취했다는 증거가 없고 되레 구명조끼를 입는 등 위험 상황임을 충분히 알고 사람을 구하러 강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복지부는 ‘고인은 일행이 강에 빠지지 않도록 위험 발생을 방지할 의무가 있지만 그 의무를 다하지 않아’ 의사자가 아니라고 항소했으나 서울고등법원에서 패소가 확정됐다. 이 사례에서 유족은 가족을 잃은 지 1년4개월 만에야 의사자 인정을 받았다.
프랑스는 당사자가 정책 결정에 참여
임 교수 사례를 계기로 의인에 대한 보훈체계를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나온다. 그동안 의사상자 지원은 ‘의로운 행위와 사망 및 부상과 인과관계를 밝힌 신청자에 한해’ 부상 정도에 따라 1~9등급을 매겨 보상금 등을 지급해왔다. 2018년 5월 이용민 민주연구원 연구위원은 ‘사회적 의인의 공훈에 대한 사회적 보훈체계 제안’ 보고서를 통해 복지부 의사상자 지원, 경찰청 표창 등 정부 차원에서 산발적으로 이뤄지는 사회적 의인(타인의 생명 보호나 신체적·물리적 피해 방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해 사회정의 확산에 기여한 개인이나 단체) 보상 업무를 국가보훈처로 통합하자고 제안했다. 현재 국가보훈처 관할인 국가유공자 등 ‘국가 보훈’은 군인·경찰·소방공무원 등 국가의 수호, 안전보장 등 특정 직무에 종사하는 경우로 한정한다.
이용민 연구위원은 보고서에서 “주요 선진국은 정부 또는 보훈기관 차원에서 민간인 의인을 포함한 보훈체계를 마련하고 적정 수준의 보상을 제공하는 경우가 많다”고 분석했다. 예를 들어 프랑스는 보훈 대상에 민간인 의인뿐 아니라 테러로 인한 사상자까지 포함한다. 국가와 민간이 함께 보훈체계를 관리하고, 보훈 보상을 받는 당사자가 직접 중대한 정책 결정에 참여하도록 했다.
우리 사회에선 ‘의인’이란 호명은 많지만 이들이 누구인지, 또 어떻게 예우해야 하는지 정책적 연구는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복지부, 경찰청, 의인상을 제정한 민간 재단이 정한 개념도 조금씩 다르다. 임세원 교수의 마지막은 어떻게 기억되는 것이 온당할까. 복지부는 임 교수를 의사자로 인정한 법원 판결에 대한 항소 여부를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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