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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건강 없이 국민건강 없다”

‘정신질환자 격리’는 장기적으로 실패한다… 다이니우스 푸라스 유엔 건강권 특별보고관이 한국에 전하는 말
등록 2019-05-11 12:34 수정 2020-05-03 04:29
김진수 기자

김진수 기자

“참사가 일어난 직후에는 문제의 근본 해결책에 접근하기 어렵다.” 다이니우스 푸라스 유엔 건강권 특별보고관(사진)은 과 한 단독 인터뷰에서 정신질환 병력이 있는 환자에 의해 강력범죄가 일어나면 이후에는 생산적인 논의가 이뤄질 수 없다고 단언했다.

“정신질환자 격리는 남성 격리와 비슷”

평소 제대로 치료받지 않은 중증질환자에게 5명이 안타까운 목숨을 잃은 ‘진주 참사’ 이후 두려움을 느낀 여론이 더욱 강력한 정신질환자 격리를 요구하는 현상에 그는 익숙한 듯 진단했다.

“한국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가 비슷하다. 정신질환자에 의한 강력범죄가 일어난 뒤 사법처리에 초점이 맞춰지고, 여론은 희생양을 찾는다. (정신질환자 범죄율이 낮다는) 과학적인 근거를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생산적인 논의를 할 수 없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리투아니아 빌뉴스대학의 아동정신의학센터장인 푸라스 보고관은 정신과 의사이면서 인권운동가로 정신장애인과 아동의 인권, 공중보건 개선을 위해 30년 동안 활동했다. 그가 맡은 유엔 특별보고관은 회원국과 유엔이 마주하는 여러 가지 문제와 과제에 대해 보고서를 쓰고 권고안을 마련하는 일을 한다.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임명하는데 현재 12개국, 44개 주제에 대해 특별보고관 80명이 활동한다. 푸라스는 2014년 건강권 분야 특별보고관으로 임명됐고, 내년 여름 6년 임기가 끝난다. 5월1일부터 3일까지 인천 영종도에서 유엔, 세계보건기구(WHO), 정신보건 전문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지역사회기반 정신보건서비스 모범사례에 관한 워크숍’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출국을 하루 앞둔 5월2일 오후 과 만난 그는 유엔과 세계보건기구가 권고하는 정신건강 증진 방안과 함께 자기 생각을 드러냈다.

“정신과 의사는 환자를 진료하지만 미래를 예측할 순 없다. 누가 위험한 일을 벌일지 미리 알 수 없는 것이다. 중증정신질환자에 의한 강력범죄 한 건을 예방하려면 4천 명의 중증정신질환자를 가둬야 한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다. 저위험군 정신질환자도 강력범죄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러면 추가로 2만 명을 가둬야 한다. 당장은 위험한 환자를 격리하는 게 답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론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정신질환자를 격리하자는 것은 마치 남성이 여성보다 폭력적이고 강력범죄를 많이 저지르기 때문에 남성을 격리하자고 하는 것과 같다. 심지어 정신질환자는 일반인보다 범죄율이 낮다.” 푸라스 보고관은 중증정신질환자 격리 강화는 바람직한 방향이 아니라고 거듭 강조했다.

병원에서 이뤄지는 격리치료에 대한 투자를 되도록 중단하고, 정신질환자들이 지역사회에서 일반인과 어울려 살아갈 수 있도록 기반을 다져야 한다며 ‘지역사회 투자’를 강조했다. 푸라스 보고관은 “‘약 먹고 조용히 해’라면서 밀폐된 방에 가두고 몇 주, 몇 달을 있으라고 하면 기자와 나는 얼마나 버틸 수 있겠나? 그들에게도 일자리와 친구, 취미가 필요하다. 젊은이들은 성적 욕구도 있는데 정신질환자라는 이유로 완전히 소외된다”며 투약과 격리 중심의 치료 방식에 회의를 보였다.

지역사회에서 치료하라

“열악한 치료 환경 때문에 정신질환자들의 증상이 더욱 나빠진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연구는 많다. 세계적으로 정신보건의 흐름은 병원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치료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의사들이 병원을 나서서 사회복지사 등과 팀을 이뤄 환자를 찾아간다. 카페나 집에서 만나 치료할 수도 있다. 정신보건센터는 정신질환자가 일자리를 찾고 집을 구하는 활동을 도와줄 수 있다.” 그는 의료상 치료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약자인 이들에 대한 사회·경제적 지원을 강조했다. “지역사회 투자를 늘리고 정신질환자 친화적인 치료 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당장 내일의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정책은 아니지만 더 근본적인 접근 방식으로, 유엔과 세계보건기구가 권고하는 길이다.”

그는 정신질환자 친화적인 치료 환경을 만들기 위해 환자와 의료진 사이의 신뢰 형성과 억압적인 병원 환경에 대한 모니터링이 필요하다고 했다.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환자와 의사 사이에 신뢰가 없으면 약효를 기대하기 어렵다. 신뢰를 바탕으로 하지 않은 치료는 오히려 환자 상태를 나쁘게 할 수 있다. 정신질환자 의료시설을 모니터링하는 것은 정신보건 서비스 질을 높이는 방법이 될 수 있다. 독립적인 전문가들이 폐쇄병동을 방문해서 치료 환경을 점검하고 조언하는 것이다.”

푸라스 보고관의 조국인 리투아니아는 자살률이 10만 명당 26.7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 가장 높다. 한국(25.8명)은 지난해까지 ‘OECD 1위 자살률 국가’라는 오명을 13년 동안 쓰고 있었지만 리투아니아가 OECD에 가입하면서 2위로 밀렸다. “20년 전엔 자살률이 10만 명당 50명에 이를 정도로 심각한 사회문제였다. 특히 시골 지역 중년 남성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많았다. 옛 소련 해체 뒤 동유럽 국가들이 큰 사회변동을 겪었는데, 특히 중년 남성들이 그 변화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는 또 자살률과 정신보건을 연결지었다. “지역사회 정신보건 체계를 정비하면 자살률을 낮출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약물이나 의료에만 의지하면 자살 예방이 쉽지 않을 것이다. 리투아니아에선 상담치료와 심리치료가 국민건강보험으로 지원되지 않아, 사실상 약물치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부족한 상담·심리 치료 지원은 OECD 회원국 중 자살률이 가장 높은 두 국가의 공통점이었다(제1260호 기획 ‘50만을 영원히 가둬둘 수는 없다’ 참조).

“차별과 낙인,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어”

마지막으로 ‘인권’을 경시하는 일부 여론에 대한 질문을 받은 푸라스 보고관은 “유엔과 국제사회가 모두 인권의 위기 상황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부디 일시적인 현상이기를 기도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사회·경제·복지 등 전 분야에서 성공한 나라들을 보면 높은 인권 수준에 기반을 두고 있다”며 “차별과 낙인으로는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인권 없이 건강한 정신은 있을 수 없고, 정신건강 없이는 국민건강도 없다”고 강조했다.

인천=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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