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이 내린 지난 11월2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에 눈이 쌓이고 있다. 연합뉴스
김창록 ‘일본군 위안부 문제 연구소’ 소장이 사퇴 의사를 밝혔다. 일부 연구소 직원도 이탈 조짐을 보이는 등 연구소 전체가 동요하고 있어 앞으로 활동에 어려움이 예상된다. 문재인 정부가 위안부 문제 해결의 청사진을 그릴 목적으로 설립한 연구소의 수장이 물러나고 연구소 활동이 위기를 맞으면서 위안부 문제가 또다시 표류할 것이란 우울한 전망마저 나온다.
정현백 전 여성가족부 장관, 김창록 일본군 위안부 문제 연구소장, 변혜정 한국여성인권진흥원장이 지난 8월10일 서울 중구 한국여성인권진흥원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연구소’ 개소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한겨레 김경호 선임기자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은 최근 “김창록 일본군 위안부 문제 연구소장이 11월26일 사퇴 의사를 밝히고 사직서를 제출했다”고 에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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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소장은 여성가족부가 연구소 설립을 위해 경북대 산학협력단에 의뢰한 용역 연구의 책임자였다가 연구소장으로 임명됐다. 연구소 설립은 문재인 정부가 지난해 발표한 100대 국정 과제 중 ‘실질적 성평등 사회 실현’ 항목에 포함됐다. 연구소는 지난 8월10일 공식 출범했다.
연구소 출범 당시 정현백 여가부 장관은 “미래 세대가 역사를 올바로 이해하고, 과거의 잘못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역사적 교훈을 얻으려면 객관적인 연구 결과를 총괄하고 후속 연구를 진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연구소가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군 위안부 관련 사료들을 집대성하고, 세계인이 자료에 접근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하겠다”고 연구소 설립 취지를 밝혔다.
구체적인 사업 계획으로는 국내외 중요 기록물의 체계적인 발굴과 주요 기록의 데이터베이스(DB)화, 보존 가치가 있는 위안부 기록물 ‘국가기록물’ 지정 추진, 위안부 관련 기록물 보존 방안 강구, 역사 자료 위안부 피해자 e-역사관 탑재, 역사교육 추진 기반 마련, (위안부 피해자) 구술 기록집 외국어로 번역·발간 등 총 여섯 개를 꼽았다.
여가부는 계획 실행을 위해 기존 위안부피해자법에 따라 기념사업 등에 쓰이는 예산 등 9억3천만원을 모아 연구소 기금으로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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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설립된 연구소는 내년 3월까지 9억원 넘는 예산을 집행해야 하지만 개소 4개월이 되도록 제대로 된 사업 실행에 들어가지 못한 것으로 취재 결과 확인됐다.
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위안부 문제 관련 웹매거진 발행을 위한 계약을 조달청에 요청했다. 위안부 피해자 공문서 외국어 번역도 조금 진행됐지만 본 업무에는 아직 들어가지 못한 상황이고, 전체적으로 많이 늦어졌다”고 했다. 이뿐 아니라 여가부가 출범 당시에 제시한 여섯 사업 중 하나도 제대로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이 관계자는 연구소 업무 진행이 늦어진 이유로 변혜정 한국여성인권진흥원장을 꼽았다. “위안부 연구 관련해서 기존에 여가부가 발표한 내용을 실행하려고 해도 진흥원장이 사업 추진 이유를 반문했다. 거의 국정감사 질의응답을 준비하는 수준이었다. 공문서 번역과 웹매거진을 왜 하는지 설득하는 데만 한 달이 꼬박 걸렸다.” 연구소가 추진하려는 사업에 진흥원장이 간섭하면서 사업의 진행이 늦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에 대해 변 원장은 “진흥원의 수장으로서 보고받아야 할 내용을 챙겼을 뿐 사업 추진을 지연시키려는 의도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변 원장은 과 한 통화에서 “연구소는 진흥원이 공모해서 받은 용역 사업이기 때문에 진흥원장이 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히려 보고 자료를 요구하면 연구소에서 보고 기간이 지체되면서 업무가 지연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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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소장과 변 원장은 팀장급 직원 인사를 놓고도 갈등을 겪었다. 변 원장은 기존 진흥원 직원 중 일본에서 위안부 연구를 했던 정아무개씨를 연구소 팀장으로 보냈지만 김 소장은 정 팀장을 업무에서 배제했다. 정 팀장은 “(연구소가) 위탁 사업이어서 진흥원이 책임질 수밖에 없고, 나중에 결재를 위해서는 본부장이나 원장이 알아야 했다. 그런데도 연구소에서 논의되는 내용을 변 원장에게 보고하면 김 소장은 ‘왜 외부에 이야기하냐’며 몰아세웠다”고 했다.
의 취재 내용을 종합해보면 김 소장이 사퇴한 주요 원인은 연구소가 독립적으로 업무를 추진할 수 없는 구조에서 느낀 좌절감 때문으로 보인다.
위안부 문제 연구를 해온 이나영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김 소장이 처음에 연구소장 자리를 고사하려 했는데 주변에서 가셔야 한다고 설득했고 삼고초려를 해서 모셨다. 당시 여가부 (정현백) 장관이 자율성을 보장하고 절대적으로 밀어주겠다고 했기 때문에 마음을 바꾼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형식적으로는 여가부 산하기관의 부서로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독립을 보장하겠다’던 정 전 장관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는 얘기다.
김 소장은 여가부 용역 보고서에서 연구소 설립을 위한 법 제정을 토대로 ‘독립성’과 ‘지속성’을 강조했다. 그만큼 김 소장은 독립된 위안부 문제 연구기관에 대한 열망이 컸다. 그러나 한국에서 독립적이고 큰 규모의 위안부 연구소를 바로 세우기에는 토대가 미약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1991년 8월 고 김학순 할머니가 위안부 피해 사실을 처음 공개한 뒤로 한국 사회 내부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큰 화제로 떠올랐지만, 학문적인 연구는 체계적으로 진행되지 못했다. 정부는 위안부 문제 연구를 지원한 적 없었고, 연구를 수행할 연구자는 부족했다.
이런 현실적 제약을 고려해 김 소장은 한국여성인권진흥원 내부의 팀이긴 하지만 향후 독립적인 연구소 설립의 마중물을 마련한다는 계획으로 비상근 소장직을 맡았다. 하지만 업무를 시작하고 김 소장은 한 달이 되지 않아 한계를 느낀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아무런 결정권을 갖지 못하고, 진흥원 본부장과 원장의 결재를 받지 않고서는 독자적으로 사업을 진행할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 주변 지인들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김 소장은 고민을 털어놓기 위해 11월16일 진선미 여가부 장관을 만났지만 만족스러운 대답을 듣지 못했고, 결국 물러나기로 했다. 은 좀더 구체적인 내용을 듣기 위해 김 소장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그는 응하지 않았다.
변 원장은 “연구소는 젠더 관점에서 보는 위안부 문제 논의에 의욕을 갖고 진흥원이 뛰어든 용역 프로젝트다. 이름은 연구소지만 독립된 연구소는 아닌 것이다. 김창록 소장은 간섭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일하길 원했지만 우리는 그렇게 일할 수는 없었다. 중요한 위안부 연구소와 관련된 일이 이렇게 된 부분에 대해선 안타깝고 스스로 반성도 하고 있다”고 했다.
지난 8월14일 오후 충남 천안 국립망향의 동산 안 모란묘역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첫 기념식에서 김경애 할머니가 문재인 대통령의 볼을 만지고 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문재인 정부는 고 김학순 할머니가 위안부 피해 사실을 공개한 날인 8월14일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로 지정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 8월14일 충남 천안 국립 망향의 동산에서 열린 기림의 날 기념식에서 “기록의 발굴부터 보존과 확산, 연구 지원, 교육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이고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겠다”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 연구소의 역할을 강조했다.
대통령이 역할을 강조한 연구소의 수장이 사퇴하고 연구소 사업이 파행을 겪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문재인 정부는 적잖은 부담을 느낄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은 후보자 시절부터 박근혜 정부가 일본과 체결한 ‘한-일 위안부 합의’를 비판했다. 동시에 위안부 문제 해결에 강한 의지를 보였지만, 지금은 걸음이 꼬이는 모양새다.
대통령 당선 이후 출범한 ‘한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 검토 태스크포스(TF)’는 2015년 12월28일 한국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를 점검했다. 태스크포스는 위안부 합의 2주년을 앞둔 2017년 12월27일 보고서를 내고, 12·28 합의에 대해 전시 여성인권에 대해 국제사회 규범으로 자리잡은 피해자 중심적 접근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 위안부 문제를 한-일 관계와 연계해 풀려다 한-일 관계를 악화시켰다, 민주적 절차와 과정이 더욱 중시돼야 한다, 대통령과 협상 책임자, 외교부 사이의 소통이 부족했다고 결론 내렸다.
정부는 이러한 검토 결과를 발표하고도 아직까지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선 전 정부와 크게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선 “너무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위안부 연구를 오랫동안 해온 한 교수는 “김창록 소장의 연구소장 사퇴는 현재 한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끊임없이 관리하고 해결할 의지가 있는지 묻고 싶다”고 했다.
11월21일 여가부 진선미 장관은 위안부 합의에 근거해 설립된 ‘화해·치유재단’의 해산을 공식적으로 발표했으나 문 대통령이 미국 뉴욕에서 일본 아베 신조 총리를 만나 해산 의사를 밝혔던 시점(9월25일)보다 많이 늦어졌다는 지적이 많았다.
내년 3월까지 사업을 해야 할 연구소는 소장의 사퇴 이후 직원들이 크게 동요하면서 지속가능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앞서 나온 연구소 관계자는 “진흥원 소속 부서이긴 하지만 위안부 문제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연구소 직원으로 뽑힌 사람들은 외부에서 하던 일을 급하게 마무리하고 들어왔는데 많이 아쉽다”고 했다. 그는 또 “내년도 예산 확보를 위해서 무리하게 예산을 쓰게 한다. 기본적으로 국민의 세금으로 마련한 예산은 허투로 쓰면 안 된다. 제대로 사업이 되지 않을 것 같으면 연구소를 해산하고 반환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진흥원은 내년도 연구소 예산으로 12억원을 책정해 보고했지만 연구소 내에서 이미 소장을 따라 사직서 제출을 결심한 직원도 있다.
변혜정 원장은 연구소 운영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후임 연구소장을 새로 뽑을지는 현 단계에서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위안부 연구와 관련해 학계와 다양한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들어서 내년 3월까지 진행되는 사업을 잘 마무리하겠다”고 했다.
주무 부처인 여가부는 김 소장의 사퇴 이후 사태 수습에 고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가부 관계자는 “김 소장의 사퇴와 관련해 상황을 파악 중이다. 위안부 문제 논의 방향 등은 현 단계에서 말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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