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 농단’ 사건을 수사 중인 검찰이 뜻밖의 복병을 만났다. 핵심 인물인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10월27일 구속돼 10여 일이 지난 지금까지 좀처럼 입을 열지 않고 있다. 피의자가 아무리 강심장이라 해도 일단 구속되면 심리적으로 위축되기 마련이다. 검찰 소환 때까지 완강하게 버티다가도 구속영장이 발부되면 검찰 조사에 순순히 협조하는 이가 많은 이유다. 하지만 임 전 차장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비롯한 ‘윗선’의 지시 여부에 일언반구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구속을 발판 삼아 윗선의 개입을 파헤치려던 검찰의 전략에 제동이 걸린 셈이다.
임 전 차장이 왜 진술을 안 하는지 속내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영장실질심사 때의 변론 내용으로 미뤄보면 그는 자신의 행위가 형사처벌될 만한 죄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검찰이 그에게 적용한 혐의는 직권남용(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이다. 이 죄는 오래전부터 논란이 됐다.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권리행사를 방해”할 경우 처벌하도록 돼 있지만, 직권의 범위가 명확하지 않아 법원 판결이 오락가락했다.
임종헌이 묵비권 행사하는 이유최근에도 엇갈린 판결이 있었다. 대기업들에 미르·케이(K)스포츠 재단 출연을 강요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직권남용 혐의는 1, 2심 모두 유죄가 선고됐다. 그러나 이명박 전 대통령의 1심 재판부는 이 전 대통령의 다스 소송 관여가 대통령 직권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무죄로 판단했다.
임 전 차장의 묵비권 행사는 앞으로 벌어질 재판에서 검찰의 공소 유지가 결코 만만치 않음을 예고한다. 직권남용죄의 한계로 사법 농단 관련자들이 형사처벌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사법 농단의 실체 규명을 추진한 김명수 대법원장이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사법부의 대국민 신뢰 회복이 요원해진다는 사실이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학계를 중심으로 ‘법왜곡죄’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판사의 법왜곡 행위를 형사처벌하는 이 법은 직권남용죄의 한계를 극복할 대안으로 평가된다. 이 법을 시행하는 대표적인 나라는 독일이다. 이미 1871년에 이 법을 만들었다. 독일 형법 제339조는 “법관, 기타 공직자 또는 중재인이 법률 사건을 지휘하거나 재판함에 있어 당사자 일방이 유리하거나 불리하게 법을 왜곡한 경우에는 1년 이상 5년 이하의 자유형에 처한다”고 규정한다.
학계뿐만이 아니다. 국회도 움직이고 있다. 지난 9월28일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형법 개정안에 이런 조항을 신설하는 내용이 담겼다. 형법의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제123조) 바로 뒤에 이 조항을 추가하자는 것이다. 법왜곡죄는 앞으로 공청회 등을 거치면서 뜨거운 이슈가 될 것으로 보인다.
때마침 11월7일 열린 독일 콘라트아데나워재단과 고려대 정당법연구센터가 공동 주최한 사법권 독립에 관한 토론회는 독일의 전·현직 법관들에게서 법왜곡죄의 실상을 들을 수 있는 기회였다. 은 토론회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미하엘 훈트 전 독일연방행정대법원 부원장과 필리프 비트만 독일연방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판사), 리자 야니 베를린 형사지방법원 판사를 토론회 전날인 6일 인터뷰했다.
법왜곡죄, 처벌보다 예방 효과가 더 커독일은 어떤 계기로 법왜곡죄를 도입하게 됐나.리자 야니 판사 오래전부터 시행된 법이라서 직접적 계기가 뭔지는 잘 모르겠다. 이 법이 처음 이슈가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나치에 부역한 판사들을 처벌하는 문제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을 때였다. 결과적으로 나치에 부역한 판사들을 이 죄로 처벌한 사례는 거의 없었다. (김선택 고려대 교수에 따르면 나치 부역 판사 가운데 법왜곡죄로 처벌된 판사는 2명에 불과했다. 앞서 히틀러는 권력을 장악한 뒤 ‘민족법원’을 만들어 정적을 포함한 5천여 명에게 사형을 선고한 뒤 처형했다.) 그 이유는, 첫째 당시 판결이 합의부의 평의로 결정됐는데, 개별 판사가 어떤 의견을 냈는지 공개하지 않음으로써 어느 판사가 법을 왜곡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둘째, 부역 판사들이 ‘나치 정권에서 만든 법에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합법적 판결이었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주장이 동료 판사들에게 받아들여져서 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 독일 통일 뒤에도 동독 국경수비대의 만행에 면죄부를 준 동독 법관들의 처벌이 큰 이슈가 됐는데, 법왜곡죄로 처벌된 판사는 많지 않았다.
단순 오판이나 실수는 법왜곡죄 적용 안 돼법왜곡죄가 남용될 우려는 없나. 남용될 경우 법관의 독립을 크게 해칠 것 같은데.야니 판사 이 법은 법관의 단순한 실수나 오판 등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판사가 재판 과정에서 자신의 행위가 불법임을 알면서도 재판 당사자에게 유리 또는 불리하게 법을 적용할 의도가 있었음이 입증돼야 한다. 물론 판결에 불만을 품은 당사자가 이 법을 악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검찰 단계에서 이런 남용은 걸러진다. 법 구성 요건에 해당하지 않으면 검찰이 결코 나서지 않는다. 나도 형사재판을 많이 진행해서 법왜곡죄로 여러 번 고소를 당했지만 검찰 조사를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미하엘 훈트 전 부원장 독일에서 법왜곡죄로 처벌된 사례는 드물다. 2014년 독일연방법원이 도로교통법 위반 사건을 재판하면서 절차를 위반한 한 지방법원 판사를 이 죄로 처벌한 것이 최근 사례다. 이 사례에서 보듯 법왜곡죄는 판사의 판결 내용은 문제 삼지 않는다. 법왜곡죄로 처벌되는 사례가 극히 드물지만 그럼에도 이 법이 필요한 이유는 예방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법이 있기에 판사들이 정확하게 판결하도록 노력한다. 물론 선행 조건이 있다. 법치주의가 확립돼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법왜곡죄가 판사를 억압하는 도구로 악용될 수 있다. 불순한 의도로 법을 악용할 수 없게 검찰이 정치적으로 완벽하게 독립돼 있어야 한다.
필리프 비트만 판사 법왜곡죄 때문에 판사가 위축되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한다. 반면 법왜곡죄를 무시하고 자기 맘대로 재판하는 것도 문제다. 양쪽의 균형점을 찾는 일이 중요하다.
독일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는 어떤가.야니 판사 각급 법원에 대한 평가가 다를 수는 있지만, 독일 국민은 대체적으로 법원 판결을 신뢰하는 편이다. 물론 비판도 있다. 특히 언론이 비판적이다. 나는 언론의 비판이 공정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아무튼 독일 사법부를 비판하는 시각도 있음을 말하고 싶다.
비트만 판사 내가 일하는 연방헌법재판소에 대한 독일 국민의 신뢰도는 아주 높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공정하고 정확한 판결을 내리는 데 힘쓴 결과라고 생각한다.
독일인들 대체로 사법부를 신뢰하는 편한국 사법부는 지금 ‘사법 농단’ 사태로 큰 위기를 맞고 있다.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한국 사법부에 조언해준다면.비트만 판사 현직 판사로서 구체적인 사건을 언급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사건 내용을 정확히 알고 있지도 않다. 독일은 그런 사건을 겪은 적이 없어 해줄 말이 없다.
훈트 전 부원장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언급하는 것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독일에선 그런 일(사법 농단)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훈트 전 부원장 등은 이튿날 열린 토론회에서도 사법 농단 관련 질문에 원론적 수준의 답변만 했다. 이들은 특별재판부 도입 논란에 대해서는 “독일 헌법에 따르면 법에 규정되지 않는 별도의 재판부를 만드는 것은 위헌”이라며 부정적 견해를 나타냈다. 토론회 패널로 참석한 허진민 변호사(법무법인 이공)는 “나치 시대의 민족법원을 일종의 특별재판부로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사법 농단 재판을 위한 특별재판부는 나치의 민족법원과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고 말했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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