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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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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오른 길이 곧 새 길이다

‘코리안웨이 프로젝트’ 원정대 이끌다 산에 묻힌 김창호 대장…

새 루트 개척에 앞장
등록 2018-10-20 17:48 수정 2020-05-03 04:29
10월17일 ‘코리안웨이 구르자히말 원정대’ 산악인 합동 분향소에서 조문객들이 헌화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재훈 대원, 임일진 촬영감독, 김창호 대장, 유영직 대원, 정준모 한국산악회 이사. 연합뉴스

10월17일 ‘코리안웨이 구르자히말 원정대’ 산악인 합동 분향소에서 조문객들이 헌화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재훈 대원, 임일진 촬영감독, 김창호 대장, 유영직 대원, 정준모 한국산악회 이사. 연합뉴스

알피니즘이란 무엇인가? 사전적으로는, 알프스처럼 빙하가 흐르고 만년설도 있는 높은 산을 오르는 행위를 가리킨다. 하지만 알프스 주요 봉우리에 수많은 루트가 생기면서 사람들은 자연히 더 높은 데 히말라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8천m 열네 고봉 중 열셋이 1950년(안나푸르나)부터 1960년(다울라기리)까지 10년 동안 초등(최초 등반)되는 사태가 일어났다(1964년 초등된 시샤팡마는 중국이 외국인에게 등반 허가를 내주지 않은 상황에서 자국 팀이 오른 까닭에 초등 경쟁이 극에 이르렀던 히말라야의 황금시대 흐름에서 벗어난 것으로 간주한다).

알피니즘을 확장한 산사나이들

1944년생 라인홀트 메스너는 이런 등산사가 참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그가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칠 20살 때 그해에 에베레스트·낭가파르바트·K2·초오유·칸첸중가의 다섯 봉우리가 초등됐고, 21살 되는 1965년에는 마칼루·마나슬루·로체·가셔브룸2의 초등이 예약돼 있었으니까. 열넷 중 열이 그가 출발선에 서기도 전에 남들의 영광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규칙을 제시하고 실천함으로써 알피니즘을 확장해갔다. 낭가파르바트를 남쪽 루팔벽으로 올라 북쪽 디아미르 사면으로 넘어가는 횡단 등반과 디아미르 사면 단독 등반, 가셔브룸1에서 페터 하벨러와 짝을 이뤄 보여준 8천m 알파인 스타일,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반 등이 대표적인 예다. 무엇보다 세인의 관심을 끌었던 건 그가 8천m 열네 봉을 모조리 다 오른 최초의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1969년생 김창호는 메스너보다 마음이 훨씬 더 불편했을 것이다. 알피니즘 역사는 등반 대상지와 방식의 확장 과정이었는데, 그가 20살일 무렵 세상에는 8천m는 물론 7천m나 6천m도 미등(아직 오르지 않은)된 산이 거의 없었고, 방법론 또한 앞서 살았던 산악인들이 거의 다 구사해버려 옴치고 뛸 여지가 도통 없었다.

암벽과 빙벽 모두 기량이 뛰어났던 김창호가 처음 간 해외 원정은 1993년 파키스탄 발토로 지역의 그레이트트랑고(6283m)였다. 그리고 3년 뒤 어렵기로 유명한 ‘빛나는 봉우리’ 가셔브룸4(7925m) 동벽에 새 루트를 냈다. 그를 키워낸 서울시립대 산악회와 함께였다.

이로써 국내 산악계에서 상당히 유명한 인물이 되었지만 그의 시야는 여느 산악인들과 달랐다. 언론의 조명을 받는 유명한 산의 등반이 아니라 아직 초등이 안 된 산, 알피니즘을 실천할 수 있는 산을 찾았다.

2000년부터 2008년 사이 여덟 차례나 파키스탄, 트랜스히말라야(카라코람산맥)를 찾았다. 그리하여 바투라, 히스파, 비아포, 발토로, 시아첸 등 인더스강 북쪽의 수많은 빙하를 탐사했다. 이때 그의 모습은 카라코람산맥 탐사에 크게 공헌한 19세기 영국 왕립지리학회의 마틴 콘웨이 탐험대와 다를 바 없었다.

원정 등반 분야의 FA 선수

그러는 사이사이 등반도 하고 성과도 냈는데, 2001년 ‘멀티피크 원정’이 그 첫걸음이다. 지금 방송 프로그램 제작업체인 유라시아트렉을 운영하는 서기석과 최석문, 이명희, 임성묵 등과 함께 카체브랑사(5560m)를 초등하고 혼보로(5620m)와 시카리(5928m)에 신루트를 냈던 게릴라 원정이었다. 그의 정보력과 서기석의 조직력이 합작한 결과였다.

2004년에는 한국도로공사 로체 남벽 원정대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웬만해서는 다른 팀 사람을 끼워주지 않는 국내 원정 풍토에서 그는 자유계약(FA) 선수, 꼭 데리고 가야 할 만큼 중요한 인물이었다. 8천m 위아래에서 피켈(T자 모양 얼음도끼)을 휘두르고 배낭에 든 자일을 풀어가며 선등(앞서서 등반함)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으니까.

도로공사 팀과는 이듬해에도 같이 자일을 묶었다. 낭가파르바트(8125m) 루팔벽이었는데 여기서 이현조와 함께 메스너의 길을 따라 횡단 등반하는 데 성공했다. 무려 35년 만의 재등, 그는 여기서 저 외로운 선구자의 냄새를 실컷 맡았다. 메스너가 그랬던 것처럼 올랐던 길을 포기하고 그 또한 반대편으로 하산해야 했고, 메스너가 동생을 잃었던 것처럼 훗날 이현조를 히말라야에서 잃었다.

하지만 열네 고봉 완등자 같은 화려한 등반만 좇는 한국 풍토에서 언제까지나 ‘외로운 늑대’로 살아갈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2006년 드디어 초심을 꺾고 엄홍길이나 박영석의 길을 따라갔으니 바로 가셔브룸1·2봉 연속 단독 등정이었다. 국내 등반 사상 초유의 일로 동아대산악회 원정대에 얹혀서 등반 허가를 받았기에 가능했다.

자신에게는 변절이었던 8천m 레이스는 이후 순풍에 돛 단 듯 잘나갔다. 2006년 K2, 2007년 브로드피크, 2008년 마칼루와 로체, 2009년 마나슬루와 다울라기리, 2010년 칸첸중가와 두 번째 낭가파르바트, 2010년 시샤팡마, 2011년 안나푸르나와 두 번째 가셔브룸1·2, 초오유, 그리고 2013년 에베레스트였다. 부산 산악계가 추진하는 ‘다이나믹 부산 희망원정대’에 편승했기에 가능했다.

늦둥이 딸 하나 남겨놓고…

외도가 끝나자 김창호는 이내 알피니스트로 돌아왔다. 2016년부터 ‘코리안웨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이다. 첫 사업으로 강가푸르나(7455m) 남벽에 신루트를 냈고 이로써 유럽 산악계 최고의 명예인 황금피켈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다. 나아가 2017년에는 인도 히말라야의 다람수라(6446m), 팝수라(6451m)에 신루트를 낸바 이번에 참변을 당한 구르자히말 원정은 그 연장선에 있었다.

이렇게 산에만 미쳐 돌아다니다 그는 마흔 넘은 나이에 산악회 후배와 결혼했다. 그리고 2세 탄생 가능성이 얼마나 궁금했으면 10년이나 선배인 나에게 쑥스러운 질문을 하기도 했다. 나도 그처럼 늦장가를 갔기 때문이다. “마흔 이후에도 아기를 가질 수 있을까요?”

결국 그는 ‘단아’라는 딸 하나를 두었다. 그리고 원정 갈 때마다 텐트에서 대원들 몰래 그 딸의 동영상을 열어보았다. 그 딸을 두고 그는 갔다.

박기성 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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