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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는 왜 가해자가 되었나

팔레스타인 소설가 아다니아 시블리의 질문

“일본의 사과를 기다리는 한국은 학살을 기억할 준비가 되었는가”
등록 2018-03-17 01:08 수정 2020-05-03 04:28
팔레스타인에 대한 외부 세계의 도식적 인식에 균열을 내는 섬세한 작품 등으로 팔레스타인의 젊은 소설가에게 주는 최고의 상 ‘알 카탄’을 두 차례 수상한 아다니아 시블리 작가가 한베평화재단과 이 함께하는 캠페인 ‘내가 만난 베트남’에 글을 보내왔습니다. _편집자
팔레스타인 소설가 아다니아 시블리. 한베평화재단 제공

팔레스타인 소설가 아다니아 시블리. 한베평화재단 제공

1950년 신천 학살 사건(한국전쟁 발생 직후인 1950년 10월 황해도 신천군에서 미군 등이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을 묘사한 파블로 피카소의 1951년 작 을 보면, 특별한 ‘응시’가 눈에 띈다.

피카소 그림 속 특별한 ‘응시’
1950년 신천 학살 사건을 묘사한 파블로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 한겨레

1950년 신천 학살 사건을 묘사한 파블로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 한겨레

우선, 여러 시선 중에서도 직접 총을 겨눈 채 피해자들을 보는 군인들의 시선이 있다. 그림 왼쪽, 군인들 앞에는 서로를 바라보거나 아래를 보거나 정면을 보는 사람, 혹은 아예 눈을 감은 희생자들이 있다. 그림 한복판에는 총을 쏠 준비가 된 군인들 앞에 공포에 질려 군인들을 바라보는 한 아이가 있다. 팔에 아이를 안은 여자들의 가슴에, 눈을 감아버린 여성의 머리에 총이 겨눠진 뒤 아마도 일고여덟 살로 보이는 이 아이는 첫 번째 학살의 행렬에서 용케 살아남을 수도 있다. 사격수들이 다시 총구를 더 낮춰 두 번째 학살을 진행하지 않는다면, 이 아이는 가까운 땅바닥에 쪼그려 앉아서 돌멩이를 갖고 노는 저보다 더 어린 아이와 함께 살아남을지 모른다.

학살 생존자로서 아이들은 자신이 학살 과정에서 본 것과 전쟁에 대한 다른 일반적인 기억을 미래까지 가져갈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어떤 미래가 되고, 그들의 기억이 미래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하는 점이다.

저 두 아이가 청년으로 자랐을 즈음에 일어난 새로운 전쟁(베트남전쟁)에서 한국은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박정희 군사정권(1963~79년) 지배 아래 있던 한국 정부는, 1965년 10월 베트남에 처음 전투병을 보냈다. 전투병들은 베트남인과 싸우는 미군에 합류했다. 이후 한국 정부는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던 1975년까지 총 31만2853명을 파병했다.

한국인들은 일본 식민통치를 포함해 20세기 초반에 자행된 여러 폭력을 견뎌야 했다. 그랬던 한국인들이 같은 세기 후반부에는 (베트남 등지에서) 다른 이들에게 적잖은 폭력을 가하게 된다. 한국인들은 이런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문제의 답을 찾기 위한 단서 하나는, 한국 시민 일부가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에 의문을 제기한 뒤 박정희 대통령이 남긴 연설에서 찾을 수 있다.

“15년 전 자유세계 우방의 지원이 없었다면 오늘의 우리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우리 군대는 단지 우리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만 베트남에 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자유세계에 진 역사적인 부채를 도덕적으로 갚고 있다는 사실입니다.”(1966년 1월 국회 신년연설)

한반도는 박정희가 언급한 ‘15년 전’ 전쟁(한국전쟁)에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 1950년대 유엔 한국재건단 대표 도널드 킹즐리는 한국을 ‘현대 전쟁 사상 가장 황폐한 땅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다. 전쟁으로 한반도는 남북 가릴 것 없이 아주 큰 피해를 입었다.

폭력으로 박탈된 ‘선’의 감각

미국 정부는 1961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에게 정치적 지지 약속과 별도로, 차관을 제공하거나 남베트남·동남아시아로의 수출 증대를 돕는 기술 지원과 여러 개발 프로젝트를 약속했다. 미국의 재정적·기술적 지원에 대한 약속은 한국전쟁 이후 한국 정부가 국가를 재건하고 발전시키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해 보였다. 한국 정부는 파병을 결정했고, (이에 호응해) 한국의 청년들은 돈을 벌기 위해 베트남행을 자원했다. 당시 한국은 아주 가난했기에 그들이 받은 수당은 그들을 다른 사람들과 다른 처지로 만들어주었다.

그렇지만 미국에 대한 한국인의 ‘보답’은 도덕적인 것과는 아주 거리가 먼 것이었다. 베트남전쟁 기간에 한국군 손에 희생된 베트남인의 공식 수는 4만1천 명 이상이다. 이 가운데는 민간인 5천∼9천 명이 포함돼 있다. 이들은 여러 형태로 학살됐다. 그중 하나가 1968년 하미 마을에서 일어났다. 일단의 청룡부대 군인들이 마을로 들어가 주민들을 몇 그룹으로 나눈 다음 총을 쐈다. 135명이 죽었다. 군인들은 그들의 집과 주검을 불태우고 모든 것을 불도저로 밀어 ‘집단 무덤’을 만들었다.

전쟁으로 목숨과 집을 잃었던 한국인들은 자신의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들의 생명과 집을 파괴하는 데는 주저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피카소의 그림에서 애도된 피해자가 베트남전쟁의 가해자로 자리를 바꾼 것이다. 불행히도 이는 한국인들만이 아니었다. 역사적 증거들을 보면, 다른 이에게 폭력을 가한 사람들 대다수는 다른 사람이 저지른 폭력의 피해자였다. 억압받은 이들은 이후 다른 사람을 학대함으로써 (한국전쟁 혹은 일본 식민통치 동안) 자신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에 대한 ‘생존의 서사’를 (베트남에서와 같은) 잔혹 행위로 왜곡하는 것이다.

이런 전환에 대한 분석은 아프리카 출신 로마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396~430)가 쓴 작품들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악을 ‘선의 부재’ 혹은 ‘선의 박탈’로 정의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은 인간에게서 인간 본연의 고결함을 빼앗아, 그것을 더 작게 하거나 없애버린다고 봤다. 그 박탈 과정에서 나타나는 악, 즉 폭력은 선의 결여에서 비롯한다. 다른 사람들이 가한 폭력적 수단으로 피해자에게 강요된 이 결여는 훗날 악이 되어, 이번엔 피해자가 또 다른 이에게 잔혹한 가해자가 되게 만든다.

폭력 행위가 이런 식으로 ‘재현’(mirror

-ing)된다는 증거는, 하미 학살 피해자를 추모하기 위해 수년 전에 세운 위령비와 피카소의 을 대비하면 알아차릴 수 있다. 위령비는 실제 일부 청룡부대원들이 참회하러 학살 지역으로 가 지원한 자금으로 건립됐다. 위령비가 처음 건립됐을 때, 뒷면에 1968년 2월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말해주는 시 한 편이 쓰였다.

“화염 아래 쓰러져 갈가리 찢긴 아버지, 어머니를 보는 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고, 손을 뻗고, 심지어 죽은 엄마의 젖을 계속 빠는 아이들과 아기들을 보는 건 얼마나 끔찍한가.”

하지만 시는 곧 지워졌다. 공식 제막식이 열리기 직전, 한국 외교관이 위령비를 보고 항의했기 때문이다. 결국 시는 연꽃 그림으로 대체됐다.

베트남 생존자는 기억을 원한다

생존자들은 자신이 무엇을 겪었고, 어떻게 고통받았는지 (가해자들이) 기억해주기를 바란다. 한국인은 여전히 일본 식민통치 기간에 겪었던 고통에 대해 일본 정부가 사과하기를 기다린다. 문제는 이것이다. “한국인들은 다른 사람에게 어떤 고통을 주었고, 그것이 그들에게 어떻게 고통을 끼쳤는지 기억하거나, 혹은 그것에 대해 들을 준비가 되었는가?”

아다니아 시블리 팔레스타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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