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사흘째 밤이 되었으나 나는 외로움과 추위, 낯선 환경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비무장지대(DMZ)를 탐방하고 돌아온 그날, 나는 불면으로 밤새 뒤척이며 친구의 나라가 남과 북으로 갈린 슬픈 현실을 되새겼다. 베트남도 그러한 시대를 보냈고 그와 비슷한 상처를 품은 적이 있다. 다만 베트남은 십수 년간 이어진 가혹하고 처절한 투쟁을 거쳐 조국 통일이라는 소망을 조금 빨리 이룰 수 있었을 뿐이다.
지난 세기의 1960년대 말, 나는 전쟁 초대장을 받았다. 전쟁이 가장 치열하던 시기로 50만 명 이상의 미군이 베트남 남부에 주둔하고 있었다. 1968년 무신년 설, 우리가 대공세를 펼친 때는 전쟁이 정점으로 치달았던 시기다. 사이공(지금의 호찌민) 근교에서 며칠 전투가 있은 뒤인 1968년 2월4일로 기억한다. 우리 대대는 사이공에서 10km 떨어진 빈떤현, 빈록사의 한 마을에서 미군 1개 보병 대대와 남베트남군 1개 보병 대대에 포위당했다. 1월31일 새벽, 떤선 공항 공격이 실패한 뒤 어마어마한 사상자를 낸 우리 대대는 빈록사의 마을로 들어가 전열을 정비하고 반격을 준비하면서 상부의 지시를 기다리라는 명을 받았다.
“나 좀 살려줘” 분대장의 절규그날 새벽, 봄의 태양이 쏟아내는 강렬한 빛이 채 비추기도 전에 적의 정찰기가 나타났다. 상공을 몇 바퀴 선회하고 내려와 정찰을 마친 비행기가 다시 높이 날아오르더니 우리의 위치를 알리는 사격을 했다. 1분도 지나지 않아 미군 전투 헬기 다섯 대가 몰려와 우리 대대 방어선에 총탄을 퍼부었다. 30분 가까이 맹렬한 사격이 이어진 뒤 미군 보병은 장갑차의 엄호를 받으며 세 방향으로 나눠 공격해왔다. 그들은 적톳길을 가로지르고 경계조를 돌파해 우리 중대의 방어선으로 돌진해왔다.
수십 년이 지나도 죽음의 그날을 떠올리면 장갑차에 달린 수십 개의 무반동포가 내뿜는 폭발음과 유탄발사기의 ‘퉁’ ‘쾅’ 하는 소리, M16 소총을 연사하는 굉음, 참호를 부수는 유탄의 육중한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리고 포탄 연기와 흙먼지 속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투이, 나 좀 살려줘, 나 좀 구해줘.” 분대장 부이민타이의 목소리다. 이어 유황 냄새와 피비린내, 그리고 뜨거운 총신에서 날아온 탄약 냄새가 느껴진다. 나는 부분대장 반을 본다. 106.7mm 포탄으로 지상에서 사라진, 시를 쓰는 나의 가장 절친한 친구. 당시 그는 흩어진 부대를 모아 반격할 방안을 찾고 있었다.
소대장 바론이 전속력으로 돌진해오는 장갑차들을 향해 사격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장갑차 하나가 막 총을 맞고 쓰러진 병사의 참호로 달려드는 순간, 그도 고개를 처박고 참호 구석 새까만 모래 위에 핏덩어리를 토해냈다. 적군이 있는 쪽을 향해 우리가 갖고 있던 모든 것을 퍼부었다. 61mm 박격포, 바주카포, 수류탄, AK-47 자동소총. 나는 우리가 한 공격에 명중된 장갑차가 논두렁에 머리를 처박는 것을 보았다. 장갑차에서 미군 부상자 하나가 사력을 다해 지붕 위로 기어올랐으나 총을 맞고는 땅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그럼에도 우리는 적의 공격을 당해낼 수 없었다.
그날 밤 우리는 전장에서 후퇴하라는 명을 받았다. 우리 중대는 적을 막고 부상병과 주검을 후송하는 임무를 하달받았다. 부상병도 다 옮기지 못했는데 적들에게 퇴로를 발각당했다. 그들이 조명탄을 쏘자 하늘이 환하게 빛났다. 떤선 공항에서 날아온 헬리콥터 3대에서 눈부신 서치라이트가 켜지고 후송 대열에 총탄이 빗발쳤다. 수많은 전사가 총을 맞고 들판에 쓰러졌고, 그들의 어깨 위엔 여전히 부상병이 얹혀 있었다. 소대장 바론은 미친 사람 같았다.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의 총격 소리가 울려퍼지는 중에도 그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욕설을 퍼부었다. 우리는 소총으로 힘이 닿는 데까지 대응사격을 했다. 헬리콥터는 먼 곳으로 날아올랐고 바주카포의 포격이 들판에 쏟아졌다.
화염방사기로 포로 불태운 미군우리가 바우꺼로 퇴각했을 때 새벽이 밝아왔다. 들판이 훤히 드러나는 낮에는 행군을 할 수 없어 커스터드애플나무가 듬성듬성 서 있는 논둑에 머물러야 했다. 부상병들은 잡초가 무성한 습지로 이동시켰다. 참호를 만들기 위해 땅을 파고 있는데 적군이 침투해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적군이 퇴각 방향을 알아챈 것이 틀림없다. 배낭을 메고 손엔 무기를 든 미군 보병들이 헬리콥터에서 와르르 땅으로 뛰어내렸다. 그들은 재빠르게 논둑을 따라 전투 진형을 갖추며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길로 나아갔다. 헬리콥터가 맹렬히 적군에게 총격을 가하는 걸 바라보며, 굶주리고 피곤에 전 우리 병사들은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모르며 바짝 긴장해 있었다. 너무나 위급한 상황이었다. 총탄은 거의 바닥났다. 병력도 얼마 남지 않았다. 싸울 것인가, 말 것인가.
“놈들이 우리를 발견하면 싸운다.” 중대의 정치지도원이 조용히 말했다.
“반대의 경우엔 어쩌지?” 바론이 무심히 질문을 던졌다.
“뭘 물어봐? 꼭꼭 숨어야지.”
당연한 일이다! 진흙투성이인 들판에 덩그러니 누워 실수로 총을 한 발 쏘면 미군놈들이 주저하지 않고 일대를 싹 쓸어버릴 거라고 생각하며 나는 차가운 진창에 납작 몸을 웅크리고서 제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말아달라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미군은 병사들을 부려놓고도 수색하지 않았다. 그들은 삼삼오오 무리지어 논둑에 바싹 붙어 있었다. 놈들도 습지에 빠지는 게 두려운 모양이었다.
정오가 지나자 미군이 진군한 구역을 떠났다. 그들은 보란 듯이 논둑 위를 걸어 왼쪽 들판의 꺼우나무 쪽으로 향하더니 머이 마을이 있는 곳으로 행군했다. 먼 곳 어디선가 몇 발의 총성이 울렸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가볍게 내쉬었다.
그날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고, 우리는 전장을 벗어나 비교적 안전한 늄 숲으로 갔다. 5월 초 병력과 장비를 충분히 보충받은 우리 대대는 다시 한번 사이공을 공격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이틀간의 전투 이후, 대대는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고 사상자도 엄청났다. 우리의 총탄이 바닥나고 힘이 다한 것을 알자, 미군과 사이공 연합군은 총반격에 나섰다. 우리 대대의 모든 중대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미군은 우리 군의 진형을 산산조각 내버린 뒤 부대별로 몰살시켰다. 2분대는 전투로 탄약을 소진하고 적에게 생포됐다. 미군은 그 분대원들을 무너지는 집에 몰아넣은 뒤 화염방사기로 불태웠다. 깟비 특공대대도 전장에 도착하자마자 비슷한 처지가 되었다. 전사 30여 명이 붙잡혀 포로가 되었고 즉결 처형됐다. 주검은 마을 우물에 버려졌다.
전쟁 상처 가슴에 새기고 찾은 DMZ그날 이후 슬프고 처참한 나날이 이어졌다. 많은 해방구가 적에게 다시 점령당했다. 우리 대대는 적군에게 멀리 쫓겨났다. 이 시절에 사람들이 술독에 빠져 지내는 나쁜 버릇이 생겨났다. 여자도 마셨다. 슬퍼서 마셨고 아파서 마셨다. 술이라도 마시지 않고는 배겨낼 도리가 없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수많은 사건이 시간에 파묻혔다. 그러나 고통의 그날, 상실의 그날만큼은 내 기억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 시간들은 새빨간 도장처럼 마음에 낙인을 찍었다. 무신년 작전 이후 3개월이 지난 뒤에도 나는 잠들지 못했다. 눈을 감아도 미군의 헬리콥터가 동료들에게 총탄을 내뿜는 모습이 보였고, 폐가에 갇힌 분대원들이 구해달라고 아우성치는 소리와 빗발치는 기관총 소리가 들렸고, 총탄에 차례차례 쓰러지는 동료들이 보였다. 나는 불운했던 절친 반을 떠올렸다. 죽은 전우들과 운 좋게 살아남은 녀석들을 떠올렸다. 그렇게 고통과 공허와 심리적 공황에 빠져들었다. 수도 없이 이 비열한 전쟁에 분노와 저주를 쏟아냈다. 선사시대에 멸망한 육식동물처럼 전쟁이 사라지길 기원했다. 나는 지금도 간절히 바라고, 영원히 소망한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뒤 머나먼 한반도 땅 비무장지대를 둘러보고 돌아온 그날 밤, 전쟁의 기억이 몽글몽글 되살아나며 밤을 꼬박 새우고 말았다. 한국이라는 땅에서 두 번 다시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했다. 한국 사람들은 결코 베트남이 감내해야 했던 참상을 겪지 않기 간절히 바랐다. 나를 초청한 중앙대의 한 객실에 홀로 누워 밤새 뒤척이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싸늘한 한기가 스며들었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아름다우면서도 낯설었다. 그렇지만 방, 창, 노, 황, 최, 하, 구, 박. 친근하고 따스한 한국 친구들을 떠올리자 이내 마음이 따스해졌다.
밤 11시께, 한국의 소설가 김남일이 불쑥 나를 찾아왔다. 그는 어딘가 다녀온 듯 카스텔라가 든 비닐봉지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가 내 방에 뛰어들면서 사람의 온기도 함께 가져왔다. 그는 서양인들이 말하는 억양의 베트남어로 말했다. 웃겨죽을 뻔했다. 그러나 어떠랴. 중요한 것은 만남 속에서 사람들의 관계와 신호가 가져다주는 울림이니까. 김남일은 나에게 빵을 줬다. 그는 눈짓으로 빵을 먹으라고 권했다. 그것이 그의 저녁이라 생각하니 차마 먹을 수 없었다. 친하게 지내는 한국 문인들 중에서도 방, 하, 황 그리고 김은 내가 너무도 소중히 여기는 친구이다. 나는 그의 글을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상징적이고 지적인 그의 문체를 좋아했다. 그의 문장은 자신의 일과 삶,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뜨거웠다. 나는 김남일을 세 번 만났다. 두 번은 한국에서, 한 번은 나의 나라 베트남에서. 만난들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꼭 말을 해야 알겠는가. 그저 바라보고 친밀감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전쟁 역시 언젠가 소멸할 것을…그날 밤 텔레비전을 보니 한반도는 긴장 국면이었다. 나는 방과 김 그리고 나의 소중한 한국 친구들을 떠올리며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했다. 선사시대의 흉악한 짐승들이 사라졌듯이 전쟁 역시 사라지고 소멸할 것을 기도했다. 나의 조국과 같은 전쟁을 통한 통일이 아닌, 한국의 평화로운 통일을 소망했다. 인간은 끊임없이 편을 가르고 분열하지만 그로 인한 상처가 치유되지 않을 이유는 없다.
2017년 11월, 사이공에서
반레 작가구수정 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
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이재명 선거법 2심 이르면 3월 말 선고…대선 중대변수로
김용현, 포고령·비상입법기구 문건 ‘윤석열 비호’ 맞춤 답변
‘전광훈 지시 받았나’ 묻자…서부지법 난동 전도사 묵묵부답
윤석열, 언론사 단전·단수 지시했나…“계엄 문건 이상민도 전달”
탄핵 외치면 “중국인”…민주주의 위기 실감한 청년들
서부지법 판사실 문 부순 ‘사랑제일교회 특임전도사’ 구속
“명태균은 다리 피고름 맺혀도”…윤석열 병원행 분개한 명씨 변호인
헌재, 최상목에 “마은혁 헌법재판관만 임명 안 한 근거 뭐냐” [영상]
현실 직시 [그림판]
[영상] 윤석열, 계엄 51일 만에 만난 김용현에 ‘답정너’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