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낌은 12살이었다. 그가 살던 주이찐사는 당시 베트콩(VC·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장악 지역이었다. 바로 옆 혼방산에 한국군 초소가 있었다. 그 너머 짜끼에우 지역은 남베트남군 장악 지역이었다. 낌의 아버지는 농사지을 땅 말곤 가진 게 없는 농민이었다. 당시 돈 많은 사람들은 전쟁을 피해 안전한 다낭이나 호찌민으로 갔다. 하다못해 혼방산 너머 남베트남군 통제지역인 짜끼에우로 떠났다. 가난한 낌의 가족은 주이찐에 그대로 남아 살았다.
주검 옆에서 숨을 참다“빨리 도망가야 해!” 1968년 10월6일 아침, 엄마가 자고 있던 낌을 깨웠다. 한국군이 마을 입구까지 왔다고 했다. 아빠는 이미 도망쳤다. 베트콩으로 의심받기 쉬운 청장년 남성들은 모두 마을을 떠났다.
엄마, 남동생(11), 여동생(10), 막내여동생(2), 그리고 낌은 외할아버지네 방공호로 숨었다. 한국군이 방공호로 왔다. 밖으로 나오라고 했다. 목에 총을 겨누고 종아리를 차며 등을 밀었다. 주민 10여 명을 한 줄로 세웠다. 옷에 있는 소지품을 검사했다. 문제가 될 만한 물건은 나오지 않았다. 한국군이 다시 안으로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등을 돌리는 순간 한국군이 총을 갈겼다. 두 여성과 두 아이가 그 자리에서 숨졌다. 나머지 주민들은 다시 방공호로 도망쳤다. 낌의 엄마는 총에 맞아 다쳤다. 다시 한국군 한 명이 왔다. “그때, 한국군이 ‘우리가 실수로 잘못 쐈다, 미안하다’고 할 줄 알았어. 쏠 이유가 없었으니까. 엄마를 치료해줄 거라고 생각했지.” 낌이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 한국군은 수류탄을 던졌다. “엄마, 수류탄 던졌어!” 낌이 소리쳤다. 한국군은 다시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지길 반복했다. 그때 임신 중이던 엄마와, 여동생 둘이 숨졌다. 수류탄 파편에 두 다리가 잘린 남동생(11)은 엄마 품에서 소리 지르며 울었다. 낌이 떨면서 동생을 안고 반대쪽 출구로 걸어갔다. 동생 울음소리를 들었는지, 한국군은 출구에도 수류탄을 던졌다. 낌은 어디론가 굴러떨어졌다. 수류탄 파편에 왼쪽 옆구리를 다쳤다. 동생은 보이지 않았다. 굳은 피와 주검만 가득했다. 썩는 냄새를 견딜 수 없었다. 방공호와 이어진, 다른 방공호로 건너갔다. 거기에도 주검이 쌓여 있었다. 주검 더미에서 한 끼도 못 먹고 지낸 지 닷새째, 한국군이 방공호로 들어와 손전등을 비췄다. 살아 있는 사람을 찾는 것 같았다. 어느 주검 옆에 누워 눈을 감고 숨을 참았다. 한국군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낌을 지나쳐 방공호를 빠져나갔다.
1개 읍·면, 이틀간 82명 학살낌이 가족 4명을 잃은 학살 현장엔 현재 주이찐 위령비가 서 있다. 위령비에는 ‘1968년 10월5~6일 한국군 청룡부대가 민간인 32명을 학살했다’고 적혀 있다. 낌의 외할아버지인 루어 할아버지 방공호에서 12명이 학살된 날(10월6일), 같은 마을(동옌촌)에 살던 보이 할머니 가족 6명도 다른 장소에서 학살됐다. 전날(10월5일)엔 같은 마을 티에우 할머니 방공호에서 14명이 학살됐다. 지난해 12월31일 주이찐사에 있는 집에서 만난 도안득(60)은 티에우 할머니 방공호 학살 현장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다. “한국군이 방공호에 수류탄을 던지고 나서 나랑 어느 아주머니, 두 명만 살아남았어. 한국군이 우리가 살아 있는 걸 발견하고 나오라 했어. 밖으로 나가자 아주머니를 바로 총 쏴 죽였고, 난 다른 방공호로 밀어넣고 수류탄을 던졌지.” 그 수류탄 파편에 손을 다치고 살아남은 도안득이 그날을 떠올리며 말했다.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 통계를 기록한 자료는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한베평화재단이 입수한 주이쑤옌현 인민위원회 보고서(2006)는 1968년 10월5~6일 4개 마을(촌)에서 총 82명이 한국군에게 학살당했다고 밝힌다. 한베평화재단은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 전투부대(청룡·맹호·백마부대)가 주둔한 베트남 5개 성(꽝남성·꽝응아이성·빈딘성·카인호아성·푸옌성)에서 학살한 민간인 수를 9천 명 이상(2002년 집계)으로 추정한다. 최근 집계 중인 통계에 따르면, 1968년부터 꽝남성에서만 한국군이 민간인 4천 명 이상을 학살한 것으로 파악된다. 베트남 정부, 공공기관, 인민위원회, 군 작성 자료 등을 종합한 결과다.
학살이 끝나고, 12살 낌은 생각했다. ‘엄마 아빠도 없는데 이제 어떻게 살지?’ 낌은 가족이 다 죽고 나서 자주 굶주렸다. 어느 가족이든 받아주기만 하면 그 집에 얹혀 허드렛일을 하며 살았다. 21살까지, 하노이(베트남 북부), 후에(중부), 빈투언(남부)을 전전하며 남의 집 잡일을 했다. 고향 주이찐에서 하노이와 빈투언은 각각 차로 14시간가량 걸린다.
낌의 아들, 도안주이프엉은 올해 26살이다. 지난해 12월26일 베트남 다낭시 낌의 집에서 만난 프엉은 “닷새 뒤 결혼한다”며 싱글벙글 웃었다. 그는 다낭에 있는 한 호텔 스파에서 일한다. “호텔에서 일하니까 한국 사람들을 진짜 많이 만났죠. 처음 한국 사람들 만났을 땐, 아버지에게 들은 학살 이야기가 있어 마음이 아주 불편했어요. 근데 워낙 많이 만나다보니 지금은 괜찮아요.” 프엉이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는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고 잘 모르잖아요. 도대체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알고 싶어요. 그때 주이찐사에 있던 한국군은 도대체 얼마나 죽었기에, 한쪽은 군인이고 다른 한쪽은 민간인인데 왜 이렇게까지 죽였는지 궁금해요.” 낌이 아들의 말을 받았다. “그땐 (사건이) 다 묻혔지. 한 사람만 억울하게 죽어도 신문, 방송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요즘만 같았어도 그러지 않았을 텐데….”
“미군은 사과하고 참회하는데…”낌도 궁금하다. “미군은 자기들이 학살한 지역에 찾아가서 사과하고 참회하는 걸 (신문·방송에서) 많이 봤거든. 그런데 한국군은 절대 그런 일이 없어.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그땐 그들도 어리고 전쟁통이었으니, 내 전우가 죽어서, 갑자기 화가 나서, 사람을 죽였을 수도 있는데, 사람이 나이가 들면 그때 일을 돌아보며 미안해하고 한번 찾아가서 사과할 수도 있잖아. 정부는 그렇다 치고 개인은 양심에 따라 그럴 법도 한데, 왜 그런 한국군은 단 한 명도 없어?”
꽝남(베트남)=글 김선식 기자 kss@hani.co.kr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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