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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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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학살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 목격자 응우옌흐우마이와,

2017년 여름 해골·뼛조각 하나씩 나눠 가진 유족들
등록 2018-02-03 11:43 수정 2020-05-03 04:28
베트남 꽝남성 주이쑤옌현 주이 하이사에 있는 집 거실에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 목격자 응우옌흐우마이가 앉아 있다. 2017년 12월29일.

베트남 꽝남성 주이쑤옌현 주이 하이사에 있는 집 거실에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 목격자 응우옌흐우마이가 앉아 있다. 2017년 12월29일.

낡은 벽엔 곰팡이가 피었다. 페인트칠도 도배도 하지 않은 거실 벽은 잿빛 맨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천장 높은 1층집, 두 평 남짓한 거실에서 키 작은 팔순 노인이 네발 달린 지팡이를 앞에 두고 앉았다. 지난해 12월29일 아침 8시30분, 베트남 다낭공항에서 남쪽으로 35km 떨어진 꽝남성(도) 주이쑤옌현(군) 주이하이사(읍·면)에 있는 응우옌흐우마이(80·이하 마이)의 집이었다. 마이는 49년 전 한국군이 마을 주민 수십 명을 학살한 과정을 지켜본 이였다.

3시간 동안 이어진 인터뷰를 마이는 힘들어했다. 그의 손과 발은 관절염으로 울퉁불퉁했고, 당뇨와 백내장으로 인해 오른쪽 눈이 흐려 보였다. 그는 “그나마 왼쪽 눈은 2년 전 수술해 나았다”고 했다. 마이는 지쳐 보였지만 말할 때만큼은 흔들림이 없었다. “이 학살은 진짜야. 사실이야. 그날 사람들 머리가 잘려나가고 피가 엄청 흐르고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어. 이건 사실이야.”

옆에서 울음 터뜨린 아이마저
마이는 1975년 그의 마을 학살 희생자 명단을 직접 조사했다.

마이는 1975년 그의 마을 학살 희생자 명단을 직접 조사했다.

1969년 9월17일, 꽝남성 주이하이사 떠이선떠이촌(리 단위·당시엔 주이응이어사에 속한 마을)에 아침부터 포격 소리가 울려퍼졌다. 포격이 그치고 한국군이 마을로 들어온 건 정오 무렵이었다. 그때 31살 청년 마이는 마을 유격대원이었다. 그는 혼자 한국군 뒤를 밟았다. “한국군을 추적하는 건 너무 위험하고 힘든 일이었어. 몸을 숨기면서 따라붙어야 했거든. 발각되면 바로 죽음이야.” 마이가 숨가빴던 그날을 다시 떠올렸다.

한국군이 리에우 할아버지 방공호 앞에 멈춰 섰다. 리에우는 마이의 아버지였다. 마이의 아버지 방공호엔 아침 포격 소리에 놀란 마을 사람들이 모여 숨어 있었다. 한국군이 방공호 안에 있는 마을 사람들을 하나둘 밖으로 나오게 했다. 순간 마이는 “정신이 다 혼미하고 아득했다. 주민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심장이 벌렁벌렁 마구 뛰었다.” 한국군이 방공호 밖으로 나온 주민들에게 물었다. “비시(VC·베트콩)지? 비시지?” 마을 사람들은 그 말을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저 말없이 머리를 조아리고 두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대답 없는 주민을 향해 한국군이 총을 쐈다. 바로 옆에서 울음을 터뜨린 아이에게도, 총소리에 놀라 달아나는 사람들에게도 총을 쐈다. 방공호 안으로 수류탄도 던졌다.

“그땐 등줄기가 서늘해지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어. 너무 끔찍했고 분노가 치밀었어. 혼자서라도 죽을 때까지 한국군과 싸우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어. 난 지켜보기만 했어.” 마이가 말을 멈추고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당시 마을 유격대는 적군이 작전을 수행할 때 절대 그들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었다. 적군의 잔인성을 자극할 뿐, 얻을 게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날 학살은 끝났다. 방공호에서 무기는 나오지 않았다. 널브러진 주검들은 그대로 썩어갔다. 한국군은 그곳을 지켰다. 일주일이 지나자 주검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한국군이 조금 멀리 떨어져 보초를 섰다. 보름이 지나자 도저히 악취를 견딜 수 없었는지, 한국군은 마을을 떠났다.

다음날 이른 아침, 마이는 다른 유격대원들과 학살이 벌어진 현장에 갔다. 유격대원들은 코를 막고도 주검 근처에 가지 못했다. 그들에게 망을 보게 한 뒤, 마이가 혼자 주검들을 수습했다. “그나마 형체가 온전한 주검들은 널빤지에 올려서 길에 내놓으면 가족들이 주검을 찾아갔어. 하지만 이미 썩어문드러진 주검들은 그렇게도 할 수가 없어 방공호 있던 자리에 그대로 묻을 수밖에 없었어.”

희생자 제단은 노란색·분홍색으로
2008년 세운 주이응이어 위령비에는 희생자 명단이 충분히 기록되지 못했다.

2008년 세운 주이응이어 위령비에는 희생자 명단이 충분히 기록되지 못했다.

1975년 베트남전쟁이 끝나고 마을 사람들이 고향에 돌아왔다. 6년 전 학살로 가족을 잃고 주검도 찾지 못한 주민들이 그곳에 몰려갔다. 그들은 학살 현장인 리에우 할아버지 방공호 터를 다시 팠다. 땅에선 유골만 나왔다. 유족들은 누구 것인지 알 수 없는 그 유골들을 가져갈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바로 옆 길가에 집단묘지를 만들었다.

마이는 그날의 학살 광경을 잊을 수 없었다. 뭐라도 남겨야 했다. 그는 마을을 집집마다 돌며 학살 희생자 명단을 조사했다. 가족에게 직접 확인한 희생자 명단만 31명이었다. 마이는 1977년 사비를 털어 학살 현장에 직접 제단을 지어 올렸다. 2m 남짓 높이의 제단 시멘트 벽에 노란색과 분홍색으로 페인트칠을 했다. 제단 안쪽에 희생자 명단을 새긴 대리석을 붙였다. 그가 그렇게까지 나섰던 이유가 궁금했다.

“유가족도 아닌데 직접 희생자 명단을 조사하고 사비를 털어 제단까지 지은 이유가 뭔가요?”

“이렇게 많은 사람이 묻혔는데 학살의 흔적은 남지 않았잖아. 제단이라도 세워서 학살의 유적을 만들고 싶었어. 그리고 억울하게 죽어간 이 사람들에게 향이라도 바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마지막으로 먼 훗날 적어도 우리 정부는 이곳에서 한국군 학살이 있었다는 걸 알고 어떤 식으로든 해결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지.”

‘리에우 할아버지 방공호 학살’은 2008년 6월9일 건립된 주이응이어 위령비(주이응이어사 선비엔촌)에도 기록돼 있다. 희생자 수는 1975년 마이가 조사한 규모(31명)에 못 미친다. 위령비에는 리에우 할아버지 방공호 학살(1969년 9월17일)과 뇨 할아버지 방공호 학살(1969년 11월12일) 희생자 수를 더해 총 31명이라고 쓰여 있다. 마이는 “뇨 할아버지 방공호에선 리에우 할아버지 방공호보다 더 많은 사람이 학살당했다”고 말했다. 뇨 할아버지 방공호 학살 희생자들을 직접 수습한 응우옌떤꾸이(76·이하 꾸이)도 “뇨 할아버지 방공호 학살 희생자는 최소 40~50명”이라고 말했다. 학살 현장 목격자인 마이와 꾸이에 따르면, 위령비에는 희생자 명단을 절반도 기록하지 못한 것이다. 조사 시점(2008년)이 늦은 만큼 가족들을 통한 희생자 신원 확인에 한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이응이어 위령비는 한국군이 1969~71년 주이응이어사 4개 지점에서 민간인 총 83명을 학살했다고 기록한다. 비문에는 “희생자 대부분이 노인, 여성, 아이였으며 그중 3명의 임신부가 있었다”고 쓰여 있다.

유족들은 지난해 6~7월, 48년 전 학살당한 ‘가족들’을 다시 마주해야 했다. 유골들을 모아 묻은 집단묘지 주변에 도로 공사가 시작됐다. 집단묘지를 이장해야 할 상황이 됐다. 베트남 정부는 집단묘지를 이장해 한국군 학살 유적을 보존하기 원했다. 유족들은 이장을 반대했다. 가족을 멀리 이장하면, 날마다 찾아가 향을 바치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가족 14명을 학살로 잃은 다섯 가족은 결국 집단묘지를 파서 가족마다 해골 하나와 뼈 한 조각씩을 나눠가졌다. 그 해골과 뼛조각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마이는 “그 가족들은 그 해골과 뼛조각이 내 엄마, 내 가족이겠거니 생각하면서 그렇게 하나씩 가져가 각자 무덤을 만들었어”라고 말했다. 그 말을 통역하던 베트남인 쑤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목격자와 유족들은 제 몫을 다해…
마이의 부인 보티풍(84)이 리에우 할아버지 방공호 학살 터 제단에 향을 바치고 있다. 그의 뒤에 선 이들은 한베평화재단 활동가들과 취재진. 2017년 12월29일.

마이의 부인 보티풍(84)이 리에우 할아버지 방공호 학살 터 제단에 향을 바치고 있다. 그의 뒤에 선 이들은 한베평화재단 활동가들과 취재진. 2017년 12월29일.

베트남에서 학살 목격자는 그날의 기억을 50년째 안고 제 몫을 다해 살아가고 있었다. 학살 유족들은 지난해 여름 남의 것일지 모를 유골을 다시 무덤에 묻고, 날마다 그들의 넋을 달래며 살아가고 있다.

꽝남(베트남)=김선식 기자 kss@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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