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베평화재단· 공동기획_1968 꽝남! 꽝남!
① 1968 꽝남대학살 지도
② 무고한 죽음에 대한 예의
③ 살아남은 자의 물음
“저기야.” 꾸이가 긴 팔로 고시원 방 절반 크기의 작은 집을 가리켰다. 1969년 11월12일 한국군이 베트남 민간인 수십 명을 학살한 자리에 세운 사당이었다. 그날 그 자리에서 꾸이도 가족 다섯을 잃었다. 어머니(사망 당시 62살), 아내(23살), 큰딸(5살), 큰아들(3살), 작은딸(0살). 쑥 들어간 그의 눈 위로 희끗희끗한 짙은 눈썹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1969년 11월12일 새벽 5시, 베트남 꽝남성 주이쑤옌현 주이응이어사 7촌 마을(2018년 1월 현재 주이하이사로 편입됨)에 포격 소리가 울려퍼졌다. 주민들은 뇨 할아버지네 방공호로 모여들었다. 꾸이네 다섯 가족도 그곳에 숨으러 들어갔다. 마을 유격대원이던 꾸이는 이른 새벽 집을 나와 마을을 벗어났다. 베트콩(VC·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으로 오인받기 십상인 마을 청장년 남성들도 일찌감치 마을을 떠났다. 포격 소리가 그치자 헬기에서 내린 한국군들이 마을로 들어왔다.
“여기 오면 너무 마음 아파”그날 오후 4~5시, 꾸이는 한국군이 떠난 마을로 다시 돌아왔다. 가족을 찾으러 뇨 할아버지네 방공호로 갔다. 방공호 앞마당과 대나무 수풀에 총 맞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쓰러져 있었다. 방공호는 이미 무너져내렸다. 사람들 머리와 몸이 찢겨 널려 있었다. 유일하게 살아 있던 8~9살 아이는 피를 많이 흘려 병원으로 옮기는 길에 숨을 거뒀다. 한국군이 방공호 밖으로 나온 사람들을 총으로 쏴 죽이고, 방공호에 수류탄을 던진 흔적이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주검들 사이에 서서 마을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확인 과정을 거쳐야 했다. “어떤 사람은 옷을 보고 ‘우리 가족이야’, 누구는 물통을 보고 ‘우리 가족이야’ 하며 가족을 찾았어. 전쟁 통에 장례를 치를 수도 없어 낙하산 천 쪼가리나 우비를 주워다 주검을 둘둘 말아서 대충 묻을 수밖에 없었어.” 꾸이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 무덤들을 나중에 어떻게 알아보고 찾겠어. 그래서 내 가족들 묻은 5개 무덤 위엔 큰 돌덩어리들을 올려놨어.” 꾸이는 숨진 가족들을 수습하고 그날 밤 8~9시, 마을을 도망치듯 떠났다. 가족이 다시 오지 못했거나, 가족조차 형체를 알아볼 수 없어 끝내 가족을 만나지 못한 주검들은 오랜 세월 그곳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누군가의 주검이 50년째 아무렇게나 묻혀 있을 그 땅 위에서 꾸이가 말했다. “여기 오면 감정이 격해지고 마음이 너무 아프거든. 그래서 여기 오는 게 싫었어. 두려웠어.”
꾸이는 이듬해인 1970년 감옥에 갇혔다. 유격대였던 그는 적군과 전투 중에 붙잡혔다. 5년간 베트남 남쪽 악명 높은 꼰다오섬에 투옥됐다. 1975년 전쟁이 끝난 뒤에야,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가족 무덤부터 찾았다. 무덤 자리를 표시한 돌덩어리들이 남아 있었다. 그 아래 땅을 파서 확인했다. 가족이 입고 있던 나일론 옷이 보였다. ‘아, 여기가 맞구나. 잃어버리지 않았구나.’
뒤늦게 가족의 주검을 찾으러 온 마을 사람들은 학살 현장인 뇨 할아버지네 방공호 자리를 팠다. 땅에서 반 냥도 되지 않는 금 조각이 나왔다. 주민들은 누구 것인지 알 수 없는 그 금 조각을 팔아 그곳에 작은 사당을 지었다. 그 뒤로 해마다 음력 10월3일(학살이 벌어진 날)과 음력 설에 유가족들과 동네 사람들이 사당에 모여 향을 바치며 제사를 지내고 있다.
그들을 비 맞게 할 순 없었다녹슨 사당 철문을 열자 초 4개, 향로 4개가 놓인 제단이 보였다. 꾸이가 향을 피워 절을 올리고 나서 말했다. “이 사람들 너무 억울하고 고통스럽게 죽었잖아. 그래서 비 맞지 말라고 지붕 덮어서 집을 만들어준 거야.” 사당 문 3m 앞에는 무릎 높이보다 낮은 시멘트 반석이 놓여 있었다. 마을 조상들을 모시는 제단이었다. 조상을 위한 제단은 비를 맞더라도 무고하게 죽임을 당한 이들을 위한 제단은 비를 맞게 해선 안 된다는 게 마을 사람들의 뜻이었다.
지금 마을은 황무지가 되었다. 풀과 나무가 무성한 마을엔 무덤들과 사당만 남았다. 49년 전 마을은 땅이 좋아 농사가 잘됐다. 도로를 따라 농가 30~40채가 옹기종기 모여 살던, 당시에는 꽤 큰 마을이었다. 베트남전쟁이 끝나자마자 마을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오래 정착하진 못했다. “아무 기척도 없는 적막한 밤, 부슬부슬 빗소리만 또렷한 고요한 밤이면 누군가의 비명, 울음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어. 그 소리를 들으면 마을 사람들이 너무 슬퍼서 도저히 살 수 없는 거야.” 꾸이가 제대로 알아들었냐는 듯 다시 말했다. “그 소리가 무서워서가 아니야, 너무 슬퍼서 떠난 거지.”
베트남 꽝남성 주이쑤옌현 주이응이어사 선비엔촌에 있는 주이응이어 위령비, 그 비문엔 한국군이 1969~71년 총 4개 지점에서 민간인들을 학살했다고 쓰여 있다. ‘1969년 8월25일 한 할머니 방공호 학살(28명 사망), 1969년 9월17일 리에우 할아버지 방공호 학살과 같은 해 11월12일 뇨 할아버지 방공호 학살(총 31명 사망), 1971년 1월31일 린 할아버지 집 마당 학살(24명 사망).’ 꾸이는 리에우 할아버지 방공호, 뇨 할아버지 방공호 학살을 묶어 민간인 총 31명이 사망했다고 적은 위령비 내용은 틀렸다고 했다. “그날 내가 봤잖아. 뇨 할아버지 방공호에서만 최소 40~50명은 죽었어.” 애초에 가족들이 주검을 찾지 못했거나 위령비를 만든 시점(2008년 6월9일)에 생존한 가족이 없어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희생자가 많다는 뜻이다.
한베평화재단은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 전투부대(청룡·맹호·백마부대)가 주둔한 베트남 5개 성(꽝남성·꽝응아이성·빈딘성·카인호아성·푸옌성)에서 학살한 민간인 수를 9천 명 이상(2002년 집계)으로 추정한다. 최근 집계 중인 통계에 따르면, 1968년부터 꽝남성에서만 한국군이 민간인 4천 명 이상을 학살한 것으로 파악된다. 베트남 정부, 공공기관, 인민위원회, 군 작성 자료 등을 종합한 결과다.
총도 무기도 없는 민간인들이었는데…학살이 있고 49년이 지난 지금, 꾸이는 여전히 아프다. “전쟁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잖아. 근데 그때의 아픔과 상실은 말로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어. 지금도 그때 일을 떠올리면 감정이 북받쳐.” 그는 한국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어찌됐든 한국군은 미국이 데려온 예속 군대였잖아. 그리고 군인들이 서로 총 들고 싸우다 죽고 죽이는 건 전쟁이었으니 있을 수 있는 일이야. 양쪽이 전투하다가 죽이는 걸 학살이라고 하진 않잖아. 근데 여긴 총도 무기도 군인도 없고, 민간인들만 모여 있었어. 한국군을 쏘지도 않았잖아. 죽은 사람들 대부분이 여성이고 어린아이였어. 분노할 수밖에 없는 일이지. 정말 너무 원한이 깊지.”
꾸이를 집에 바래다주는 길, 그에게 물었다.
“지금은 기분이 좀 어떠세요?”
“아이, 지금 자꾸 슬프지. 옛날 그 참혹했던 광경이 떠오르고.”
“괜히 저희들 때문에 죄송해요.”
“아니야, 됐어. 괜찮아.”
힘없는 꾸이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
꽝남(베트남)=글 김선식 기자 kss@hani.co.kr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한베평화재단과 은 ‘1968 꽝남대학살 50주기’를 맞아 역사를 기억하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스토리펀딩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후원해주신 모금액은 피해 마을 제사 지원금과, 4월 국내에서 열리는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 시민평화법정 준비기금으로 쓰입니다. 스토리펀딩 ‘내가 만난 베트남’(인터넷 주소 storyfunding.kakao.com/project/18035)에 들어오시면 베트남에 작지만 소중한 사과와 위로의 마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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