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항소심 선고 이틀 뒤인 2월7일 서울 서초동 ㄷ빌딩 12층에 장미꽃 바구니들이 배달됐다. 이 빌딩은 ‘박근혜 국정농단 사건’ 특별검사팀이 입주한 곳이다. 꽃송이들 사이에는 응원의 메시지가 적힌 카드들이 꽂혀 있었다. “박영수 특검팀, 마침내 이긴다, 정의가 이긴다.” “국민이 사랑하는 특검, 끝까지 함께합니다.” “촛불혁명 승리, 촛불특검 승리!” 복도에 놓인 꽃바구니를 바라보는 특검 관계자들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 이틀 전 항소심에서 뜻밖의 ‘패배’를 당한 충격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여론 59% “판결 공감 않는다” </font></font>이 부회장의 항소심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13부(재판장 정형식)는 이 부회장을 ‘화끈하게’ 봐줬다. 1심에서 인정됐던 뇌물 액수를 대폭 깎는가 하면(89억원 → 36억원), 형량이 가장 센 재산국외도피 혐의에는 아예 무죄를 선고했다. 이 부회장의 형량을 집행유예 기준선인 ‘3년 이하 징역’으로 맞추기 위해 작정하고 결론을 몰아간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여론도 판결에 비판적이다.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가 2월7일 한 여론조사(성인 남녀 501명 대상, 신뢰수준 95%, 표본오차 ±4.4%)를 보면, 응답자의 58.9%가 이번 판결에 ‘공감하지 않는다’고 했다. ‘공감한다’는 35.7%에 불과했다.
하지만 보수언론들은 오히려 박영수 특검팀을 공격하고 나섰다. 항소심 재판부가 사건 구도를 ‘박근혜 대통령의 겁박에 따른 뇌물 제공’으로 규정하자, 기다렸다는 듯 ‘피해자를 범죄자로 만든 특검’ ‘여론몰이로 기업을 뒤흔든 수사’ 등 이 부회장에 대한 수사 자체가 잘못된 것처럼 공격을 퍼부었다.
보수언론은 특검 수사에 ‘정치적 의도’가 개입됐다는 주장도 쏟아냈다. <font color="#C21A1A"></font>는 2월6일치 사설에서 특검이 “박 전 대통령에게 더 심한 형을 가하려고 (뇌물 사건으로) 사건 구도를 바꾼 것”이라고 적었다. 또 “대통령이 기업을 겁박하고 강요한 사건을 기업의 뇌물 상납으로 바꾸기 위해 정부는 고비마다 재판에 개입했다”는 주장도 내놨다. 그 근거로 신문이 제시한 것은 “청와대는 재판 도중 캐비닛 문건을 찾아 특검을 통해 법원에 제출했고, 공정거래위원장이 이례적으로 증언대에 서 이 부회장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것 등이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특검 변질론’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애초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을 수사해야 하는 특검이 ‘불순한 의도’에 따라 삼성 특검으로 변질됐다는 것이다. 불순한 의도는 다름 아닌 ‘검찰 조직 보호’다. 최순실 국정농단을 예고한 ‘정윤회(최씨의 전남편) 문건’ 수사를 봐주기한 당시 검찰 수뇌부가 특검의 타깃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박영수 특검팀이 삼성을 ‘대체재’로 택했다는 것이다. 삼성 정도는 돼야 ‘검찰 봐주기’에 대한 비판 여론을 잠재울 수 있다고 판단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이는 검찰 고위 간부 출신인 박영수 특검을 비롯해 현직 검사들이 대거 참여한 특검팀의 태생적 한계와 맞물려 그럴듯하게 포장된다.
특검팀은 이를 “터무니없는 음해”라고 일축한다. 특검 관계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리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삼성을 비롯한 재벌들의 뇌물 공여 혐의가 드러났다. 만약 삼성을 수사하지 않았다면 특검이 직무유기를 했다고 비판했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 관계자는 재벌 가운데 이 부회장만 기소한 것에 대해서도 “삼성이 최씨에게 가장 많은 뇌물을 건넸을 뿐 아니라 가장 적극적이었다. 다른 재벌 총수들을 기소하지 않은 것은 수사 기간 연장을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 거부해 수사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반박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법관의 소신인가? 독단인가? </font></font>당시 특검이 도입된 배경도 과거 사례와 달랐다. 과거에는 검찰 수사가 외압으로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사건들을 독립적으로 수사하기 위해 도입됐다. 하지만 박근혜 국정농단 사건은 핵심 피의자가 검찰총장 인사권을 가진 현직 대통령이라는 점에서 처음부터 특검의 필요성이 제기됐고, 이런 공감대 위에서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결정됐다. 이처럼 정치적 중립성이 확보된 특검을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있다’고 공격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보수언론들이 이재용 항소심 판결을 근거로 박영수 특검팀을 공격하는 것은 법조계에서도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번 판결에 허점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삼성의 경영권 승계 플랜이 없었다’는 판단은 법관의 ‘소신’이 아닌 ‘독단’에 가깝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고법부장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이건희 회장을 비롯한 삼성 총수 일가가 과거 수차례 검찰 수사 대상에 올랐던 이유가 경영권 승계 때문이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삼성의 경영권 승계 이슈를 재판부만 모르고 있는 셈”이라고 꼬집었다.
항소심 재판부는 또 ‘박근혜 전 대통령이 삼성 승계 문제를 다룬 보고서를 읽었다는 것만으로 삼성의 승계 작업 추진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 판단도 그동안 1·2심 재판에 제출된 수많은 증거와 배치된다. 박 전 대통령에게 보고된 청와대 내부 문건 중에는 “정부에서 (삼성 경영권 승계 작업을) 도와줄 수 있다” “기업친화적인 현 정권 안에서 해결되길 바란다” 등의 표현이 있는 ‘대통령 말씀자료’가 있다. 이 자료는 대통령이 누굴 만나거나 행사에 참여했을 때 해야 할 말을 적은 것으로 대통령이 꼭 읽어본다.
이뿐만 아니라 항소심에는 삼성 경영권 이슈를 뒷받침하는 국정원 보고서가 증거로 추가 제출됐다. 하지만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재판부의 ‘증거 무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특검에 따르면 항소심에서 (1심 때 없었던) 330여 개의 증거가 추가로 제출됐지만, 판결문엔 이에 대한 언급이나 판단이 단 한 줄도 포함돼 있지 않다. 최씨의 딸 정유라씨에 대한 삼성의 승마 지원과 관련해 말 소유권이 삼성에 있다고 판단한 부분도 논란을 부른다. 박 전 대통령이 “(최씨에게) 좋은 말도 사줘라”고 이 부회장에게 직접 말한 것을 포함해 최씨의 소유로 볼 수 있는 증거가 재판에서 다수 제출됐기 때문이다.
반면 삼성을 말 소유권자로 보기 어려운 정황은 차고 넘친다. 말을 살 때는 말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는 게 가장 중요하지만, 박상진 삼성전자 전 사장을 비롯한 삼성 관계자들은 이에 대해 아무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정유라씨는 1심 재판에서 “비타나(말의 이름)가 관절에 이상이 있었지만 삼성 쪽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말을 산 뒤 나중에 다른 말로 교체할 때도 최씨가 희망하는 말로 교체했고 삼성 쪽은 조금도 관여하지 않았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특검 공소내용 대놓고 무시</font></font>항소심 재판부의 말 소유권 판단은 이번 판결이 이재용 부회장의 석방을 위한 ‘맞춤형 판결’이 아닌지 의심하게 하는 결정적 이유다. 최씨의 말 소유권이 인정되면 이재용 부회장의 뇌물과 횡령 액수가 늘어나고, 재산국외도피까지 인정돼 집행유예를 선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삼성 쪽 변호인들이 승마 지원을 이 부회장의 뇌물 공여 혐의에서 제외하기 위해 애를 쓴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변호인단은 검찰이 초기 수사 단계에서 삼성의 승마 지원을 알선수재로 판단했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2016년 12월7일 작성된 서울중앙지검 특수부의 범죄 인지서에 최순실씨 혐의가 알선수재로 돼 있음을 제시했다. 알선수재죄는 공무원의 직무에 관한 일을 알선해주는 대가로 돈을 받는 행위를 처벌하는데, 돈을 제공한 쪽은 처벌하지 않는다. 이런 구도에서는 삼성의 승마 제공은 애초에 죄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특검팀은 변호인단의 주장에 대해 “이 사건의 전개 과정을 잘 알고 있다면 할 수 없는 주장”이라고 반박한다. 검찰의 인지 수사 단계에서는 박 전 대통령과 최씨의 공모 관계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뇌물로 구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들의 공모 관계는 이후 특검 수사에서 확보된 여러 증거로 입증됐다.
항소심 재판부가 삼성의 승마 지원 비용과 관련해 재산국외도피를 인정하지 않아, 앞으로 생겨날 수 있는 ‘모방범죄’의 길을 터줬다는 지적도 나온다. 항소심 판결대로라면 재산을 외국으로 빼돌리더라도 ‘제3자’에게 주는 형식만 취하면 처벌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국부를 국외로 빼돌리는 것을 막으려고 만든 이 법의 취지를 훼손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어 보인다.
이 밖에 대법원 판례와 통설과 달리 ‘안종범 수첩’의 증거능력을 전면 부정하는 등 항소심 판결은 숱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항소심 재판부는 안종범 수첩의 증거능력을 부정하는 이유를 판결문에서 제대로 설명하지 않아 ‘특검의 공소 내용을 대놓고 무시했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특검팀은 항소심 재판에서 무려 3천여 쪽 분량의 의견서를 제출했으나 판결문에는 이에 대한 답변에 해당하는 언급이 거의 없다.
항소심 재판부의 이런 판단에 따라 이 부회장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이 결정을 놓고도 법조계에선 뜨거운 논란이 벌어졌다. 항소심 재판부가 유죄를 인정한 부분만으로도 이 부회장에게 충분히 실형을 선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법원 안에서도 이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 지방법원 부장판사는 “법의 형평성을 고려해 징역 2~3년의 단기형을 선고하는 게 더 적합했다고 생각하는 판사들도 있다”고 말했다. 실제, 이 부회장보다 훨씬 적은 뇌물(횡령) 액수로 실형을 선고받은 이들이 허다하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특검팀 “대법원에서 반드시 뒤집을 것” </font></font>법조계 일각에선 이번 항소심을 ‘특검 흔들기’로 해석하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감지되기 시작한 법원 내 보수세력의 ‘적폐청산’ 제동 걸기와 같은 맥락이 아니냐는 것이다. 특검팀도 이런 흐름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특검 관계자는 “그동안 특검 수사와 재판이 성공적으로 진행돼왔기 때문에 한번쯤은 제동이 걸릴 것이라고 예상은 했다”고 말했다. 특검팀은 이 부회장의 항소심 판결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고 있다. 이 관계자는 “이 부회장의 항소심 판결이 대법원에서 반드시 뒤집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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