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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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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의 민주주의의 첫발을 딛다

토론과 승복의 경험 심어준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

2박3일 합숙토론에 참여한 시민참여단 10명에게 묻다
등록 2017-10-24 14:24 수정 2020-05-03 04:28
김지형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 위원장(왼쪽 네 번째)은 10월20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정부를 상대로 ‘건설 재개’ 권고안을 발표했다.

김지형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 위원장(왼쪽 네 번째)은 10월20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정부를 상대로 ‘건설 재개’ 권고안을 발표했다.

“위원회는 현재 공사가 일시 중단 중인 신고리 5·6호기에 대해서 건설을 재개하도록 하는 정책 결정을 정부에 권고합니다.”

김지형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공론화위) 위원장은 10월20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정부를 상대로 이같은 권고안을 발표했다. 청와대는 곧바로 “공론화위의 뜻을 존중한다”며 “후속 조처가 차질 없이 이행되도록 정부는 최선을 다하겠다”고 화답했다. 이로써 공정률 29.5% 상태에서 7월14일 건설공사가 중단된 신고리 5·6호기 원자력발전소의 공사가 다시 시작되게 됐다.

“고3 이후 가장 열심히 공부했다”

공론화위는 문재인 대통령이 ‘탈핵 공약을 지키기 앞서 국민들 의견을 듣겠다’며 만든 여론조사 기구다. 7월24일 출범해 석 달간 ‘신고리 5·6호기 공사를 재개할지 중단할지’에 대해 총 4차례 여론조사를 했다. 우선 8월25일부터 9월10일까지 국민 2만 명을 대상으로 1차 여론조사를 했다. 여기서 나온 재개·중단 비율을 반영해 9월13일 시민참여단 500명을 구성하고 9월16일 이들을 대상으로 2차 여론조사를 했다.

시민참여단 500명 중 471명은 10월15일부터 17일까지 2박3일 동안 합숙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토론했다. 합숙토론에선 안전성·환경성·경제성 등으로 주제를 세분화해 전문가 발표와 질의응답, 분임토론을 했다. 합숙 시작과 끝에 471명을 대상으로 각각 3차·4차 여론조사를 했다. 공론화위는 마지막 4차 조사에서 건설 재개 쪽을 선택한 비율이 59.5%로 건설 중단을 선택한 40.5%보다 19%포인트 더 높게 나타났으며 이를 바탕으로 정부에 건설 재개를 권고한다고 밝혔다.

이번 공론화 과정은 시민대표들이 숙의 과정을 거쳐 국가의 주요 대사를 결정한 첫 모델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은 10월15일 오후 충남 천안 교보생명 연수원 계성원을 나서는 시민참여단 10명에게 간단한 소감과 연락처를 받은 뒤 전화로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합숙토론에 임했고 생각이 변한 계기는 뭔지, 공론화 과정에 대한 평가와 보완할 점은 뭔지 물었다.

인터뷰이 대부분은 시민참여단에 뽑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뻤다고 답했다. 조원영(39·인천)씨는 “역사적인 일에 참여할 수 있어 정말 뜻깊었고, 인생에 몇 번 있을까 말까 한 영광”이라고 답했다. 김선숙(가명·44·대구)씨는 “로또 확률이라는데, 내가 뽑힌 게 의아하고 자랑스러웠다”고 말했다.

합숙토론을 앞두고는 공론화위에서 받은 자료집과 영상강의 등을 보며 학구열을 불태웠다. 김씨는 “고3 이후 가장 열심히 공부했다. 합숙토론 때 신문사마다 기사를 다 오려서 스크랩을 해오신 분도 있었다”고 말했다. 송호열(57·서울)씨는 “지역순회토론회와 언론 토론회를 지켜보고 공론화위 홈페이지 토론방에 일반인이 쓴 글도 수백 개씩 읽었다”고 했다.

반면 처음에 부담 없이 접근했다가 합숙토론 막바지에 부담감을 느낀 사람도 있었다. 차완경(62·울산)씨는 “문재인 정부가 탈원전 정책을 밀어붙이려는 데 들러리 서는 것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가 중단 쪽과 재개 쪽이 심각하게 싸우는 것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그는 “결론을 미리 정해놓고 쇼하는 게 아니구나, 내 의견이 어느 정도 반영되는가보다”라고 마지막 날 생각이 바뀌었고 이때 “중압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인터뷰이 10명 중 원자력 분야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차씨 한 명뿐이었다. 나머지 9명은 시민참여단에 뽑히기 전까지 원전과 별다른 인연이 없었고 관심도 거의 없었다고 답했다.

이번 공론화의 승패는 3분의 1이나 되는 부동층을 누가 더 많이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10월20일 공론화위 발표를 보면 1차 조사에서 ‘판단 유보’를 택한 사람이 35.8%에 이르렀다. 건설 재개 응답(36.6%)이 건설 중단 응답(27.6%)보다 꽤 앞서 있었지만 부동층이 워낙 많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부동층을 잡아라

의 인터뷰에 응해준 10명 중에서도 자신이 애초 중립이었다고 밝힌 사람은 4명이었다. 이들은 석 달간 있었던 공론화 과정에서 최종 결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합숙토론’을 꼽았다. 중립이던 최찬웅(29·광주)씨는 “탈원전에는 동의하지만 시기상 지금이 적절한지 확신이 없었다”며 “합숙토론에서 전문가 발표와 질의응답, 분임토론을 거치며 결정했다”고 밝혔다.

주목할 점은 이미 생각을 굳힌 사람도 역시 합숙토론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이연상(37·서울)씨는 시민참여단에 선정되기 전엔 한쪽으로 생각이 확고했는데 합숙에서 반대편으로 흔들렸다가 다시 원래 생각으로 돌아왔다. 겉으로 보기엔 처음과 끝 결정에 변화가 없는 셈이지만 이씨는 “큰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처음에는 편협한 정보만 보고 막연히 그게 맞겠지 생각했다. 합숙토론에서 양쪽 주장을 다 듣고 보니 상대편도 이해되고 우리 쪽에서 보완할 점도 보였다”고 말했다.

이는 숙의형 공론화의 진짜 효과를 보여준다. 사실 표면적인 결과만 보면 합숙토론의 영향은 미미하다. 1차 조사와 4차 조사를 비교했을 때 결정을 정반대로 바꾼 사람은 7.5%에 불과하다(중단→재개 5.3%, 재개→중단 2.2%). 하지만 의견을 그대로 유지한 사람도 깊게 고민한 뒤 결정을 다시 내렸다는 점이 중요하다. 송호열씨는 “설령 똑같은 결정이 나오더라도 내면이 성숙한 상황에서 내린 결정은 다르다”고 지적했다. 그는 “공론화 과정을 거치니 내용에 대해 심도 깊게 알 수밖에 없었다. 잘 모르고 결정하는 것과 상당히 다르다”고 설명했다.

대다수가 장기적 탈핵 의견

합숙토론에는 재개-중단 양쪽 전문가들이 나와 시민참여단을 대상으로 치열한 여론전을 펼쳤다. 전략과 자료 준비 면에선 재개 쪽이 중단 쪽보다 우수했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중단 쪽인 최수지(43·가명·부산)씨와 조원영씨는 공통적으로 “중단 쪽의 자료 준비가 미비했고 주로 외국 사례를 들어 현실감이 없었다”고 말했다. 중립에서 중단으로 결정이 바뀐 신현정(41·충남 서산)씨도 “일부 중단 쪽 패널은 질의응답 때 너무 답변을 못해 안타까웠다”고 이야기했다.

특히 재개 쪽이 제기한 “당장 쓸 전기가 부족하다”는 설득 전략이 부동층에 영향을 미쳤다. 박정현(30대·가명)씨는 “처음에는 중립이었다. 토론을 들어보고 신고리 5·6호기가 없어도 전력이 넉넉하면 중단을 선택하려고 했다. 재개 쪽은 전력량을 언급하며 현안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하는데, 중단 쪽은 주로 장기적인 탈핵만 언급했다”며 재개를 택했다고 밝혔다. 실제 공론화위 발표 결과를 보면 건설 재개를 선택한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이유로 ‘안정적 에너지 공급’을 꼽았다.

반면 중단을 택한 사람들은 선택의 주요 이유로 ‘원전의 위험성’을 꼽았다. 신현정씨는 “합숙토론 전엔 신고리 5·6호기가 그렇게 원전·인구 밀집 지역에 생기는 건지 몰랐다. 원자력은 깨끗하고 미세먼지가 없어서 매력 있다고 생각했는데, 고준위 핵폐기물은 수백 년이 지나도 방사능이 안 없어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생각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한 가지 눈여겨볼 점은 재개를 택한 사람 중 상당수가 ‘장기적인 탈핵’에는 동의한다는 것이다. 공론화위 4차 조사에서 원전 축소에 동의하는 사람이 53.2%에 이른다. 현상 유지는 35.5%였고 원전 확대는 9.7%에 불과했다. 이런 여론을 의식했는지 재개 쪽 전문가들도 강연에서 “신고리 5·6호기 건설 재개는 탈핵과 다른 문제”라고 누차 강조했다.

시민참여단에서 9~10명씩 48개조로 나눠 진행한 분임토론에 대한 만족도는 높은 편이었다. 대부분 토론이 원활했고 모더레이터(진행자)가 공정했으며 규칙이 잘 지켜졌다고 답했다. 김선숙씨는 “모더레이터가 절대 자기 의견을 말하지 않았고 질문 의도를 이해 못하면 다시 설명해줘 만족스러웠다”고 말했다. 인터뷰이들은 발언 기회와 시간이 공정하게 돌아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실컷 했다고 답했다. 공론화 참여 기회가 다시 온다면 또 하겠다고도 했다.

다만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는 일부 참가자에 대한 불만은 나왔다. 박정현씨는 “주제에 상관없이 ‘좌파가 어쩌구’ 하는 생뚱맞은 주장만 반복하는 사람 때문에 토론 수준이 떨어졌다”고 말했다.

“내 생각과 달라도 승복하겠다”
공론화위 시민참여단에 들어가 합숙토론을 경험한 송호열씨(왼쪽)와 이연상씨. 박승화 기자/정용일 기자

공론화위 시민참여단에 들어가 합숙토론을 경험한 송호열씨(왼쪽)와 이연상씨. 박승화 기자/정용일 기자

토론 진행 과정에 대한 신뢰는 결과에 대한 신뢰로 이어졌다. 인터뷰이 전원이 “내 생각과 다른 결론이 나도 승복하겠다”고 답했다. 신현정씨는 “2박3일 동안 치열하게 이야기하면서 상대방의 결정도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하게 됐다. 그동안 경청하고 숙의했으니 결과가 나오면 받아들이고 따르는 게 맞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연상씨는 “선거처럼 국민들의 의견이 성숙하지 않은 상태로 결정하는 거랑도 많이 달랐다. 국민 뜻이 직접 반영되지 않는 대의민주주의와 사회적 비용이 큰 국민투표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제도였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인터뷰이들은 공론화가 ‘승패를 가리는 과정’보다 ‘합의점을 찾는 과정’에 가까웠다고 말했다. 실제 10월20일 발표된 결과를 보면 시민참여단이 집단지성으로 솔로몬의 해법을 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당면한 신고리 5·6호기 건설은 재개하면서도 장기적으로 탈핵으로 가자는 결정을 내렸다. 더불어 건설 재개에 따르는 대안 조처가 필요하다는 점에 공감했다. 대안 조처로는 원전의 안전기준을 강화하고(33.1%), 신재생에너지 투자를 확대하며(27.6%), 사용후핵연료 해결 방안을 되도록 빨리 마련해야 한다(25.3%)는 응답이 차례로 높은 비중으로 나왔다.

공론화 과정이 완벽하진 않았다. 인터뷰 과정에 아쉬웠던 점도 쏟아졌다. 인터뷰이들은 가장 큰 문제로 ‘팩트 체크 없음’을 꼽았다. 송호열씨는 “전문가 자료집·발표 중에 부정확하거나 왜곡된 정보가 많았는데, 지적을 해도 바꾸지 않고 끝까지 갔다”고 비판했다. 이연상씨도 “사람들이 손석희 JTBC 사장을 진행자로 데려와서 양쪽 주장을 검증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서로 데이터가 달라 혼란스러웠다”며 “공론화 위원들이 좀더 적극적으로 팩트 체크를 해줬으면 좋았을 것 같다”고 지적했다.

2박3일 합숙 짧아… 당사자 참여 비중 높여야

시민참여단에 대한 부정적 시선도 부담스러운 부분이었다. 김선숙씨는 “인터넷을 보면 우리가 사례비 85만원에 혹해서 왔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난 몸살이 날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는데 그런 이야기를 들어 속상했다”고 말했다. 최찬웅씨도 “친구들한테 시민참여단을 간다고 이야기했을 때 잘 몰랐고,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들 모아놓고 하는 거 아니냐는 오해도 많았다. 이런 오해가 있으면 결정이 나더라도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공론화 과정과 시민참여단에 대한 홍보가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이외에도 결정을 내리기에는 2박3일의 시간이 너무 짧았다는 의견, 원전 근처 지역 주민이나 원전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참여 비중을 좀더 높여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변지민 dr@hani.co.kr
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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