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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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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리 중단되면 잔치할 기다”

밀양 송전탑 투쟁이 탈핵으로 도약하기까지…

밥 먹이며 싸워온 할매들이 있었다
등록 2017-10-13 00:00 수정 2020-05-03 04:28
9월21일 서울 은평구 불광동 성당에서 열린 ‘탈핵·탈송전탑 토크콘서트’에 참석 한 한옥순씨(왼쪽)와 박후복씨. 한씨는 토크콘서트 발언은 미리 준비하지 않는다며 “누가 자꾸 잘해라, 어떻게 해라 시키면 아무것도 말이 안 된다. 가만 놔두면 그대로, 내가 겪은 그대로 말을 할 수 있다”고 했다.

9월21일 서울 은평구 불광동 성당에서 열린 ‘탈핵·탈송전탑 토크콘서트’에 참석 한 한옥순씨(왼쪽)와 박후복씨. 한씨는 토크콘서트 발언은 미리 준비하지 않는다며 “누가 자꾸 잘해라, 어떻게 해라 시키면 아무것도 말이 안 된다. 가만 놔두면 그대로, 내가 겪은 그대로 말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지난 9월21일 저녁 서울 은평구 불광동 성당, 가톨릭 미사가 집전돼야 할 성전에서 은평탈핵연대가 주최한 ‘탈핵 토크콘서트’가 열렸다. 이날 가톨릭 신부가 미사를 집전하는 제대 위에 오른 탈핵운동가는 경남 밀양 할매, 한옥순(70)씨와 박후복(77)씨였다. 신자석에 앉은 참석자들은 십자가에 매달려 수난당하는 예수 대신 마이크를 잡은 ‘밀양 할매’들을 봤다.

엄마·할매들의 후손을 위한 연대

한씨는 밀양의 수난 대신 탈핵의 절실함을 호소했다. “울산, 부산, 양산 밑에 지진대가 쫙 깔리갖고 있습니다.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을 버릴 데가 없습니다. 서울은 괜찮느냐, 원전이 터지면 먹거리가 하나도 없어집니다. 다 죽습니다.” 박씨는 딱 한마디만 했다. “죽을 때까지 더 할 깁니다. 13년을 해왔는데 13년을 더 할 깁니다.”

신고리 핵발전소에서 생산한 전기를 대도시로 나르기 위한 765kV 초고압 송전탑 69기 전부가 밀양 땅에 기어코 들어선 것이 2014년 9월, 이미 3년이 훌쩍 지나버린 일인데도 이들은 무언가를 희망하고 있었다. 한씨가 마이크를 다시 잡았다. “목숨 걸고 죽을 때까지 원전 반대해서 아이들, 우리 후손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 하려고 밀양 할매·할배들은 그리 결심하고 죽을 때까지 이렇게 알리고 사람들한테 우리 후손들한테 많이 알릴 겁니다.” 은평구민들이 한국 사회 최고령 탈핵운동가들에게 박수를 쏟아냈다.

이날 탈핵 토크콘서트 참가자에는 여성이 많았다. 밀양 할매도 여성이었고, 성당 신자를 비롯해 은평구 엄마들이 모여 만든 환경단체 ‘지구지킴이에코맘’ 회원 등 참석자 다수가 여성이었다. 엄마이면서 할머니인 여성들에게 탈핵은 전문 지식이 없어도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주제인 것 같았다. 탈핵 행사 전반부, 김익중 동국대 의대 교수(전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가 방사능 오염을 유의해야 할 농수산물을 이야기할 때였다. 적잖은 여성들이 가방에서 볼펜과 메모지를 꺼내 이를 받아적었다.

행사가 끝난 뒤 만난 불광동 성당 신자 조성환(69)씨는 밀양의 ‘탈핵탈송전탑원정대’(탈탈원정대)가 제작한 탈핵 소책자 을 10권 정도 손에 들고 있었다. “친구들하고 우리 딸들과 애들에게 나눠주려고요. 내가 평소에도 (핵발전소에) 반대했지만 확실하게 이야기를 못하겠더라고요.” 미리 연습해보시라고 하자 그는 밀양 할매들과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다 늙었으니까 이제 죽어도 괜찮지만 우리 새끼들, 손자·손녀들을 위해서 지으면 안 된다.” 그의 가장 어린 손자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여성’이라는 단어는 강압적 국책사업에 반대한 밀양 투쟁이 탈핵운동으로 ‘도약’(점핑)한 사회현상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열쇳말이다. 2012년 3월 최초의 ‘탈핵희망버스’가 시민 1천여 명을 밀양으로 실어 날랐다. 그해에만 탈핵희망버스가 네 번 더 밀양으로 향했다. 2005년부터 시작된 밀양 투쟁에서 밀양 할매가 아이콘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이때다. 한국 사회가 탈핵의 가치를 발견한 밀양에 할매, 바로 여성들이 있었다.

“남자들이 두들겨 팰까봐 나섰던 거야”

“한국전력과 물리적 충돌이 본격화한 2011년 가을부터 2014년 마지막 행정대집행까지 매일 산을 오르내리고 산 위 농성장에 상주하며 공사를 저지하기 위해 온몸을 던진 것은 대부분 여성 주민이었다.”(, 김영 부산대 사회학과 교수)

2014년 6월8일 문재인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과 상동면 여수마을 주민의 간담회에 나온 70대 남성 주민도 밀양 할매들의 공을 인정했다. “남자들은 다 허새비(허수아비)다. 사실은 여자들이 싸움 다 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 있는 여자들한테 되게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한다.”(김영 교수)

9월21일 불광동 성당의 탈핵 토크콘서트가 끝난 뒤 숙소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만난 한옥순씨와 박후복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처음에는 아버님들(남자들) 앞장세울라 카이께네 (경찰이) 계속 사진을 찍고, 한전이 끌어낼라 카고 하니까 남자들이 (경찰과 한전을) 두들겨 패겠더라고. 폭행죄로 들어가겠더라고. 그래서 남자들을, 할배들을 뒤로 제치고 우리가 나섰던 거야, 처음에. 그래서 이래 됐어.”

부산대 여성연구소장이기도 한 김영 부산대 교수(사회학)는 밀양이 탈핵으로 확장돼 현재까지 이어지는 동력을 ‘할매’의 여성성에서 찾는 대표적 연구자다. “2013년 5월께 한옥순 어머니가 제일 먼저 경찰이 잡지 못하게 옷을 벗으니까 같은 마을에 사는 사라 할머니가 같이 옷을 벗었어요. 사라 할머니는 당시 여든이 넘었고, 평소 성격을 생각하면, 옷을 벗은 게 매우 놀라운 일이었어요. 이런 엄청난 행위에 대해 ‘젊은 니가 경찰이 못 잡게 옷 벗고 설치는데 내가 그 옆에서 우짜겠노’라고 하시거든요. 관계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여성들의 돌발적이지만 강력한 저항은 누군가 계획하고 지도하는 방식의 운동에선 나올 수 없어요. 1976년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이 경찰의 파업 강제 진압에 맞서 옷 벗고 누울 때도 옷을 벗자는 규칙 같은 건 없었어요. 안 잡혀가려 울고불고 악쓰다 옷을 벗으면 경찰이 어쩌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거죠.”

손주뻘인 전경들과 대치하며 알몸을 내보이고, 농성장 진입을 막는 전경 다리 사이로 기어 들어가는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일에도 밀양 할매들은 거리낌이 없었다. “자녀들을 먹여살리기 위해서라면 어떤 비루하고 모욕적인 일이라도 할 수 있는,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해온, 식민지배와 전쟁으로 얼룩진 한국 현대사를 살아내온 어머니들 모습의 상징처럼 느껴졌다.”(김영 교수)

9월21일 인터뷰 당시 ‘옷을 벗고 땅굴에서 시위한 것을 누가 처음 시작했는지 기억나시냐’는 기자의 질문에 한옥순씨는 대답을 당장 찾지 못했다. “처음에 그런 생각 아무도 없었는데, 계속 먹고 자고 하다가 보니 우리가 얘기하다보니까, 연구가 그래 나온 기라. 함께 계속 같이 잤다 아이가. 자고 밥 먹고, 자고 이야기하고, 자고 데모하고.” 밀양 투쟁 당시 벌목 현장에 가서 나무들을 꼭 끌어안는 ‘한국판 칩코운동’(1973년 인도 여성들이 벌목을 저지하기 위해 나무를 끌어안은 여성운동이자 환경운동. 칩코는 힌두어로 ‘껴안다’라는 뜻)의 계기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도 똑같은 반응이었다. “하자고 한, 그런 게 없다니까, 우리는. 그냥 보면 그기 떠오른다니까. (옆의 박후복씨를 가리키며) 사모님이 전기톱을 깔고 앉아 있으면, 그걸 보고 또 우리가 따라서 그렇게 한다니까. 하자 이렇게 해갖고는 안 되는 기다.”

100명, 200명 먹이며 투쟁
밥, 할머니, 아들, 연대, 엄마…. 밀양 할매들의 언어 속에 탈송전탑 운동이 탈핵운동으로 도약한 비밀이 숨어 있다. 데이터 분석/ 변지민

밥, 할머니, 아들, 연대, 엄마…. 밀양 할매들의 언어 속에 탈송전탑 운동이 탈핵운동으로 도약한 비밀이 숨어 있다. 데이터 분석/ 변지민

김영희 연세대 교수(국문학)가 국사편찬위원회 기록사업의 하나로 진행한 밀양 할매(10명)·할배(5명)의 구술 녹취록을 이 언어 분석한 결과에서도 할매들의 행위 특성을 엿볼 수 있다. 빈출 상위 150개 단어 가운데 양쪽에서 똑같이 나타나는 중복단어 101개를 제외하고 남은 41개 단어를 살펴보면 밀양 투쟁을 해석하는 성별 차이가 나온다. 할배들이 △도장 △반대 △시장 △전자파 △찬성 △피해 등 사건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단어를 사용한 반면, 할매들은 △밥 △아들 △엄마 △연대 △학생 △할머니 등 자기 자신을 주체로 인식하거나 관계와 관련된 단어를 사용했다. 김영희 교수는 “구술에서 ‘엄마’는 주로 외부 연대 여성을 가리키고, ‘할머니’는 반대운동에 참여하신 여성 어르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연대라는 말과 함께 이런 단어가 주로 쓰인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가부장제가 공고한 농촌 사회에서 남자들이 절대 못하는 일이 또 하나 있다. ‘밥하는 일’이다. 최서영 미국 스테트슨대학 커뮤니케이션학과 조교수는 자신의 박사논문에서 밀양 송전탑 투쟁에서 ‘밥’이 갖는 의미를 분석했다. “자원이 부족한 지역에서, 그것도 인기가 없는 에너지 문제와 관련한 밀양 투쟁이 어떻게 이렇게 오래 지속될 수 있나 신기했어요. 현장연구를 하면서 발견한 것은 밀양에 연대하러 오는 연대자들의 부채감이었어요. 착한 사람 한두 명의 멘트가 아니라, 그런 멘트가 반복되니까 사회적 현상이라고 봤죠.” 최서영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연대자들이 느낀 부채감은 할매들의 ‘밥’에서 나왔다.

밀양 투쟁에서 밀양 할매들은 ‘투잡’을 자처했다. 밤낮으로 송전탑 건설 현장의 농성장을 지키면서도, 끼니때마다 연대자들을 먹이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1500여 평 부지에 들어선 박후복씨의 전원주택은 당시 밀양 투쟁의 ‘베이스캠프’나 마찬가지였다. 9월21일 차 안에서 이뤄진 인터뷰에서 한옥순씨와 박후복씨가 말했다. “100명, 200명도 재우고 먹였다. 사모님하고 우리 둘이서 새벽에 일 나가 밥하고 국하고 딱 준비해 가면, 저그(연배 낮은 마을의 다른 여성 주민)는 와서 기계처럼 착착착 담아갖고 가서 챙겨 먹이고 했지.”

관절 수술도 미루고 ‘원전 중단’ 염원

9월21일 토크콘서트를 마치고 숙소로 가는 차 안에서 한옥순씨는 많이 불편해했다. “한 달 전에 걸음이 안 걸어지는 기라. 너무 많이 쫓아댕기고 그라니까. 창원 병원에 8월 수술 날짜를 받아놨는데, 공론화가 나온 기라. 이때까지 12년을 싸웠는데, 이기 백지화 안 되면 물거품으로 돌아가니까. 내가 수술하면 석 달 동안 꼼짝도 못하는 기라. 가만히 누워갖고 스트레스 받는 것보다, 최선을 다해갖고 안 되면 모르지만은 해야 되겄다 싶어갖고 예약 취소를 해갖고. 지금도 계속 문자 온다. 빨리 수술해라꼬.”

할매들은 여전히 누군가를 먹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10월 공론화위원회에서 신고리 원자력발전소 5·6호기 건설 중단이 나면 오래 잔치를 벌일 거라고 했다. “소 잡고 잔치할 기다. 소 잡아갖고 몇 날 며칠 고아갖고 연대한 사람들 몇 날 며칠로 불러갖고. 서울팀 하루 왔다 가고, 부산·울산 이래 해서 다 할 기다.”

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데이터 분석 변지민 기자 d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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