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25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운명이 결정된다. 풀려나 집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서울구치소로 되돌아갈 것인가. 서울중앙지법 형사27부(재판장 김진동)는 이날 오후 2시30분 이재용 부회장 등 뇌물공여 혐의로 기소된 삼성그룹 임원 5명의 선고공판을 연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미래전략실이 죄 뒤집어쓰는 전략</font></font>8월7일 열린 결심공판에서 박영수 특별검사는 이 부회장에게 징역 12년을 구형했다. 박 특검은 이재용 부회장과 삼성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재판 과정에서 나타난 피고인들의 태도로 볼 때 1등 기업 삼성이 국가와 국민을 위하기보다는 그룹 총수만을 위한 기업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다.” “이재용 피고인은 범행으로 인한 이익의 직접적 귀속 주체이자 최종 의사결정권자인데도 범행을 전면 부인하면서 다른 피고인들에게 책임을 미루고 있다.” “이재용의 지시에 따라 범행에 가담한 삼성 관련자들은 이재용의 범행 은폐를 위해 적극적으로 허위 진술을 하고 있다.” 박 특검은 최지성 전 부회장, 장충기·박상진 전 사장에게 각각 징역 10년을 구형했다.
구형량이 높은 이유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가법)의 재산국외도피 혐의가 적용됐기 때문이다. 재산 도피액이 50억원을 넘으면 ‘무기징역 또는 징역 10년 이상’에 처하도록 돼 있다. 이재용 부회장에게 적용된 혐의는 크게 5가지다.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의 뇌물공여 혐의는 법정형이 ‘징역 5년 이하 또는 벌금 2천만원 이하’, 특경가법의 횡령 혐의는 ‘무기징역 또는 징역 5년 이상’이다. 박영수 특검은 “피고인들이 허위 진술을 하는 등 법정형보다 낮게 구형할 사정을 찾기 어렵다”고 밝혔다. 박 특검의 입에서 ‘징역 12년’이 튀어나온 순간, 서울중앙지법 417호 형사대법정 곳곳에선 삼성 관계자들의 낮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다 제 책임입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울먹이며) 창업자이신 선대회장님, (말을 잇지 못하다가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그리고 삼성을 글로벌 기업으로 키우신 회장님의 뒤를 이어가다 (다시 물을 마신 뒤) (중략) 이거 한 가지만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 사익을 위해서 대통령에게 뭘 부탁한다든지 그런 기대는 결코 없었습니다.” 이재용 부회장은 초록색 노트에 미리 적어온 최후진술을 읽는 내내 떨리는 목소리로 울먹였다. 억울한 마음도 토로했다. “삼성물산 합병으로 제가 국민연금에 엄청난 손해를 입히고 개인이 막대한 이익을 취했다는 의심을 하고 있습니다. 결코 아닙니다. 제가 아무리 부족하고 못난 놈이라도 서민들의 노후 자금인 국민연금에 손해를 끼치고 제가 욕심을 내겠습니까. 너무나 심한 오해입니다. 정말 억울합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무능 이미지’라는 치명적 부메랑 </font></font>이재용 부회장 변호인단은 ‘세기의 재판’에서 이기기 위해 몇 가지 전략을 펴고 있다. 하나는 최지성 전 부회장 등 미래전략실 임원들이 모든 죄를 뒤집어쓰는 전략이다. 이재용 부회장은 “몰랐다”는 것이다. 변호인단은 그동안 재판 과정에서 최지성이 이재용의 ‘멘토’이기 때문에 이 부회장에게 모든 정보를 꼬박꼬박 보고하지 않았다고 주장해왔다. “이재용은 뭔가 잘못된 듯한 느낌을 받더라도 최지성을 질책하거나 꼬치꼬치 캐물을 수 있는 그런 관계가 아니다.” “이재용은 이건희 와병 이후에 최지성이 얘기해주긴 하지만 최종 의사결정은 최지성이 한다고 (특검에서) 분명하게 진술했다.” 최지성 전 부회장 역시 이날 최후진술에서 “최순실의 농단으로부터 회사를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재용을 위한 것으로 생각한 적도 없다. 만약 삼성에 책임을 묻는다면 늙어 판단력이 흐려진 저에게 책임을 물어달라”고 했다.
이렇게 주장하는 까닭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이재용 부회장의 세 차례 단독 면담에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를 입증할 결정적 증거나 진술이 부족하다고 변호인단이 확신하기 때문이다. ‘비밀의 커튼’ 뒤에 숨는 전략이다. 삼성 쪽 변호인단은 결심공판에서 “대통령은 면담에서 한 번도 정유라를 언급한 사실이 없다. 승마 지원은 대통령의 요청 때문이 아니라 최서원(최순실)의 강요 내지는 공갈에 의한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청와대 민정수석실 캐비닛에서 발견된 ‘삼성 경영권 승계 국면→기회로 활용’이라고 쓰인 문건도 행정관이 인터넷 검색을 통해 작성한 자료일 뿐, 박근혜가 이재용에게 직접 말하지는 않았다고도 했다.
반면 특검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고질적인 정경유착 범죄” “독대 자리에서는 뇌물을 주고받기로 큰 틀의 합의를 하고 그에 따라 삼성 주요 계열사와 정부 부처 등이 동원돼 구체적인 내용들이 정해지면서 진행된 범행”이라고 분명히 못 박았다. “대통령이 뇌물공여 기간 중에 경영권 승계 현안인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신규순환출자 고리 해소 문제, 엘리엇 대책 방안 마련 등과 관련해 실제 도움을 준 사실까지 입증”되었기 때문에 유죄의 증거는 충분하다는 논리다.
특검은 “증거가 차고 넘친다”고 주장하고, 변호인단은 “무죄 추정 원칙을 번복할 만한 아무런 증거가 없다”고 맞서는 형국이다. 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최근 10년 새 법원의 판결 경향을 보면 임원들이 총알받이로 나서 ‘재벌 총수들에게 보고를 하지 않았으므로 무죄’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범죄로 인한 경제적 이익이 궁극적으로 귀속되는 주체가 총수들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변호인단은 이재용 부회장이 뇌물공여 사실 자체를 몰랐다는 주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승계 작업’이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았다고까지 주장한다. 이재용 부회장은 ‘무지의 베일’ 뒤로 숨었다. 큰 논란이 됐던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건에 대해 “당시에 양사의 업무에 대해 잘 몰랐고 합병도 사장님들과 미전실이 했다. 제가 함부로 개입할 것이 아니고 다 전문가들이 알아서 열심히 해주실 것이라고 생각했다”(8월2일 공판 피고인신문)는 것이다. 이 부회장은 최후진술 때도 “지난 몇 개월 재판 과정을 지켜보며 복잡한 법적 논리도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이른바 “삼성의 ‘우리 부회장은 바보’ 전략”(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YTN 라디오 인터뷰)이다. 설사 무죄를 선고받거나 집행유예로 풀려나더라도 이재용 부회장의 ‘무능’ 이미지를 강화하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점에서 치명적인 전략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지음 관계” 해괴 논리로 무죄 선고</font></font>법조계의 한 고위 인사는 “지금까지 드러난 증거와 정황들로 볼 때 무죄나 집행유예가 선고되긴 쉽지 않을 거다. 다만 우려스러운 것은 재판부다”라고 말했다. 재판을 맡은 김진동 부장판사는 진경준 전 검사장이 김정주 넥슨 대표에게 공짜 주식을 받아 120억원이 넘는 차익을 남긴 사건에서 뇌물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바 있다. 무죄 이유로 두 사람이 “일반적인 친한 친구 사이를 넘어 서로 지음(知音)의 관계에 있다고 보인다”는 해괴한 논리가 등장했다. ‘비밀 커튼’ 뒤에서 이뤄진 이재용과 박근혜, 최순실의 삼각관계에 대해 재판부는 과연 어떤 답을 내놓을까.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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