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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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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계 블랙리스트의 진실, 이제 시작이다

정부와 문화예술계 손잡고 꾸린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

민주주의 말살한 ‘박근혜식 통치’의 본질 파헤친다
등록 2017-08-09 01:14 수정 2020-05-03 04:28
김봉규 기자

김봉규 기자

블랙리스트에 담긴 예술인을 정부 지원 대상에서 배제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김종덕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재판정에서 “장관으로 오기 전부터 정부 차원의 정책으로 블랙리스트가 실행되고 있었다”는 취지로 증언했다. 이는 박근혜 정부에서 작성된 블랙리스트가 단순히 문체부 차원의 ‘지원 배제 명단’이 아닌 국정 기조로 작동했다는 의미다. 김 장관의 설명이 맞다면, 블랙리스트는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말살한 ‘박근혜식 통치’의 증거물로 이해하는 게 옳다.

블랙리스트 사소하게 본 재판부

하지만 블랙리스트 사건 1심 재판부는 명단의 맥락을 전혀 다르게 봤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0부(부장판사 황병헌)는 7월27일 “박근혜 전 대통령은 보수주의를 표방하며 당선했고, 보수주의를 지지하는 국민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좌파에 대한 지원 축소와 우파에 대한 지원 확대’를 표방한 것 자체는 ‘헌법이나 법령에 위반된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김종덕 전 장관의 진술과 재판부의 판단 사이엔 건널 수 없는 심연과도 같은 차이가 있다. 블랙리스트 실행자는 그 작업이 ‘대한민국 헌정 질서를 부정하고 권위주의 정부 시절로 회귀’하려던 국정 기조 자체라고 받아들여 거부조차 하지 못했다는데, 재판부는 ‘보수 정부가 그럴 수는 있다’ 정도의 ‘사소한’(!) 문제로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다수 문화예술인들은 블랙리스트 사건은 이제 시작됐을 뿐이라고 말한다. 본인 이름이 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던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보수 정부에선 상상도 할 수 없던 위원회가 꾸려졌다. 문화체육관광부와 문화예술계는 함께 손잡고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이하 진상조사위)를 출범시켰다. 도종환 장관과 민간의 신학철 화가가 공동위원장을 맡고, 진상조사소위원회·제도개선소위원회·백서발간소위원회 3개 위원회에 21명의 위원을 갖췄다. 위원 21명 가운데 문체부가 추천한 이는 5명밖에 되지 않는다. 은 지난 8월2일 진상조사위 제도개선소위 분과장을 맡은 이원재 문화연대 문화정책센터 소장(사진)을 만났다.

문화계 입장 전폭 수용된 진상조사위블랙리스트의 수사와 감사가 모두 이뤄진 상태에서 굉장히 이례적인 위원회가 만들어졌다.

블랙리스트 문제는 탄핵 정국에서도 초반에 관심이 덜했다. 문화예술계가 농성하고 정부에 진상 조사를 촉구하며 여기까지 왔다. 특별검사팀이 블랙리스트를 본격 다루기 시작한 뒤 탄핵이 이뤄졌고 대선이 치러졌다. 대선 기간에 문화예술계는 자체 간담회를 통해 차기 정부에 △블랙리스트 진상 조사 △행정 혁신 △민간 참여 협치 구조 마련을 요구하기로 결정했다. 문재인 정부는 이 제안에 응했고, 도종환 장관은 취임식 때 ‘블랙리스트 진상 조사를 하겠다’고 했다. 장관의 말이 떨어지자 문체부는 바로 위원회를 만들자고 했지만, 상호 신뢰가 없던 상태라 장관의 의지를 넘어서는 절차를 보장받으려 했다. 그렇게 준비 태스크포스(TF)가 만들어졌다. 문화예술 단체 300여 개와 문화예술인 8천여 명의 의견을 모았다.

문체부 공무원에겐 자신들의 내부를 도려내는 권한을 민간에 준 셈인데, 구성 작업은 원만했나.

처음엔 간극이 컸다. 그러나 대부분 민간의 입장이 전폭 수용됐다. 장관의 의지에 공무원들이 움직였다고 할까. (웃음) 문체부 내에서도 ‘마른자리 진자리 가릴 상황이 아니다’라는 인식이 있었다. 물론 내부적으론 힘들어한다. 하지만 블랙리스트는 부서 해체 얘기가 나올 정도로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에 지금은 문체부가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무엇을 선택할 상황이 아니라 하루빨리 문제를 해결해야 할 상황이라고 설득했다. 문체부는 진상조사위 위원 21명 가운데 당연직 4명을 제외하고 딱 1명만 추천했다. 나머지는 민간 추천 위원이 그대로 수용됐다. 민간 위원 가운데 1명은 윗선의 블랙리스트 지시 이행을 거부하다 옷을 벗었던 공무원이다.

활동 범위는.

아직 첫 회의만 해서 합의한 것은 아니지만, 박근혜 정부에서 있었던 문화예술 관련 문제 전반이라고 생각한다.

내부 자료 열람, 내부자 조사, 산하기관 조사 모두 가능한가.

물론 조사권은 없다. 하지만 다 가능해야 하고 가능할 것이다. 외부에선 감사원 감사도 있었고 재판도 했는데 더 파헤칠 진상이 있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법은 가장 좁은 의미의 합의 구조일 뿐이다. 법원과 감사원은 블랙리스트 기획 과정과 직접적 가담자만 가려냈을 뿐이다. 블랙리스트의 본질은 누가 직권을 남용했고 직무유기를 했느냐가 아니다. 문화적 측면에서 그 정책들이 어떻게 기획돼 효과를 미쳤는지 살펴야 한다. 현장의 증언이나 내부 제보가 더 있을 것이라고 본다. 지금까지는 책임자들을 집중적으로 다뤘지만 콘텐츠 영역에서 블랙리스트가 어떻게 작동됐는지는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 부분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 이유는 블랙리스트 기획이 국가정보원 조사 보고서를 통해 시작됐기 때문인 측면이 크다. 부서의 벽도 넘을 수 있나.

맞다. 특검도 국정원은 안 건드린 측면이 있다. 지금은 정권이 교체됐고, 국정원 TF도 구성됐기 때문에 적절히 협력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국정원 TF 쪽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관료주의가 블랙리스트 사태의 핵심블랙리스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화이트리스트란 지적도 있다.

블랙리스트가 김기춘식 이념 정책의 일환으로 진행된 ‘피해 구조’의 문제라면, 화이트리스트는 ‘부패 구조’의 문제다. 동전의 양면이므로 함께 조사해야 한다. 블랙리스트가 이념 정책이라면 화이트리스트는 이념을 영특하게 이용한 이익 추구 문제다. 아직 이 부분의 수사는 본격화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블랙리스트의 본질은 무엇인가.

세 가지다. 첫째, 문화예술 분야에 대한 우파들의 트라우마다. 왜 유명한 예술인은 다 좌파냐, 권력을 잡았는데도 문화예술계는 왜 우경화되지 않느냐는 우파들의 조바심을 반영한다. 둘째는 이권이다. 과학기술 정책은 개입하기 어렵지만 슬프게도 문화예술 정책은 개입하기 쉽다. 권력 가진 이들은 문화예술을 이권으로 봤다. 마지막으로, 사회를 통제하려는 욕구다. 그리고 이 모두를 관통하는 게 한국의 관료주의다. 한국 관료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했다. 자기가 실정법을 위반하고 헌법을 유린하는지도 모른 채 명단을 작성해 엑셀 프로그램으로 저장했다. 국가고시를 통과한 엘리트들이 최소한의 공공윤리, 직업의식도 없는 수준이란 게 이번 사태의 핵심이다.

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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