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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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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셋 증세’의 함정

조세 저항 의식해 공약보다 후퇴한 문재인 정부-민주당의 세제개편안

로드맵 없는 ‘증세’ 논의… “더 강력한 부자 증세와 누진 증세 필요”
등록 2017-08-01 15:17 수정 2020-05-03 04:28
문재인 대통령은 7월27일 저녁 청와대로 주요 기업인들을 불러 수제맥주를 함께 마시는 자리를 마련했다. 기업의 애로사항을 듣는 한편 비정규직 정규직전환, 최저임금과 법인세 인상 등의 이슈를 염두에 둔 만남이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은 7월27일 저녁 청와대로 주요 기업인들을 불러 수제맥주를 함께 마시는 자리를 마련했다. 기업의 애로사항을 듣는 한편 비정규직 정규직전환, 최저임금과 법인세 인상 등의 이슈를 염두에 둔 만남이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장면1

“세금 얘기 나오면 국민 지지는 하루아침에 어려워지는 것 아니겠느냐. 아직 세금 더 내라는 말은 아니고 ‘한번 생각해보자, 연구해보자’는 것이다.”(2006년 3월23일 ‘국민과의 인터넷 대화: 양극화 함께 풀어갑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6년 신년연설에서 “양극화 해소를 위해서는 많은 재원이 필요하다”며 ‘증세’ 뜻을 내비쳤다가 논란에 휩싸이자 답답함을 토로했다. 참여정부 첫해인 2003년 법인세를 2%포인트(과세표준 1억원 초과 기업 27%→25%) 낮췄다가, 집권 후반기 증세 쪽으로 물꼬를 바꾸려 했으나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합부동산세를 놓고도 노무현 정부는 ‘세금 폭탄’이라는 뭇매를 맞았다.

주도면밀 아닌 ‘갑툭튀’#장면2

“원점에서 다시 검토해달라. 서민경제가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인데 서민과 중산층의 가벼운 지갑을 다시 얇게 하는 것은 정부가 추진하는 서민을 위한 경제정책 방향과 어긋난다.”(2013년 8월12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 박근혜 전 대통령은 불과 나흘 전인 8월8일 정부가 발표한 세법개정안을 손바닥 뒤집듯이 바꾸자고 했다. 근로자 소득공제를 세액공제로 전환해 2조5천억원의 세금을 더 걷겠다는 계획이 ‘유리지갑 털기’라는 분노를 불러일으킨 탓이다. ‘증세 없는 복지’라는 대선 공약을 이행하기 위해 대기업 법인세는 손대지 않고 월급쟁이들만 건드린다는 비판에 정부는 한발 뒤로 물러서 과세 구간의 기준선을 높였다.

세금 문제는 항상 ‘정치’의 문제다. 진보든 보수든 역대 정부에서 ‘증세’는 풀리지 않는 숙제였다. 고소득층이든 중산층이든 세금을 더 내라는데 좋아할 사람은 없다. 전세계 모든 곳에서 ‘세금’은 저항 심리를 불러일으키는 단어다.

문재인 정부가 ‘증세 정치’라는 시험대에 올랐다. 문 대통령 취임 70여 일 만이다. 증세 논의는 예상보다 이른 시점에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기획재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7월27일 당정 협의를 열어 ‘2017년 세법개정안’을 논의했다. 논의 결과는 8월2일 최종 확정 발표된다. 대통령 지지율이 70% 이상 고공 행진하는 집권 초기에 정치적 동력을 바탕으로 증세라는 난제를 풀겠다는 의지를 감안해도 지나친 속도전에 숨이 가쁘다.

이에 앞서 문재인 대통령이 7월21일 “(전날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제시한) 소득세·법인세 증세 방안에 대해 기획재정부에서 충분히 반영해 방안을 마련해주기 바란다”고 지시했다. 그로부터 겨우 일주일 만에 증세의 윤곽이 잡혔다.

청와대와 정부는 주도면밀한 사전 시나리오에 입각해 증세 논의에 불을 지핀 걸까? 이 국정기획자문위원회와 정치권 관계자 등을 취재한 내용을 종합해보면 그럴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로드맵’이 있었다기보다는 갑작스레 물꼬가 트인 것에 가깝다.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그동안 “세율 인상은 없다”고 말해왔다.

공약 후퇴 비판에 총대 멘 여당

일주일 전으로 시계를 돌려보자. 7월19일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 영빈관에서 ‘100대 국정과제 정책콘서트’를 열고 국정기획자문위가 마련한 ‘국정운영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향후 5년간의 이정표가 될 계획안에서 2018~2022년 국정과제 실현에 소요될 재원을 178조원으로 제시했다. 사업 간 투자 우선순위를 조정하는 방식으로 95조4천억원을 아끼고, 세수 자연증가분(60조5천억원)과 대주주 주식 양도차익 등 과세 강화로 약 82조6천억원의 세입을 확충하겠다는 계획이 나왔다. ‘소득세·법인세 최고세율 인상은 재원 조달의 필요성 등을 종합적으로 감안하여 추진’이라고 간단히 언급돼 있을 뿐, 증세를 적극 추진하려는 의지는 읽히지 않았다.

“증세가 민감한 사안이라 최대한 포괄적이고 신중하게 담았다. 집권 초기 증세라는 뜨거운 사안부터 치고 나가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가 내부에 있었다. 위원회 안에선 구체적인 증세안이나 숫자까지는 이야기되지 않았다.” 국정기획자문위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의 설명이다. 김진표 국정기획자문위 위원장은 참여정부 초대 경제부총리로 집권 첫해인 2003년 법인세 인하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실제 이번에 국정기획자문위가 내놓은 세제 관련 계획은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문 대통령은 대선 때 과표 500억원 이상의 대기업 법인세 최고세율을 현행 22%에서 25%로 올리고, 최고소득세율을 ‘과표 5억원 초과시 40%’에서 ‘과표 3억원 초과시 42%’로 높이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그러자 박근혜 정부의 ‘증세 없는 복지’와 다를 바 없다는 비판 여론이 일었다.

분위기는 하루 만에 반전됐다. “법인세를 손대지 않으면 세입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다. 과표 2천억원 이상의 초대기업에 대해서는 과표를 신설해 법인세 최고세율을 25%로 적용하자.”(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 “형편이 되는 쪽에서 소득세를 조금 더 부담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정직하게 해야 한다. 표 걱정한다고 증세 문제를 얘기 안 하면서 복지는 확대하는 상황이 계속 이어질 수는 없지 않냐.”(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 7월20일 청와대에서 열린 경제관계 장관회의와 국가재정전략회의 회의에서 ‘작심 발언’이 이어졌다. 발표에 앞서 국정기획자문위의 보고를 받은 여당 내부에서는 일찌감치 증세 논의를 진행하자는 의견이 나왔다고 한다. 국회와 몇몇 장관이 신중했던 청와대와 정부를 추동한 셈이다.

증세는 한 번은 넘어야 할 산이다. 올해 한국의 조세부담률(국내총생산에서 국세·지방세 등 세금이 차지하는 비율)은 19.7%로 추산된다. 2014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평균 조세부담률 25.1%에 크게 못 미친다. 기업에 부과하는 법인세 명목 최고세율 역시 이명박 정부 시절 22%로 낮춰 OECD 평균(23.2%·2015년 기준)보다 낮다. 특히 10대 대기업의 실효세율(각종 감면 혜택을 제외한 실제 부담률)이 2008년 18.7%에서 2014년 12.9%로 크게 낮아진 상황이다.

장하성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은 2015년 말 펴낸 에서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대기업 ‘감세’를 비판하면서 “정부의 재분배 정책이 불평등 해소에 최소한의 실효성이라도 있으려면 증세밖에는 길이 없다. 정부 예산을 늘리려면 대기업의 법인세율을 높이고 초고소득층의 누진세율을 높여야 한다”고 썼다.

“부자 증세 넘어 보편 증세” 목소리도
서울 시내 한 편의점에서 담배 진열대를 정리하는 모습. 자유한국당은 담뱃값을 다시 2천원 내리는 법안을 발의하며 문재인 정부의 ‘부자 증세’에 맞서 ‘서민감세’ 프레임을 형성하려 애쓰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 시내 한 편의점에서 담배 진열대를 정리하는 모습. 자유한국당은 담뱃값을 다시 2천원 내리는 법안을 발의하며 문재인 정부의 ‘부자 증세’에 맞서 ‘서민감세’ 프레임을 형성하려 애쓰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은 ‘부자 증세’라는 방향성을 명확히 했다. “증세를 하더라도 대상은 초고소득층과 초대기업에 한정될 것이다. 일반 중산층과 서민들, 중소기업들에는 증세가 전혀 없다. 이는 5년 내내 계속될 기조다. 중산층, 서민, 중소기업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해달라.” ‘세금 폭탄’ 프레임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선긋기에 나선 것이다. “초대기업과 초고소득자 스스로 명예를 지키며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명예과세”(추미애 대표), “대한민국 0.08%에 대한 슈퍼리치 증세”(제윤경 원내대변인), “부자들이 국민으로부터 존경받는 존경과세”(김태년 정책위의장), ‘핀셋 증세’ 등 더불어민주당이 ‘이름 붙이기’에 골몰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산을 넘기 위한 첫 번째 난관은 국회다. 조세의 종목과 세율을 법률로 정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야당의 반발은 거세다. 자유한국당은 7월26일 담뱃값을 2천원 내리는 법안을 발의하며 ‘부자 증세냐, 서민 감세냐’라는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려 애쓰고 있다. 대선 때 ‘중부담·중복지’를 언급했던 바른정당 역시 “100대 과제를 발표할 때만 해도 ‘증세 제로’를 말해놓고 하루 만에 말을 뒤집었다”(이혜훈 대표)며 문재인 대통령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반면 국민 여론은 증세에 우호적이다. ‘리얼미터’가 지난 7월21일 전국 성인 507명에게 ‘부자 증세’에 대한 의견을 물었더니 ‘찬성’이 85.6%로 나왔다.

당정은 7월27일 고용을 늘리는 기업에 세액공제를 해주는 ‘고용증대세제’를 신설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세법개정안에 합의했다. 관심을 모은 ‘핀셋 증세’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8월2일 발표된다. 과표 2천억원 이상 초대기업의 법인세율을 22%에서 25%로 올리고 과표 5억원 초과 소득자의 세율을 40%에서 42%로 올리는 ‘추미애안’ 수준에서 의견이 정리될 가능성이 높다. 대주주 주식 양도세, ‘일감 몰아주기’ 기업에 과세 강화 등도 담길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문재인 정부가 ‘조세 저항’이라는 두 번째 난관도 적극적으로 뛰어넘어야 한다고 주문한다. 이준구 서울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통해 좀더 강도 높은 ‘부자 증세’를 제안했다. “최고소득세율 40%가 적용되는 구간을 과세표준 연 3억원 이상으로 내린다 해도 대상자는 4만5천 명 정도다. 세율을 2%포인트 높여서 이들에게 걷을 수 있는 세금은 고작 1800억원이다. 이보다는 더 높은 최고소득세율을 신설하는 정공법을 쓰는 게 좋다. 예를 들어 과세표준 10억원 이상의 구간을 신설해 최고세율을 50% 정도로 높일 수 있다.”

‘부자 증세’ 프레임에서 벗어나 ‘보편 증세’로 나아가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박근혜 정부 때 중산층에게 세금을 더 걷으려는 시도를 ‘세금 폭탄’이라고 공격하며 정치적 자살골을 넣어 움직일 여지가 많지 않다. 강병구 인하대 경제학과 교수(전 참여연대 조세재정개혁센터 소장)는 “세금 부담 여력이 있는 고소득층·고액자산가·대기업이 먼저 부담하고 이후 중산층과 서민층이 보태는 방식의 단계적 증세가 필요하다. 전반적으로 조세 공평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세제 개편 논의를 이끌어야 한다. 부자 증세 다음에 점차 부동산보유세나 다른 증세까지 논의를 확대해야 납세자들의 조세 저항을 완화하면서 성공적으로 증세 전략을 끌고 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세금 더 필요할 때 부메랑 될 수 있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도 “더불어민주당은 조세의 기본 철학 없이 ‘조세 저항’ 프레임에만 갇혀 있다. 복지가 늘어나면 중간계층의 세금도 늘어나는 게 당연하다. 지금 같은 ‘핀셋 증세’에선 다수의 상위계층도 빠진다. 가장 공평한 것은 누진 증세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시간과 전략이다. ‘핀셋 증세’를 강조하는 전략은 ‘양날의 칼’이다. 당장은 여론의 지지를 받을지 몰라도, 더 많은 복지를 위해 더 많은 세금이 필요한 순간에는 부메랑이 될 수 있다. 더구나 시간이 흐를수록 ‘증세 정치’의 운신 폭은 좁아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내년 6월엔 지방선거도 예정돼 있다. 주도면밀한 로드맵이 절실한 이유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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