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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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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男았다 살女주세요’ 그 후 1년

“두려움은 용기가 되어 돌아왔다”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1주기, 또 다른 ‘나’들과 추모제
등록 2017-05-18 15:27 수정 2020-05-03 04:28
지난해 5월17일 일어난 서울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은 한국 사회가 그동안 묻지 않았던 여성혐오 범죄의 실체를 드러냈다. 그 뒤 1년, 많은 여성들의 두려움이 고백됐고 기록됐고 기억됐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지난해 5월17일 일어난 서울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은 한국 사회가 그동안 묻지 않았던 여성혐오 범죄의 실체를 드러냈다. 그 뒤 1년, 많은 여성들의 두려움이 고백됐고 기록됐고 기억됐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나는 내가 여자라는 것을 크게 인식하고 사는 사람은 아니었다. 맏딸이기도 했고 활달한 성격으로 엄마는 지금도 나를 ‘큰아들’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엄마는 항상 나에게 남자한테 지지 말라면서 내가 ‘여자’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러면서도 재미있는 것은 “여자는 평생 자기관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금이라도 살이 붙으면 샤워하는 내 몸을 훑으며 “어머, 저 허벅지 좀 봐” 하기 일쑤였다. 나는 스스로를 성적 대상화했고 여자라면 누구나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섹시하면서 청순하게 보이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던 지난 세월을 생각하면 정말 눈물겹다.

공개적으로 ‘메갈리안’이 된다는 것

‘메르스 갤러리’가 생기고 한동안 메르스 갤러리에 올라온 게시물만 생각하면 폭소가 빵빵 터졌다. ‘솔찍헌 여우의 심정, 6.9, 실좆, 한남’ 등 여자친구들끼리 모여 있으면 남들에게 들리지 않게 조용히 메갈리아 이야기를 하면서 낄낄대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메갈리아가 좋다’거나 ‘메갈리아를 지지한다’는 말을 함부로 꺼낼 수 없었다. 공개적으로 메갈리안이 된다는 것,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나에게 두려움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지난해 그 사건은 좀 달랐다. 언론에는 여느 여성이 살해됐을 때처럼 ‘묻지마 살인’이니 범인이 ‘사이코패스’니 조현병 환자라느니 하는 점만 부각되고 있었다. 내가 팔로하던 메르스 갤러리 저장소3에 올라온 게시물은 변화의 서막을 알리고 있었다.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 피해자를 추모하는 포스트잇을 붙이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그렇게 수많은 포스트잇과 국화의 추모 물결이 이어졌다. 정말 달랐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평범한 여성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사회적 운동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살아男았다. 살女주세요’라는 문구와 피에 젖은 하얀색 리본이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그러게 여자가 왜 밤늦게 돌아다녀서 그런 봉변을 당하느냐, 일찍 좀 다녀라.’

여느 때처럼 누구에게나 들을 수 있는 말들이 떠돌았다. 여성들은 더 이상 두려움에 떨고 있지만은 않았다. 희생자를 추모하는 침묵행진이 이뤄졌다.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의 피해자 모습에서 나 자신을 봤다는 ‘거울행진’이 만들어졌다. 대부분 피해자와 비슷한 또래인 20대 여성이 중심이었다. 피해자는 밤늦게 돌아다니며 친구들과 놀기 좋아하고 술도 자주 마시는 사람. 나와 내 친구들같이 평범하면서 활발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여자’라는 이유로 죽었다. 나에게는 안전한 공간이 단 한 곳도 없었다. 익숙한 두려움이 새삼스러웠다. 나도 어느샌가 친구들과 ‘밤길 걷기’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선 한참 전에도 있었던 시위지만 여성에게 밤길은 여전히 피해야 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우리는 다시 밤길을 당당히 걷기로 했다. 서초경찰서 앞에서 이건 당신네들이 발표한 ‘묻지마 살인’이 아니라 ‘여성혐오 살인’이라고 부르짖었다.

‘여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성폭력 피해 경험을 말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로부터 미취학 아동 시절 지속적으로 훈육을 가장한 성추행을 당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네가 잘못한 게 아니야. 사회가 이상한 거야.’ 지난해 5월 강남역을 감싸고 있는 공기가 나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페미니스트로 성장하고 있었다.

나의 위치를 고찰하기 시작했다. 질과 자궁이 있고 가슴이 나온 몸을 가진 것의 위치를 처절하게 깨달았다. 내가 어떤 사상을 가졌는지, 어떤 공부를 하고 어떤 삶을 지향하는지는 사회에서 20대 중반 여성을 볼 때 그리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내가 누리는 특권과 내가 맺어온 관계를 성찰하게 되었다. 페미니즘은 나에게 내 위치도 돌아보라고, 위치에 따라 그 사람의 행동이 달라지고 사회로부터 받는 대접도 달라진다고 알려주었다. 대학생이라는 특권, 비장애인이라는 특권, 선주민이라는 특권, 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다는 특권,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다는 특권, 건강하다는 특권…. 나는 셀 수 없이 많은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헬조선’을 살아가는 비참한 청년이라는 단일한 정체성에서 벗어나 다양한 정체성으로 나 스스로를 구성했다. 인간관계도 다시 맺기 시작했다. 내가 나이 많다는 이유로, 선배라는 이유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휘둘렀던 관계폭력을 깨달았다. 눈물을 흘리며 반성했다. 내가 다른 이들로부터 받은 상처와 다른 이들에게 준 상처가 겹치며 더욱 아팠다. 그렇게 내 공감능력과 생각은 깊어졌다.

무언가를 책임질 수 있게 되었다. 어리다고 여자라고 경험이 부족하다고 감성적이라고 이런저런 이유로 책임지지 못하게 막아왔던 것을 물리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스스로 얼마든지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인데 왜 이렇게 움츠러들었을까? 낙태금지법을 폐지하라며 ‘검은 시위’를 열고 박근혜 탄핵집회에 나가서 ‘페미존’을 운영하고 ‘2030페미캠프’를 만들고 대학에서 ‘페미 성교육’을 했다. 나 스스로를 온전히 책임지기 위해, 그리고 수많은 여성이 스스로 책임질 수 있기 위해서 필요한 과정이었다. 나는 그 과정을 책임지는 데 기꺼이 함께했다.

용기 내어 성폭력 전문 상담원 교육을 신청했다. 내가 강남역에 포스트잇을 붙인 수많은 누군가에게서 얻었던 용기처럼, 나 또한 누군가의 용기가 되고 싶었고 어려울 때 믿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첫 강의가 있는 날, 강사들은 왜 이렇게 젊은 사람이 많냐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원래 그런 줄 알았다. 강의실 절반 넘게 자리한 내 또래 여성들. 그들은 몸으로 억압을 느끼고 거리에서 페미니즘을 배운, 나 같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두려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두려움은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올라왔다. 부정하고 싶었던 사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의식은 아직도 나를 강하게 지배한다. 도어락을 열 때 꼭 뒤에 있는 계단 위아래를 살핀다거나, 공중화장실 변기에 앉을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몰래카메라가 있을까 걱정하는 것. 기울어진 사회에서 내가 오롯이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을 이제는 더 명확하게 체험하고 있다.

용기 줄 수많은 ‘나’들을 만나고 싶다

고등학생 때 있었던 일이다. 친구가 내 증명사진을 달라고 해서 하나 줬다. 며칠 뒤 친구가 점을 보고 왔다며 점집에서 내 사진을 보여준 이야기를 했다. 점쟁이는 내 사진을 보고 놀라며 “향후 37년간 여성 인권이 크게 성장할 건데 거기서 큰일을 할 사람”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그날의 추억, 나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믿고 있다. 그 가능성은 지난 1년간 서로 용기가 되었던 수많은 ‘나’들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5월17일은 서울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1주기가 되는 날이다. 또 다른 ‘나’들과 함께 추모제와 행진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의 두려움은 용기가 되어 돌아왔다.” 강남역에서, 서로의 용기가 돼줄 수많은 ‘나’들을 만나고 싶다.

이가현 불꽃페미액션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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