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 군형법 합헌 결정, 평등에 대한 모독’.
지난 7월28일,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가 발표한 긴급논평의 제목이다. 이날 헌법재판소가 옛 군형법 ‘제92조의 5’ 군형법상 추행죄에 내린 합헌 결정을 ‘모독’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계간(鷄姦)이나 그 밖의 추행을 한 사람은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한국 법률에서 유일하게 동성애 행위 처벌을 명시한 이 조항은 논란 끝에 2013년 ‘항문성교’에 대한 처벌 등으로 개정됐지만, 여전히 동성애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여기는 조항으로 비판받고 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탄원서, 집회 그리고 현수막</font></font>“이건 정말 위헌 나올 줄 알았는데….”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과 교수가 합헌 결정이 나온 날, 페이스북에 쓴 글이다. 홍 교수는 “전체 형법조문 중에 이렇게 모호한 조항도 없을 것”이라며 “법리적 판단으로 위헌이 명확하고, 헌재가 그 정도는 하지 않을까 했다”고 썼다.
법을 법으로 판단하지 않는 헌재의 결정이 다시 나왔다. 같은 조항에 대해 2002년, 2011년에 이은 세 번째 합헌 결정이다. 국제사회는 군형법 추행조항 폐지를 권고해왔지만 결정문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나 반박조차 없다.
유엔 시민적·정치적 권리규약위원회(자유권위원회)는 지난해 11월 이 조항을 폐지하라고 권고했다. 유엔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규약위원회(사회권위원회)도 올해 발표한 일반논평에서 ‘동성 간 합의한 성관계 처벌 규정은 명백한 인권침해’라고 지적했다. 일반논평은 사회권 규약에 대한 가장 권위 있는 해석 기준이다. 이렇게 국제사회가 이 조항의 폐지를 강하게 권고한 배경에서 “평등에 대한 모독”이라는 표현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날 함께 나온 김영란법(청탁금지법) 합헌 결정에 관심이 집중되면서 ‘군형법 합헌’은 묻혔다.
군형법상 추행죄를 둘러싼 전투가 있다. 보수 개신교 세력을 중심으로 수만 건의 탄원서가 헌재에 제출되고, 헌재의 결정을 앞두고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 집회가 벌어졌다. 성소수자 반대 세력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성과학연구협회의 300쪽짜리 의견서도 헌재에 제출됐다. 전국에는 ‘군동성애 합법화 반대’를 주장하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지난 설 연휴 고향에 내려간 성소수자들은 방방곡곡에 내걸린 현수막을 보고 기겁했다. ‘군 관련 성소수자 인권침해·차별 신고 및 지원을 위한 네트워크’ 활동가들은 “지금도 ‘여기에 현수막이 걸려 있다’는 제보가 온다”고 전했다.
헌재의 결정을 앞두고 에는 동성애자 데이트 애플리캐이션에 현역 군인들의 성관계 사진이 올라와 있다는 기사가 잇따라 나왔다. 교계·학계·언론을 막론한 보수세력이 군형법상 추행죄를 지키기 위한 전방위적 총력전을 벌인 것이다.
군형법상 추행죄는 보수 시민단체의 연결고리도 됐다. 보수 개신교 세력과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같은 전통적 군사주의 우파가 합헌운동을 함께한다. 여기에 ‘아들을 군대 보낸 어머니의 걱정’이라는 논리가 더해지면서 공교육살리기학부모연합 같은 우파 시민운동이 연대한다. 갈수록 규모가 커져서 170개 보수 단체가 군형법 합헌운동을 벌이고 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성소수자 시민권의 문턱”</font></font>하나의 법조항을 두고 ‘반성소수자 대 인권세력’의 전투가 2000년대 후반부터 벌어졌다. 성소수자단체뿐 아니라 인권운동, 평화운동도 ‘군형법상 추행죄’ 위헌운동을 함께했다. 지난 7월28일 헌재의 합헌 결정이 나오던 날 열린 규탄 집회에서 인권운동사랑방, 성폭력상담소, 전쟁없는세상 활동가들이 나와 발언했다. 인권변호사들은 위헌소송을 지원하는 법률인단을 꾸렸다.
위헌소송 청구대리인 한가람 ‘희망을 만드는 법’ 변호사는 “군형법상 추행죄 폐지는 성소수자 시민권의 문턱”이라고 표현했다. 현존하는 차별조항이 폐지되지 않으면 차별금지법 제정이나 동성결혼 합법화로 나아가기 어렵단 것이다. 그는 “그래서 반성소수자 진영도 그 조항을 최후의 보루로 여긴다”고 덧붙였다. 합헌 결정은 대립하는 상황에서 한쪽의 손을 들어줬다. 2011년에 이어 다시 차별을 법으로 ‘인증’했다.
이번 헌재 결정문은 옛 군형법 ‘제92조 5’의 ‘추행’을 “객관적으로 일반인에게 혐오감을 일으키게 하고 선량한 성적 도덕관념에 반하면서 계간에 이르지 아니한 동성 군인 사이의 성적 만족 행위”로 규정한다. 여기에 “군대는 동성 사이의 비정상적인 성적 교접행위가 발생할 가능성이 현저히 높으며”라는 우려가 더해지고 “이성 사이의 성적 행위를 한 군인과 비교하여 어떠한 차별 취급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이는 합리적 이유가 인정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래서 “평등원칙에 위반되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헌재의 결정문에 법적 비판이 거세다. 소수의견을 낸 4명의 재판관은 결정문에서 군형법상 추행죄가 죄형법정주의의 명확성 원칙에 반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소수의견을 요약하면 “강제성을 수반하지 않은 음란행위”까지 처벌할 위험이 있고, “음란 정도가 어디에 이를 때”까지 적용되는지 불명확하고, 추행 대상이 “남성 간의 추행만을 대상으로 하는지, 아니면 여성 간, 이성 간 추행도 그 대상인지 애매모호하다”는 것이다.
군인 간 행위만 처벌할지, 군인과 민간인 간 행위도 처벌할지, 군인이 군대 밖에서 한 행위도 처벌할지, 군형법 추행죄는 명확히 확정하지 않는다. 결국 법 원칙인 평등을 해치고, 과잉금지에 어긋나며,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 홍성수 교수는 “헌법재판관들의 동성애에 대한 입장이 합헌 결정에 영향을 줬다고 볼 수밖에 없다”며 “차라리 판결문에 동성애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그것을 전제로 판결을 내렸다면 토론이라도 해볼 텐데 그것도 아니라 정말 고약한 결정”이라고 지적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징집하면서 징벌하는 사회</font></font>합의와 폭력을 구분하지 않고, 동성애와 이성애를 차별하는 법은 누구도 보호하지 않으면서 누군가를 모욕한다. 결정문에는 오직 동성애에 대한, ‘설정된 공포’만 있을 뿐이다. 한가람 변호사는 “동성애자 병사의 일상적 신체 접촉도, 그저 쳐다보는 것도, 모두 혐오스럽고 처벌 대상인 ‘추행’으로 변질되기 십상”이라고 지적했다. 잇을 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성폭력은 권력과 위계에 기반한 행위인데, 성적 만족을 기준으로 삼으면 동성애자 추행 피해자도 가해자로 둔갑한다”고 말했다. 동성애자로 커밍아웃한 병사는 성추행을 당해도 ‘즐겼다’는 이유로 처벌받을 위험이 있고, 이성애자 선임병이라면 성적 가혹 행위를 하더라도 ‘성적 만족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추행으로 처벌받지 않는다.
실제 지난 4월25일 한 동성애자 제대 군인이 군형법상 추행죄가 차별적으로 적용됐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했다. 그와 선임병 사이에 성적 접촉이 있었던 사실이 밝혀지자, 부대에서 이미 동성애자로 알려진 그만 처벌받은 것이다. 그는 당시 격리 조치로 5개월을 의무실에 강제 입실당했다.
진정인 쪽은 “만약 관계가 강제적이었다면 강제추행죄를 적용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군형법상 추행죄를 꺼내들었다”며 “합의에 의한 관계였고, 주변 정황도 강제적일 수 없었다”라고 주장했다. 추행범으로 몰린 진정인의 가족은 상대에게 합의금을 지급하고서야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한국남성동성애자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이종걸 사무국장은 “군형법이 사회적 이슈가 되자 성소수자들이 입대하면서 두려움을 느낀다”고 전했다. 이렇게 군형법상 동성애 처벌조항은 성소수자 군인들에게 명백히 현존하는 실질적 위협이 된다. 이 사무국장은 “동성애자에게 최소한 군대에서 숨죽이고 자신을 숨기고 살라는 위협이자 명령이다”라고 말했다. 군대라는 특수성이 강조되지만 이것도 이미 철 지난 이야기다.
1960년대 제정된 한국의 군형법은 미국의 전시법을 참고했다. 기독교 전통이 강한 서구에는 오랫동안 동성 간 성관계를 처벌하는 ‘소도미(Sodomy)법’이 있었다. 미국 전시법의 소도미 조항은 군형법 제정 당시 한국식 계간으로 변형됐다.
그러나 원형이 되는 미국의 전시법도 2003년 소도미 조항을 위헌으로 결정했다. 연방대법원이 2003년 동성 간 성행위를 처벌하던 텍사스주 소도미법을 위헌으로 판결한 것이다. 미국은 다른 서구보다 소도미법 폐지가 늦었다. 제국주의 잔재로 소도미법이 남아 있던 제3세계 국가에서도 관련 법은 폐지됐다. 한국과 유사 조항이 있던 페루 헌법재판소도 차별적이란 이유로 폐지했다. 보수 개신교의 압력을 받고, 국가안보 논리에 갇히 한국의 헌재는 합헌 결정을 반복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입법운동, 폐지운동 함께해</font></font>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니다. 군형법 제92조 개정이 인권운동의 주요 의제로 떠오른 지 오래다. 유엔의 지속적 권고에서 보듯이 거스르기 어려운 국제사회의 압력이 있다. 보수 개신교의 군형법 반대 규모가 더욱 커지고 강도가 세진 것은 유엔의 권고가 나온 뒤부터다. 그만큼 위기감이 커진 것이다. 헌재도 지난 4월 내릴 것으로 예상된 군형법 제92조에 대한 결정을 7월로 미뤘다. 이렇게 법논리와 현실 사이에서 ‘결정하고 싶지 않은 결정’이 됐다.
2002년 위헌의견 2명, 2011년 위헌의견 3명에 한정위헌 1명, 2016년 위헌의견 4명. 점차 위헌의견을 내는 헌법재판관이 늘었다. 점점 결정을 내려야 하는 주기도 빨라졌다. 이제 성소수자 인권운동 진영은 피해 당사자와 만나 위헌소송을 내는 것과 더불어 제20대 국회를 상대로 군형법 개정 입법 청원운동을 벌일 계획이다. 지난 19대 국회에서 동성애 처벌을 삭제한 군형법이 발의됐지만 통과되지 못했다. 청소년 성소수자 쉼터 ‘띵동’ 정욜 활동가는 “군형법 개정운동을 벌인 지 10년이 지났다”며 “합헌 결정이 또 나왔지만 국내외 대세는 폐지로 가고 있다”고 희망했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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