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의 끝, 거기 무엇이 있을까? 트레일러너이자 레이스디렉터 안병식(43)씨는 극한을 향해 달렸다. 그는 2008년 이후 3년간 각종 달리기 대회에서 무려 5천km 넘는 거리를 두 다리에만 의지해 완주했다. 그해 베트남 정글 마라톤(총구간 235km)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듬해 제주국제울트라마라톤트레일런대회 148km를 시작으로 6개 대회 만에 1754km를 달렸다. 제주와 서울을 세 차례 오가는 거리다. 스페인 카미노데산티아고의 길 800km를 15일 만에 완주했고, 프랑스 몽블랑과 남아프리카 칼라하리사막, 히말라야 고지를 뛰어 넘나다니기도 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제주의 포레스트 검프</font></font>2010년 프랑스와 독일 횡단 대회는 더 지독했다. 35일간 이어지듯 열리는 두 대회의 총구간이 무려 2350km다. 프랑스 로스코프에서 그루이산까지 1150km 거리를 18일 동안 달려 완주에 성공했다. 하루 평균 60km가 넘는 거리다. 대회 뒤, 곧바로 독일로 건너갔다.
프랑스 대회가 끝난 지 일주일 만에 지독하기로 소문난 1200km 독일 코스를 시작했다. 독일 서북쪽 끝 카프아르코나부터 남쪽 끝 뢰라흐까지 매일 70km를 달렸다. 어떤 날은 하루 90km씩 뛰어야 했다. 경기 막판에는 알프스 산악지대를 넘어야 하는 난코스도 있다. 참가자 절반 이상이 떨어져나가는 악명 높은 곳이다. 등에는 물과 먹을 것을 담은 가방까지 짊어져야 했다.
그는 결국 독일∼프랑스 2350km 코스를 한 해에 모두 완주한 세계 첫 선수로 기록됐다. 그는 말한다. “달리는 동안 힘겨운 고통을 겪게 되지만, 이를 통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새삼 경험하게 됩니다. 극한을 넘나들어야 하는 트레일러닝에서 얻을 수 있는 특별한 즐거움이죠.”
트레일러닝(Trail Running)은 아스팔트 도로나 실내·외 경기장 대신 오솔길 같은 가벼운 산길부터 사막, 산맥, 남북극 같은 오지의 자연 위를 그대로 달리는 것이다. 그러나 가벼운 산길을 5km·10km 거리 단위 코스로 만들어 일반인이 자연을 즐기며 걷거나 뛸 수 있는 대회도 있다.
“트레일러닝은 홀로 수백, 1천km 이상을 달리면서 자신과 싸우는 일이에요. 자연 속에서 인간의 방식으로 도전하는 경기죠. 그러나 자연과 여행을 좋아하고, 걷는 게 즐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운동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인 도로 달리기는 100km 코스의 경우, 완주 제한 시간이 14시간 정도로 빡빡하다. 반면 비슷한 거리의 울트라 트레일러닝은 28~30시간으로 넉넉하다. 걸어도 되고, 뛰어도 된다. 자연과 같이 즐기면서 달리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안씨 같은 전문 선수들은 극한이나 오지에서 100km 이상 어려운 코스를 주로 뛴다. 그는 ‘레이스디렉터’로 이런 대회를 설계하고 만드는 일도 한다. 어쩌다 이런 ‘무모한 도전’을 하게 됐을까?
<font size="4"><font color="#008ABD">누구도 앞서가지 않았다</font></font>지난 7월25일 제주 시내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2000년까지 그는 제주대학에서 서양미술을 전공하던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우연히 본 영화 가 그의 삶을 바꿨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 ‘포레스트 검프’가 무작정 달립니다. 지능이 낮고 다리가 불편하다는 설정을 지닌 인물이지만, 그 안에서 재능을 발견하죠. 그리고 묵묵히, 그러나 열정적으로 자신의 일을 합니다. 한편으로,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돕는 모습에 자극받았어요. 그리고 저도 달렸죠.”
대학 시절이던 1998년, 학내 5km 단축 마라톤이 첫 시작이었다. 걷고 뛰는 게 좋았다. 2년 뒤, 100km짜리 울트라마라톤대회에서 완주했지만, 부족했다. 허전했다. 2003년에는 제주국제아이언맨대회에서 수영·사이클·마라톤을 포함해 총구간 225.8km의 철인 3종 경기에 나섰다.
삶이 본격적으로 달라진 것은 2005년 이집트 사하라에서 열린 사막달리기 대회 때문이었다. 남들이 혀를 내두르는 그 험한 곳에 왜 이끌렸을까? “이유는 딱히 모르겠어요. 사막달리기 대회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냥, 그러나 정말 간절하게 가보고 싶었어요.” 통장에 있던 돈 500만원을 모두 털었다.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사막에 다녀오자는 심정이었다.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이듬해엔 중국 고비사막 마라톤(총구간 250km)에 참가했다. “사하라사막 이후 이제 그만 가자고 생각했는데, 그냥 자꾸 가고 싶었어요. ‘고비사막은 가까우니까 한 번만 더 가자’는 핑계를 스스로한테 댔죠. 절친한 지인들에게 ‘결혼할 때 부조 안 해도 되니 지금 10만원씩만 부조하라’고 여럿을 꼬드겨 비행기 티켓 사서 떠났죠.”
고비사막 대회에서 덜컥 우승했다. “사하라사막 대회에서 사막경기 노하우뿐 아니라 짐 싸는 법, 체력 조절법 등을 경험한 게 큰 도움이 됐어요. 운도 따랐지요. 아직 트레일러닝이 세계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어서 선수층이 두텁지 않았고, 선수들이 모든 대회에 참가하는 게 아니어서 경험 많은 선수가 없었던 영향도 있고요.”
이때부터 칠레 아타카마사막 대회, 북극점 대회, 베트남, 대만, 일본, 모로코, 마다가스카르, 미국 등 전세계를 다녔다. 출전 경비가 떨어져 대회 미디어팀 카메라맨 자격으로 대회에 간 적도 있다. 그렇게 지금까지 출전한 대회에서 달린 거리만 1만km를 훌쩍 넘었다. 각종 대회 수상 경력도 쌓였다.
엄청난 훈련량 덕분이었다. 한창 대회에 출전하던 시절에는 아침마다 한라산 정상을 다녀왔다. 1947m 높이의 산을 매일 정상까지 뛰어오르는 데 필요한 시간은 2시간 이내. 아침 6~7시에 올라갔다가 오전 중에 산을 내려왔다. 대회 출전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오후에는 미술학원 강사를 했다. 제주 성산 광치기해안의 3km 거리 모래사장도 뛰었다. 등에 멘 가방에는 10kg 정도 무게의 돌멩이나 커다란 생수통을 몇 개씩 넣고 운동했다.
30개 이상 대회에 나서면서 특별한 경험도 많았다. 그중에서 2006년 칠레 아타카마사막 마라톤은 더 특별했다. 대회 둘쨋날 발목을 접질려 발이 삐걱거렸다. 셋쨋날 결국 발이 완전히 부었다. 칠레의 사막 코스가 그의 사정을 헤아려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선두그룹 5명 가운데 누구도 그를 앞서가지 않았다. 일단 누구라도 튀어나가면 다시 경쟁이 시작되지만, 하나같이 그의 곁에서 같이 걷고, 뛰었다. 이들은 마지막날 끝내 손을 잡고 결승점을 통과했다. 인터뷰 도중 안병식씨의 눈매가 붉어졌다.
“나중에 전자우편으로 연락해보니, 그들도 그런 경험이 처음이라고 하더라고요. 경쟁에서 1등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때 새삼 알았죠. 도로나 경기장 달리기에선 경험할 수 없는 ‘사람과의 관계’, 이게 트레일러닝만의 특별함입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오름에 오르면 눈을 채우던 산과 바다</font></font>안병식씨를 ‘트레일러닝의 철인’으로 만든 것은 고향 제주였다. 그는 제주 표선면 가시리에서 자랐다. 제주 중산간에 위치한 이곳은 200만 평(661만m²) 넘는 말목장이 있다. 아직 사람 손이 덜 타 자연환경도 빼어나다. 어디를 가도 매일 빛과 소리가 다른 맛을 준다. 산과 모래를 타는 트레일러너로서 최적의 훈련 환경이 그의 고향에 있는 셈이다.
“가시리에서 자랐다는 게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대회에 나가면서 전세계 20~30개국에 가봤어요. 그런데 제주, 그리고 가시리만큼 좋은 곳이 없더라고요.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였고, 한라산이 있고, 그 사이로 아름다운 오름이 있잖아요. 특히 제주만의 특색인 오름은 10분 거리만 뛰면 정상에서 바다와 산을 모두 바라볼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을 제공합니다. 국외 선수들이 제주 대회에 오면 자연적인 아름다움에 깜짝 놀라는 것을 자주 봅니다.”
최근 제주가 무분별하고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개발되는 것에 그가 아쉬움을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과거 오름에 오르면 눈을 가득 채운 건 산과 바다였다. 그러나 최근엔 건물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제주가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까닭이겠죠? 그래도 정말 아쉬운 점은 제주에 자동차와 도로, 건물이 지나치게 많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10년 전 트레일러닝을 시작할 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는데, 급속도로 자연이 망가지고 사라지는 게 안타깝죠. 사람들은 제주에 자연을 보기 위해 찾아오는데, 오히려 그들 때문에 제주의 자연이 점점 망가지고 있으니까요. 자연에는 대체 불가능한 힘과 아름다움이 있어요. 제주가 개발되는 것을 완전히 차단할 수 없겠지만, 속도를 늦추거나 자연친화적인 개발, 보존이 이뤄졌으면 좋겠습니다.”
2011년 이후 안씨는 선수보다 트레일러닝 대회를 조직하고 코스를 구성하는 레이스디렉터 구실에 집중하고 있다. 이미 2011년 제주국제트레일러닝대회( <font color="#C21A1A">ultratrailjeju.com</font>)로 국내 첫 트레일러닝대회를 개최했다. 첫 대회는 어렵사리 400명 정도로 시작했다. 코스는 그가 가장 사랑하고 잘 아는 고향 가시리의 마을 목장을 중심으로 구성했다. “딱 10km 코스였는데, 그게 너무 좋았어요.” 이듬해 대회는 마이너스통장까지 발급받아 대회를 준비했다. 올해는 봄, 가을로 대회를 나누는 것을 처음 시도했다. 지난 5월 5km·10km·50km 코스로 대회가 열렸다. 10월(14~16일)에는 사흘 일정으로, 100km 코스 대회가 예정됐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최고의 코스로 인정받는 날까지</font></font>한라산과 오름, 바닷가로 이어지는 제주길을 따라 대회 코스를 마련하고 있다. “제주는 섬입니다. 제주의 특성을 살려 바다 코스를 넣고, 유네스코 자연유산인 오름과 한라산을 포함하면 세계적으로 이만큼 아름다운 코스를 찾기 어려울 겁니다.” 안씨는 제주국제트레일러닝대회를 세계 최고의 코스로 인정받는 날을 꿈꾼다. “대회를 만든 사람이고 앞으로도 운영해야 하니 저도 노력해야죠.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만큼, 여러 곳에서 도움을 받는 것도 중요하고. 무엇보다 제주의 자연이 훼손되면 안 됩니다. 트레일러닝뿐 아니라 제주의 많은 것이 자연 그 자체로부터 받은 선물이잖아요.”
홍석재 기자 forchis@hani.co.kr<font size="4"><font color="#00847C">이 기사를 포함한 제주에 관한 모든 기사를 만나볼 수 있는 낱권 구매하기!</font></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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