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동안 당하기만 했는데 그날은 정말 심했제, 참말로 너무했제.”
2014년 6월11일. 경남 밀양 765kV 송전선로 반대 투쟁, 10년 동안 이어진 전쟁의 마침표를 찍고 싶었던 박근혜 정부와 한국전력은 2천여 명의 경찰과 200여 명의 공무원, 한전 직원을 투입해 마지막 남은 4개 움막을 철거했다. 산속에서 길게는 2년, 짧게는 6개월 동안 굴을 파고 밤새 보초를 서며 서로를 쇠사슬로 묶고 있었던 밀양 주민들은 거대한 국가권력 앞에 한 줌의 모래에 불과했다. 위양마을 정임출 할매는 일주일을 버티면 온 나라가 알 것이라며 냉장고 한가득 식량을 준비했다. 하지만 11일 새벽 6시, 동이 트자마자 그 간절했던 소원은 밀물처럼 밀려오는 경찰 병력에 쓸려갔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15km, 야만의 현장을 되짚으며</font></font>밀양 주민들이 그렇게 지키고자 했던 땅. 송전탑 부지, 그 위에 수십 년을 서 있던 소나무들은 주민들이 끌려나오고 움막이 철거되자마자 한전 인부의 전기톱에 베어져나갔다. “우리가 내려가고 나서 베도 될 것 아니가. 와 지금 나무를 베노.” 목에 건 쇠사슬을 끊으러 들어오는 절단기에도 잃지 않았던 정신은 전기톱 소리에 끝내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나 경찰은 살판이 났다. 2015년 1월, 밀양경찰서장이던 김수환은 청와대 22경찰경호대장으로 영전했다. 경찰관 74명이 밀양 송전탑 진압 공로로 상을 받았다. 또한 특진자 14명 중 10명이 관련자였다. 2014년 집회·시위 관련 유공 표창자의 65%에 달하는 끔찍한 수치였다. ‘6·11 밀양 행정대집행’은 밀양으로 가해진 국가폭력의 극치였다. 한쪽은 사람들이 쓰러져 울고, 한쪽은 마지막 작전 뒤 기념촬영을 하는 여경들이 있는 야만의 현장이었다.
6월11일 하루에만 12명의 주민과 연대자가 응급 후송됐다. 행정대집행 이후 대구까지 항우울제, 신경안정제, 수면제 처방을 받기 위해 정신과 진료를 다녀온 주민이 50명에 달한다. 68명의 주민과 연대자가 재판을 받았거나 진행 중이다. 송전탑은 모두 섰다. 나라에서 가장 높은 전압의 전기는 흐르기 시작했다. 밀양 주민들의 속 깊은 곳까지 상처는 그대로 남았다.
밀양 할매들이 옛 싸움을 회고할 때 첫 이야기는 항상 산에서 시작된다. 뒷산 공사 현장을 보고 올라갔는데 반대편 산으로 내려온 이야기, 자정에 출발해 해가 뜨고 공사 부지에 도착한 이야기, 공사를 막으려고 태풍 오던 날에 비닐 한 장으로 산에서 버틴 이야기. 산에서 겪었던 10년의 몸고생, 마음고생을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겠나.
<font size="4"><font color="#008ABD">“ 765kV 사업을 다시 할 수 없을 것”</font></font>지난 6월11일 토요일, 밀양765kV송전탑반대대책위원회(밀양대책위)는 행정대집행 2년을 맞아 ‘밀양할매길 걷기’ 행사를 열었다. 150여 명의 연대자들이 산길을 다시 올랐다. ‘할매팀’과 ‘할배팀’의 발걸음은 9시간, 15km 거리 동안 어르신들의 사랑방으로, 때로는 송전탑 밑으로 이어졌다.
주민들은 수박을 썰어놓고 연대자들을 기다렸다. 도보 중에 닿은 용회마을에서는 2년간 어린이책시민연대 회원들과 함께해온 바느질공방에서 준비한 ‘할매 얼굴 수놓기’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평밭마을에선 어르신들께 큰절을 올렸다. 밀양 송전탑 투쟁을 전국으로 알린 고 이치우 어르신의 분신 현장에 닿았을 때 연대자들은 어르신의 영정 앞에서 짧은 추도회도 했다.
101번·126번 송전탑 아래에서는 ‘숲속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할매들은 2년 전 소나무가 베어지던 그 자리에서 (오월의봄 펴냄, 2014)에 실린 밀양 할매들의 목소리를 직접 낭독했다. 하자작업장학교 학생들의 합창이 나무 사이로 퍼졌다.
“이 세상은 불타는 숲/ 그러나 도망가지 않겠어/ 우리가 모으는 물방울 그 하나하나가/ 이 세상의 숲과 마을 조금씩 되살릴 수 있다면”
저녁 6시, 도곡저수지 제방에는 400여 명의 참가자와 주민들이 모였다. 주민들은 사랑방을 청소하고 음식을 준비했고, 할매합창단을 결성해 몇 달간 노래 연습을 했다. 가장 끔찍했던 날에 벌이는 잔치에 순대와 국밥이 나오고, 가슴 따뜻한 편지와 밀양으로 각성된 이들의 다짐과 격려가 오갔다.
밀양 할매·할배는 한 걸음씩 승리하고 있다. 2015년 6월12일에는 가장 오래된 핵발전소 고리 1호기의 폐쇄가 결정됐다. 지난 5월27일 산업통상자원부 전기위원회에서는 ‘신울진~신경기 신규 765kV 노선’을 포기한다는 내용의 제7차 장기 송변전설비계획안이 결정됐다. 765kV 가공송전선로를 500kV HVDC(초고압 직류 송전)로 전환하겠다는 계획도 포함됐다. 1조5천억원으로 추산되던 사업비가 이번 결정으로 3~4배 더 들어가게 되었고, 송전선 전자파와 경관 공해는 훨씬 줄어들게 되었다. 이는 한전과 정부 관계자들이 공히 인정하듯, 밀양 송전탑 투쟁의 결과다. 조환익 한전 사장은 2013년 5월, 밀양 송전탑 현장을 방문했을 때, 주민들 앞에서 “밀양 사태를 겪으며 한전이 765kV 사업을 다시 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고 발언했다고 한다.
물론 신울진 핵발전소와 강원도 동해안 지역 민간 화력발전소 대규모 증설 계획 자체가 폐기된 것은 아니다. 신경기변전소 주민들의 투쟁도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저 철옹성 같던 한국전력이 765kV 송전탑을 포기하는 일에 밀양 주민들의 투쟁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제 싸움이 끝났습니까? 송전탑은 다 섰습니까?”
밀양을 오랜만에 다시 접한 사람들의 첫 질문이다. 없는 시간을 쪼개어 전국 곳곳을 다니며 ‘탈핵 탈송전탑 운동’에 매진하고, 아픈 현장마다 연대하는 밀양 주민에게는 적잖이 속이 쓰린 말이다.
마을 공동체 파괴의 주범인 한전은 밀양에서 떠나갔지만 이웃 사이의 멍은 사라지지 않는다. 부북면의 어느 찬성 주민이 반대 주민들의 마을회관인 사랑방에 찾아와 “765 전기 다 가고 있고, 끝난 거 아닙니꺼. 끝났으면 다 접고 들어가야지, 와 남아서 이랍니꺼”라는 이야기를 서슴없이 한다. 사랑방을 고치던 할머니는 맞받아친다. “누가 끝났다고 합니까. 아직 안 끝났습니다. 전기 제대로 가면 밑에 못 삽니다. 더러븐 돈 200만원 받아처묵고 끝난 그기 끝난 겁니까. 우리 안 끝났습니다. 아직 합의 안 했습니다. 4개 면에 주민들이 300명 합의 안 하고 남아 있습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신고리 5·6호기 승인 논의 중</font></font>부북면 위양마을에 사는 정임출 할머니의 한 주는 월요일 아침 8시 밀양시청 앞에서 시작된다. 4개 면 주민들이 1인시위를 시작한 지 18개월이 지났다. 피켓에는 밀양시의 책임 있는 사과와 주민 재산·건강 피해 실사 기구 구성 요구가 담겨 있다.
농활을 하러 사람들도 꾸준히 찾아온다. 단순히 어르신들의 일손만 돕다 가지는 않는다. 그들은 할매·할배들에게 밀양 투쟁의 소감을 듣고, 눈으로 현장을 겪으며 우리나라 에너지 문제의 모순과 파행을 확인한다. 밀양대책위는 ‘탈핵 탈송전탑 교육원’(가칭)이라는 형식으로 밀양 할매·할배들의 살아 있는 이야기와 투쟁의 기억을 ‘탈핵 탈송전탑 에너지 전환 교육’의 장으로 바꿀 계획이다. 밀양대책위는 공간을 마련하고 교육 프로그램을 짜는 등 구체적인 준비에 들어갈 예정이다.
4개 면 송전탑 반대 주민들은 매주 한 번씩 모인다. 1·3주는 할매합창단의 연습이 있다. 동네마다 돌아가며 간식거리를 준비해오고 노래를 연습한다. 주민들이 모여 스트레스를 푸는 시간이다. 2·4주 토요일에는 연대자들도 함께 모이는 촛불문화제가 열린다. 이날에는 지난주 투쟁 상황을 공유하고 앞으로 계획을 세우는 주민회의도 열린다.
새벽같이 서울로 올라가는 일도 다시 시작됐다. 5월12일부터 광화문 KT 건물 13층에 있는 원자력안전위원회에서 밀양의 운명을 건 회의가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신고리 5·6호기 건설 승인을 결정하는 일이다. 이미 8기의 핵발전소가 밀집한 세계 최대 규모의 핵발전 단지에 설계 수명이 60년이나 되는 신규 핵발전소를 2기 더 건설하겠다는 계획이다. 건설 승인시 고리 지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10기의 핵발전소가 밀집한 지역이 된다.
밀양대책위는 신고리 5·6호기를 막아내는 일이 밀양으로 흐를 전기를 끊어내는 일이라고 말한다. 밀양으로 흐를 전기가 없어진다는 것은 밀양 송전탑이 필요 없는 고철 덩어리가 된다는 뜻이다. 전기가 남아돈다. 지금도 전력설비 운영예비율은 평일 일과 중에도 30% 전후가 될 정도로 많은 발전소가 놀고 있다. 정부의 전기 수요 증가 예측은 완벽히 틀렸다. 그러면서도 곳곳에 핵발전소와 화력발전소를 새로 짓겠다고 한다. 이 어이없는 시스템을 어찌할 것인가. 밀양 할매·할배들만이 다시 이 짐을 다 짊어지고 기약 없는 투쟁의 길로 나서야 하는가.
<font size="4"><font color="#008ABD">“저 쇳뒤 비내삐리뿌라”</font></font>‘밀양할매길 걷기’ 행사가 끝나고 다음날 말해 할머니(89) 댁에 인사를 드리러 갔다. 할머니는 지난해 6월11일보다 조금 더 야위셨다. 한창 밀양이 전쟁터였을 시절 할머니는 젊은이가 2시간 걸려 올라갈 산을 한나절 꼬박 걸려 올라가곤 했다. 할머니는 여러 번 반복해서 말씀하신다.
“저 험한 길을,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이 넘어왔다. 5학년 학생이 넘어왔다. 어찌할꼬, 어찌할꼬. 나 죽고 없더라도 저 쇳뒤(쇳덩이) 비내삐리뿌라(베어내버려라). 비내삐리뿌라. 학생 성공해서 저거 쫌 비내삐리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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