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울뿐인 한국인 원폭 피해자 지원법

피폭자 자녀 피해자 인정, 면밀한 실태 조사, 선제적 지원, 역사적 진상 조사 포함된 특별법 필요

5월27일 심진태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장(가운데)이 일본 히로시마 평화공원에 위치한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앞에서 일본을 방문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보낼 서한을 공개하고 있다. 한겨레 길윤형 기자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역사적인’ 일본 히로시마 방문은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에게 자신의 막다른 처지를 세상에 알리는 절호의 기회로 여겨졌다. 방문 예정일인 5월27일 오전 한국 쪽 방문단과 일본의 지원단체 관계자들이 히로시마평화공원 내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앞에서 ‘미국 대통령은 책임을 인정하라’고 촉구했다.

심진태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장과 한정순 한국원폭2세환우회 명예회장 등 한국 쪽 방문단과 일본의 지원단체 관계자들이 함께 모여 위령비에 헌화하고 오바마 대통령에게 미국의 책임을 인정할 것을 촉구했다. 한국 방문단은 하루 전에 서울 종로구 미국대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으며 밤늦게 오사카 간사이공항에 도착해서는 조사를 이유로 입국관리국에 억류되는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역시 이변은 없었다. 오바마 대통령과의 면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의 연설 중 한국 피해자를 딱 한 번 언급한 것이 전부였는데, 그것만 해도 대단히 이례적인 일로 보도됐다. 미국 대통령이 한국인 원폭 피해자의 요구에 부응하는 행보를 보여주리라고는 애당초 기대하기 힘들었다.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

‘역사적인’ 히로시마 방문이 미국의 대(對)아시아 전략의 일환인 미-일 공조의 과시이며 이에 더해 퇴임을 앞둔 대통령의 ‘자기 정치’였음은 누구나 아는 비밀이다. 위대한 인물로 남고자 국가 기조에 반역을 꾀할 만큼 대담한 인물이었다면 애당초 그 직위에 오를 수도 없었을 것이다.

오바마와 아베, 옛 전쟁 당사국의 국가원수라는 자들이 원폭 피해 현장을 방문해 전후좌우도 없이 ‘핵무기 없는 세상’을 천명하다니. 침략과 원폭 투하의 장본인이 어디 다른 나라 사람이었는지 착각될 정도다. 이러한 무책임한 행태를 거짓 평화주의 말고는 달리 어찌 표현해야 하나? 일본 전국피폭자청년동맹 등은 이번 오바마 대통령의 방문이 차라리 없었던 것만 못하다며 강력 비판하고 나섰다.

미국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에 이목이 집중되는 사이 그로부터 바로 한 주 전에 대한민국 국회를 통과한 특별법안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안(대안)’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지 71년 만인 올해 5월19일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됐다. 그간 ‘원폭 피해자 및 자녀를 위한 특별법 추진 연대회의’ 등 여러 시민사회 세력이 10여 년을 끈질기게 국회를 압박하고 여론에 호소해온 노력이 드디어 결실을 맺은 것이다. 그런데 왜 법안이 그 모양인 것일까?

원폭 피해자 지원 법안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제정됐다고 축배를 들기에는 너무나도 실망스럽다. 이 법안은 사람 몸으로 치자면 그야말로 뼈대만 갖춘 수준이다. 그것도 튼실한 뼈대가 아니라 대충 이어붙인 듯 보인다.

보건복지부 장관 소속 위원회 설치, 한국인 원폭 피해자 실태 조사, 의료 지원, 그리고 추모묘역 및 위령탑 조성 등 주요 골자만 나열돼 있을 뿐 체계적인 사업 진행을 위한 논리적 연계성과 법 집행을 추동할 세부 항목은 갖추지 못했다.

‘실태 조사’ 조항만 보더라도 단순히 자료 수집과 조사, 보고서 작성만이 명시돼 있어 위원회에 ‘등록’한 피해자에 국한된 형식적인 조사와 보고로 그칠 공산이 크다. 아주 값싼 처리 방식이 아닌가. 부마민주항쟁 보상법의 전철을 밟으려는가.

제대로 된 진상 규명을 위한 행정적·재정적 요건을 구비하지 않은 채 정권 홍보 차원에서 서둘러 법률을 제정한 결과, 부마민주항쟁의 진실과 역사적 가치를 드러내기는커녕 피해자 일부에 대한 배·보상 및 명예회복 문제로 축소돼 민주주의 정신의 생생한 원천을 오히려 고갈시키지 않았는가.

원폭 피해자 지원법 통과됐지만…

피폭자 자녀들의 인권 문제를 제기하며 활발한 활동을 벌이다가 2005년 세상을 떠난 김형률 한국원폭2세환우회 초대회장. 한겨레

직접적인 피폭자 세대가 사라져가는 마당에 뒤늦은 의료 지원을, 그나마도 제한적으로 제공하고 기껏 추모공원이나 만드는 특별법이라면 참으로 유감스럽다. 그러나 정작 결정적인 문제점은 다른 데 있다. 법안 내용이 허술한 것만이 문제라면 일단은 법 제정을 자축하고 나서 향후 법안을 보완해 개정하는 절차를 밟으면 될 일이다. 문제는 내용보다 관점에 있다.

이 법안에는 원폭 피해자 자녀가 ‘피해자’ 범위에 포함돼 있지 않다. 이는 단지 차후에 보완하면 될 부가적 사안이 아니다. 한국인 원폭 피해자 문제를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 영향을 끼칠 핵심적 주제를 관통하기 때문이다.

한국인 원폭 피해자 문제는 기본적으로 소수자 인권 문제다. 이들은 식민통치의 가장 어두운 그늘 속에서 허덕이다 타국으로 방출됐으며 미증유의 재난을 당하고는 아무런 도움의 손길도 없이 고국으로 다시금 방출되어 더욱더 그늘진 삶을 이어가야 했다.

소수자 중의 소수자인 이들의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상적 의미의 ‘과거사’로만 다루어져서는 곤란하다. 이들은 경제적 빈곤뿐만 아니라 병든 몸까지 대물림되는 고통을 겪어왔다. 핵방사능으로 인한 유전병이야말로 원폭 피해자 문제의 핵심으로, 이 문제를 우리 사회 전체의 운명과 직결된 사안으로 격상시킨다.

유전병을 도외시하는 것은 이 현안을 피폭자 1세대의 불행으로 축소하는 것이며, 이는 오바마와 아베의 허울 좋은 반핵평화주의에 정확히 부응한다. 그들은 평화의 이름으로 불미스런 과거를 서둘러 봉합해 각자의 국익을 도모하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원한다. 일본에 침탈당하고 미국의 원폭으로 피해 입은 한국인들이 왜 그들의 왜곡된 논리에 편승해야 하는가.

원폭 피해자의 고통은 우리 모두를 짓누르는 현재적 고통임을 직시해야 한다. 핵은 세대를 뛰어넘어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는 절대악이다. 따라서 핵무기뿐만 아니라 핵발전소 및 그 인근의 해수담수화, 초고압 송전탑 등이 결국 한통속임을 인식하는 ‘탈핵’의 전망이 필요하다.

미국과 일본의 대통령이 히로시마를 함께 방문한 다음날, 부산의 민주공원에서는 한국원폭2세환우회 초대회장 김형률(1970~2005) 11주기 추모식이 조촐하게 열렸다. 고 김형률 회장이 우리에게 여전히 강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은 한국인 원폭 피해자 문제를 개인적 불행을 넘어 역사적이자 정치적인 문제로 인식했으며, 한발 더 나아가 보편적 인권 문제로 고양시켰기 때문이다. 그는 피해 당사자인 동시에 한 사람의 훌륭한 인권운동가였다. 아직 핵의 위험성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부재하던 시절에 그는 핵을 인간의 존엄성 자체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인식한 선각자였다.

김형률은 2005년 5월29일 세상과 이별하기 직전까지 같은 해 6월 임시국회 상정을 목표로 가칭 ‘한국원자폭탄피해자와 원자폭탄2세환우 등의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안의 주요 내용 및 조문 목차를 준비했다. 그 제정안 청원서에 그는 생전에 고뇌하고 투쟁했던 모든 것을 집약했다. 그가 죽음을 불사해 입법화하려 했던 특별법안은 2016년의 특별법안과는 격이 달랐다.

피해자 외면한 채 과거 봉합 안 돼

김형률의 특별법안은 우선적으로 방사능과 유전의 관련성에 대한 조사가 반드시 포함되는 실태 조사를 요구했다. 한국 정부는 유전병 여부를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다는 미국과 일본 정부의 입장에 무책임하게 기대어 현실에 눈감아왔다. 그러나 김형률이 끈질기게 요구해 국가인권위원회가 실시한 바 있는 ‘원폭피해자2세의 기초현황 및 건강실태 조사’ 결과가 있다. 2005년 2월14일 국가인권위원회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원폭 피해자 자녀들은 일반인보다 수십 배나 발병률이 높았다. 물론 이 실태 조사는 제한적이었지만, 그것이 면피의 구실이 될 수는 없다. 만약 국가가 이러한 결과를 수긍하지 않는다면, 방사능이 유전병을 일으키지 않음을 국가 스스로 과학적으로 증명해내야 마땅할 것이다.

김형률의 특별법안은 의료 지원을 실태 조사 뒤로 미뤄서는 안 된다는 점도 동시에 강조했다. 피폭자들의 건강은 면밀한 조사와 법적 공방을 기다릴 만큼 여유롭지 못하므로 이른바 ‘선 지원, 후 규명’의 해법이 지체 없이 적용돼야 한다는 것이다. 김형률은 원폭 피해자에 대한 모든 책임을 당사자와 가족에게 떠넘기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를 ‘국가의 직무유기’라고 준엄히 비판했다. 원폭 피해자는 단지 사회복지적 차원에서 구호를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부채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요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의료 지원에서 제일 먼저 가능한 것은 기존 병원시설을 이용한 정기 건강검진과 치료 지원이다. 정부의 의지만 있으면 이는 당장이라도 시행이 가능하다. 그런 다음 더 근본적이고 체계적인 의료 지원을 위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적십자원폭병원 같은 국립원폭전문병원의 설립을 요구했다. 의료 지원 다음으로는 생활 지원을 요구했다. 여기에는 특별수당·보건수당·생활수당이 포함되는데 생존 1세들의 기대수명이 길지 않고 2세들의 연령도 점차 고령화되는 점을 고려해 2세를 중심으로 한 생활 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최종적으로는 역사적 진상 조사와 기념사업을 요구했다. 그는 인간의 존엄성이 더 이상 짓밟히지 않기 위해서는 반인륜적 범죄와 그것이 낳은 참상이 후손에게 영원히 기억돼야 한다는 취지로, ‘한국의 히로시마’라고도 불리는 경상남도 합천에 ‘한국 원폭피해자의 인권과 평화를 위한 박물관’ 설립을 주장했다. 김형률은 합천의 박물관·기념관에서 자료 수집과 전시의 테두리를 넘어 국내외 다양한 반전·반핵 평화운동 세력들이 상호연대를 모색하는 날을 꿈꿨다. 이를 통해 ‘핵’이라는 절대악을 존립 가능하게 한 모든 탐욕과 거짓, 그리고 인간 경시 풍조를 이 세상에서 몰아낼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김형률 정신 잇는 특별법 만들어야

그러나 망자가 통곡할 현실이다. 자민족을 피해자로 호도하거나 원폭 투하의 책임을 핵무기 탓으로 돌리는 그릇된 반핵평화주의가 여전히 활개치고 있다. 미국과 일본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둘러댄다지만 한국의 특별법은 왜 한국인 원폭 피해자의 대물림되는 고통을 애써 외면하는지 엄중하게 따져 물을 필요가 있다. 고 김형률 회장이 10여 년 전에 준비했던 특별법안은 아직도 미래진행형이다.

전진성 부산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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