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사람이 탄 차는 2차선 도로의 중앙선을 여러 차례 넘나들며 구불구불한 길을 달렸다. 4월29일, 기자와 통역자는 인도네시아 발리의 공정여행 기업 ‘다섯기둥재단’(Five Pillars Foundation) 운영자 아이 푸투 위라구나(23·이하 위라), 그의 동료 아안(18)과 함께 발리 서부를 향해 깊숙이 들어가는 길이었다. 발리 서부는 발리 동남부 해안의 쿠타, 사누르, 누사두아, 발리섬 내륙 우붓 지역과 달리 대다수 주민들이 농업이나 어업에 종사하는 평범한 시골 지역이다.
이른 아침부터 이어진 여정에 우리 모두 조금 지쳐 있었다. 위라는 목이 칼칼한 듯 손으로 턱 아래를 쓸어내리며 “코코넛 워터 한 통만 마시면 좋겠다”고 했다. 서쪽 발리 프란착 마을 바닷가에 있는 ‘쿠르마아시’(Kurma Asih) 거북이 보호 단체를 찾아 마지막 인터뷰를 마친 다음이었다. 우리는 약속한 듯이 거북이 보호소 정문 으로 나가는 대신 반대편 바다로 향했다. 그곳에서 모두의 눈을 반짝이게 한 순간을 만났다.
검은 모래사장이 펼쳐진 바다는 사실 특별할 것이 없었다. 호화로운 파라솔이 펼쳐진 발리 동남부의 해변에 비하면 다소 썰렁하기까지 했다. 배 한 척이 일과를 마치고 들어오고 있었다. 한 가족으로 보이는 어부들이 허리춤까지 오는 바다로 뛰어들어 배를 밀었다. 바다 안에서는 파도가 힘을 보탰는지 좀 수월해 보였는데, 해변에 다다를수록 힘에 부치는 듯했다. 호리호리한 할아버지의 다리가 위태로워 보였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이게 진짜 발리죠!”</font></font>바닷가를 서성이던 이웃 몇 사람이 가족을 거들었다. 바위 그늘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기자도 엉덩이를 들썩이다 참견하는 것 같아 그냥 바라만 보고 있었다. 배가 뭍에 다다르자 뿔뿔이 흩어지는 사람들을 어부 가족이 불러세웠다. 잡아온 생선을 두세 마리씩 손에 쥐어주었다.
“소윤, 아까 배 밀어줬으면 물고기 얻을 수 있었을 텐데요.” 위라가 아쉬운 투로 얘기했다. 통역자 와얀 데위는 마침 잘됐다며 저녁 찬거리로 갓 잡은 생선을 샀다. 작은 고등어같이 생긴 생선이 1kg에 한국돈 2천원 정도 했다.
위라는 이곳에 여러 차례 방문했지만 어부들을 만난 건 처음이라고 했다. 그는 모든 과정을 카메라에 담으며 말했다. “이게 진짜 발리죠!”
<font size="4"><font color="#008ABD">리조트, 수영장 없는 맞춤여행 </font></font>그날 오전 11시, 우리는 발리 서쪽 굼브리 마을에서 만났다. 동남쪽 관광 지역인 사누르에서 2시간여를 달려 도착했다. 먼저 도착한 위라가 해변가의 작은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위라는 18살 때까지 농부였다. 위라가 운영하는 다섯기둥재단은 발리에서 비교적 소외된 서부 지역을 외부에 알리고 이곳 주민들이 그들 방식으로 삶을 지속 가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회사다. 여행 프로그램은 다양하다. 오래된 사원을 찾고, 발리 전통 옷감 짜기, 전통 놀이 체험 등을 한다. 발리 전통 음식 만들기 수업에도 참여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발리에서 먹는 대부분의 음식은 자카르타 등 다른 섬에서 건너온 것이다.
야생동물 및 거북이 보호 투어, 어선 채색 작업에 참여할 수도 있다. 마을의 청각장애인들과 문화 교류를 하고 평범한 농촌의 일상을 들여다볼 기회도 있다. 여행상품은 고객의 요청에 따라 맞춤 가능하다. 예컨대 ‘환경’을 주제로 여행하고 싶다면 정글 체험과 야생동물 구조 지역 방문, 거북이 보호 프로그램 참여 등으로 구성할 수 있다.
위라가 기자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How are you?= Apa kabar?(안녕하세요?), Thank you.= Terima kasih.(감사합니다)’ 따위가 적혀 있었다. “우리가 오늘 여행하는 지역의 사람들은 대부분 영어를 할 줄 몰라요. 이 지역의 삶과 문화를 들여다보고 싶어 방문했다면 이곳 말을 사용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위라가 말했다.
“테리마 카시!” 차에서 되뇌었던, 감사하다는 뜻의 말을 처음 꺼낸 곳은 예암방이라는 마을로 들어가는 길가였다. 이곳 사람들은 마을의 큰 사원을 지날 때 꼭 들러 신에게 기도를 한다. 사제가 나와 우리에게 성수를 뿌리고 물에 젖은 쌀알을 나눠줬다. 통역자 데위는 눈썹 사이 이마에, 위라는 이마와 목에 붙였다. 머리에 붙이는 이유는 좋은 생각과 판단을 하기 위해, 목에 붙이는 까닭은 좋은 말만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사제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떠났다.
코코넛 열매에 엉킨 섬유를 가공해 해외에 수출하는 ‘발리 코코’에 먼저 들렀다. 발리 사람들에게 코코넛은 버릴 것 하나 없는 과일이다. 물과 과육은 먹고, 코코넛을 한참 끓여 만든 기름은 요리용으로 피부관리용으로, 일상적으로 사용된다. 잎은 엮어서 매트로, 뿌리는 약재로 사용한다. 그래서 길가에 가로수처럼 서 있는 야자나무에도 하나같이 주인이 따로 있다. 코코넛 열매를 감싼 섬유는 질기고 튼튼해 카펫이나 그물, 밧줄을 만드는 데 쓰인다.
공장 주인 밀라는 사업하며 부딪히는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발리 사회적 기업가들의 모임에 갔다가 위라를 만났다. 그는 위라와 함께 발리 서부 청년들의 교육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쓴다. “이곳 젊은 친구들은 교육이 부족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인터넷 마케팅을 배우고 자기 것을 소개하고 팔 수 있는 기술을 배워야 해요.”
<font size="4"><font color="#008ABD">거북이 생태계 복원까지 15년</font></font>코코넛 워터로 만든 발리 전통 술 투왁(tuwak)을 한잔씩 나눠 마신 뒤 다시 여정에 올랐다.
염소똥을 수익으로 전환하는 친환경 축산을 하는 농가를 방문한 다음, 우리는 폐신문지로 발리 전통 상자를 만드는 수공업자 수아르나야사의 집을 찾았다. “작은 마을의 놀라운 사회적 기업가예요.” 그의 집으로 향하는 길에 위라가 말했다. 수아르나야사는 젬브라나 지역에서 에이즈 확산 방지 운동을 해왔던 활동가다.
수아르나야사와 마을 여성들이 거실에 앉아 신문지를 돌돌 말아 빨대 굵기의 긴 작대기를 만들고 있었다. 수아르나야사는 이것을 마을 주민들에게 하나에 150원 정도에 사서 ‘커번’이라는 발리 전통 상자를 만든다. 그가 사업을 시작하면서 마을 여성들에게 직업이 생겼다. 커번은 발리 사람들이 사원에 갈 때 과일이나 꽃과 같은 제물을 담아서 가는 상자다.
집집마다 사원을 짓고 사는 발리 사람들은 매일 아침 신에게 제물을 바친다. “대나무가 아닌 다른 걸로 커번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통역자 데위가 말했다. 수아르나야사의 커번은 발리에서 꽤 유명해져 우리가 인터뷰하기 직전에도 지역 방송국에서 촬영하고 갔다고 했다.
수아르나야사의 집을 뒤로하고 한참을 더 달리자 다시 바다가 보였다. 우리가 발리의 어부 가족을 만났던 바닷가다. 작은 어촌인 프란착 마을에 있는 쿠르마아시 거북이 보호단체는 씨가 마른 발리의 거북이들을 보호하고 개체 수를 늘리는 활동을 한다.
이곳 활동가로 일하는 이코만 구나완이 검은 모래밭 위에 작은 천막을 쳐놓은 곳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알 낳은 날’ ‘출생 예정일’이라고 쓰인 나무 팻말이 여러 개 꽂혀 있었다. 한 팻말 아래 탁구공만 한 알이 65개 정도 묻혀 있다고 했다.
거북이 알은 50일쯤 지나면 부화한다. 거북이가 알을 깨고 나오면 일주일 정도는 날 때부터 품고 있던 영양분으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지내다가, 이후에는 사람들이 주는 생선 같은 것을 받아먹는다. 이를테면 ‘거북이 산부인과’ 신생아실쯤 되는 셈이다.
한국돈으로 5만원 정도 단체에 기부하면 ‘거북이 부모’가 될 수 있다. 단체는 알을 묻을 때부터 거북이가 태어나 바다로 돌아갈 때까지 모든 과정을 전자우편을 통해 입양자와 공유한다. 몇몇 후원자는 긴 휴가를 내고 거북이가 바다로 돌아가는 시간을 함께 보내기도 한다.
새파랗던 하늘이 옅어지더니 층층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돌아가는 길 바닷가 식당의 평상에 앉아 위라가 말했다. “아름답죠?” 위라가 코코넛 워터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발리 서부 사람들은 이곳이 이토록 아름다운지 몰라요.”
<font size="4"><font color="#008ABD">50km 바닷가 마을을 지켜내는 힘</font></font>위라는 이곳이 발리 동남부 지역처럼 자본에 의해 무참히 개발되지 않길 바란다고 했다. 발리 서부에 50km 넘게 이어진 깨끗한 해변과 관광지의 해변은 대조적이다. 호텔이 관리하는 사설 해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쓰레기가 모래사장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다.
“사람들은 여기를 돌보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면 교육을 받아야 해요. 저는 공정여행을 통해 공동체를 되살리고, 이들을 외부 세계와 이어가는 역할을 할 거예요. 그러려면 앞으로 할 일이 아주 많아요.”
발리에서는 해가 기울고 나면 순식간에 시커먼 어둠이 내려앉았다. 우리가 헤어질 때쯤엔 짧은 골목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방이 깜깜해졌다. 그때까지도 위라는 할 일을 다 마치지 않은 듯 동료들을 만나러 바쁜 걸음을 재촉하며 달려갔다.
발리(인도네시아)=<font color="#008ABD">글·사진 </font>신소윤 기자 yoon@hani.co.kr※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font color="#C21A1A">▶ 바로가기</font>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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