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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올 봄, 당당히 곁에서

아픈 기억 똑바로 응시하고 드러내 상처를 치유하는 용기… 세월호 참사 희생자 형제자매와 생존학생들의 글쓰기
등록 2016-05-21 07:57 수정 2020-05-02 19:28
세월호 참사 희생자 박성호 학생의 첫째누나 보나씨(왼쪽)와 남지현 학생의 언니 서현씨(오른쪽)가 서울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에서 만나 세월호 참사 생존학생·형제자매의 이야기를 담은 책 <다시 봄이 올 거예요>를 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세월호 참사 희생자 박성호 학생의 첫째누나 보나씨(왼쪽)와 남지현 학생의 언니 서현씨(오른쪽)가 서울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에서 만나 세월호 참사 생존학생·형제자매의 이야기를 담은 책 <다시 봄이 올 거예요>를 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며칠 전, 경기도 안산 단원고와 경기교육청이 단원고 세월호 희생자 250명을 학부모와 상의 없이, 그것도 비밀리에 제적 처리를 한 사실이 밝혀졌다. 거기다가 재학생 부모들은 유가족들이 어렵게 존치교실 이전 계획에 협의해주자마자 존치교실 내 생존학생들의 책상과 의자를 치우는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세월호 참사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의 마음에 공감하고, 참사의 진실을 밝히는 것보다는 끔찍한 기억을 지우고 진실을 덮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저희 스스로 살아 나왔거든요”

4·16 세월호 참사 이후 주말이면 가족과 함께 서울 광화문으로 갔다. 그때마다 가장 괴로웠던 것은 세월호 침몰 직전 단원고 학생들이 가족에게 보낸 스마트폰 메시지, 동영상을 보고 듣는 것이었다. 를 읽으며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도 생존학생들이 그날을 증언하는 부분이었다.

제 명치 정도까지 물이 찼어요. 참았는데도 진짜 “아, 차다” 이 소리가 나올 정도로 되게 차가웠어요. 위에 지윤이가 복도에 있었어요. “시우야, 잡아.” 손을 내민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 손을 잡았어요. 문 위로 나오기 전에 이미 캐비닛이 가라앉고 있었기 때문에 나오는 게 쉽지 않았어요. 다른 애들이 비명 지르면서 허우적대는 거예요. 제 발밑에서 애들이 손을 허우적대는 게 다 느껴졌어요. 저는 손을 쓸 수 없으니까 일단 제 발이라도 잡으라고 가만있었어요. 그러니까 애들이 발을 잡았어요. 계속 올라가고 있는데 애들이… 제 발을 놓쳤어요. (중략) 솔직히 사고 났을 때 저는 영화에서처럼 해경들이 멋지게 들어와서 “어서 내 손을 잡으세요” 하고 구해줄 줄 알았어요. 정부도 바로 우리를 따뜻하게 맞이하면서 모든 일을 해결해줄 줄 알았고요. -이시우(생존학생)
생각해보면 구조된 게 아니라 살아나온 거죠. 해경이 하나도 안 도와줘서 저희들이 스스로 나왔거든요. 배 안에서는 다 애들끼리 해결한 거 같아요. -김희은(생존학생)

이시우 학생이 말했던 것처럼 정부와 한국 사회는 당연히 스스로 살아나온 생존자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그들이 평범한 일상을 되찾을 수 있게 최선을 다해야 했고, 참사의 진실을 밝히고 재발을 방지하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했다. 뒤늦게라도 아직까지는 이 사회에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적 애도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세월호 희생학생의 형제자매와 생존학생들이 또래 청소년들과 슬픔을 나누고 함께 진실을 밝혀 새로운 희망을 찾아갈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해버렸다.

그동안 우리는 세월호 참사를 막을 수 있는 기회를 수도 없이 놓쳤다. 대구지하철 사고,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씨랜드 화재 사고, 해병대 캠프 사고, 경주 리조트 붕괴, 용산 참사에 대해 철저한 사고 조사와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를 집요하게 요구하지 못했고 끝까지 감시하지 않았다. 언제나 고통과 진실 규명은 당사자들의 몫이었다. 결국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장성 요양원 화재, 고양 터미널 화재, 오룡호 침몰 사고가 이어졌고, 메르스 사태까지 벌어졌으나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그 모든 사건의 원인을 규명하고 감시해야 할 주체가, 책임자를 법정에 세워야 할 주체가 우리라는 것을 쉽게 잊었다. 그러나 세월호 유가족들과 생존학생들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자신들의 불행을 누군가가 되풀이하지 않게 하기 위해 싸웠다.

귀 기울이고 함께 우는 이들은 위급한 탈출의 순간에도 서로를 보살폈고 사람들을 구했다. 누군가를 위해 힘을 내었고, 부모를 보살피러 가족 안에서의 역할을 조절했다. …이들에게는 타인의 상처에 감응하는 힘이 있었다. “오래 걸릴 것 같아요.” 이 슬픈 말 뒤에 따라붙은 말, “그래도 할 수 있는 걸 해야죠”. 지금껏 할 수 있는 걸 해왔던 이들이 또다시 할 수 있는 걸 찾아나서고 있었다. 어린 피해자들을 대하는 사회의 태도는 무능하고 미성숙했지만, 이들이 보내온 시간은 성숙했다. -배경내(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진상 규명은… 저희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세월호 참사가… 정말로 책임질 사람이 책임지는 사회가 되는 전환점이 됐으면 좋겠어요. -박준혁(생존학생)
대학생 되면 1인 피켓 시위 이런 거 전국적으로 다니는 게 제 버킷리스트예요. 부모님이 끝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만약에 부모님 세대가 갈 때까지 이 일이 해결 안 돼도 형제자매들이 할 거라고, 계속 이어질 거라고… 사람들이 정치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김재영(세월호 희생자 김동영의 동생)
애들이 죽은 건, 침묵하는 사람들 때문이기도 하잖아요. 이 시대의 어른들, 제가 그런 사람이 된다면, 그래서 또 이런 참사 일어난다면 죽는 것보다 더 비극적일 것 같아요. 그렇게 안 살기로 다짐했어요. -박예나(세월호 희생자 박성호의 둘째누나)
내가 빈민지역과 농촌에서 30년 동안 만나온 아이들은 어린 시절 겪은 폭력과 학대, 유기로 마음에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었다. 그 아이들이 상처를 치유해가는 과정 중 하나가 글쓰기였다. 글을 쓰는 것은 아픈 기억과 마주하는 일이고, 그로 인한 상처를 타인에게 드러내는 일이었다. 어렵게 용기를 낸 아이들은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울어주는 친구들 속에서 마음의 힘을 되찾았고, 지금보다 나은 삶을 찾아가는 길의 동지가 되었다. 를 읽는 내내 이 책이 우리의 글쓰기를 닮았다고 느꼈다. 는 세월호 참사로 형제와 자매를 잃은 형·누나·동생들이, 세월호에서 살아나온 친구들이 또래들에게 “어른들이 만들지 못한 안전한 세상, 지금보다 나은 세상을 함께 만들어보자”고 내미는 손이다.
제가 살고 싶은 삶은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하는 거예요. 이렇게 살지 않으면 동생한테 미안할 것 같기도 하고, 이 일을 겪고 나서 더 확신이 들어요. -박예나(세월호 희생자 박성호의 둘째누나)
아직은 멀었어요. 근데 실패를 하더라도 일단 해보고 싶어요. 실패해도 그걸 발판 삼아 하나씩 하나씩… 넘어지는 법은 이미 알고 있으니까 이제 일어서는 법을 알아야죠. 내가 이런 큰일을 겪었는데 무엇을 해야만 하나. 어떤 삶을 살아야 하나 생각을 많이 했어요. 희망을 주는 사람? 지금은 확신이 없지만 나중에는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거나 해결해주거나 아님 같이하고 싶다’ 그런 꿈을 갖고 있는 거예요. -조태준(생존학생)
저는 그 잘못에 대해 책임지는 사람? 양심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박준혁(생존학생)
우리가 동료로 나설 때

세월호 희생자 가족과 생존자들은 지난 2년 동안, 세월호 참사의 끔찍한 기억과 싸우면서도 진실을 위한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로 동생을 잃은 남서현씨는 세월호 참사 당사자들에게는 세월호 이전의 삶과 세월호 이후의 삶이 같을 수 없다고 말했다. 자신들은 이제 부모님의 동료가 되어 진실에 다가가겠다고 당당하게 선언한다. 이제는 우리가 생존학생과 유가족의 동료로 나설 때다. ‘다시 봄이 올 거’라고 믿는 그들 곁에 서서, 다시 맞을 봄을 함께 준비해야 한다.

김중미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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