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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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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생한 시민의 시장, 누구의 땅인가

죽은 공간에 숨결 불어넣으며 주민들 힘으로 꾸려온 대안경제 장터 ‘늘장’… 빈 땅 허락하지 않는 자본의 도시 개발 욕망
등록 2016-03-01 16:55 수정 2020-05-03 04:28
지난해 12월31일부로 폐장 통보를 받은 ‘늘장’은 현재 동계 휴장 상태다. 입점 상인들과 이곳을 찾던 단골손님들은 날이 풀리면 다시 지난봄처럼 시장이 문을 열길 바란다. 류우종 기자

지난해 12월31일부로 폐장 통보를 받은 ‘늘장’은 현재 동계 휴장 상태다. 입점 상인들과 이곳을 찾던 단골손님들은 날이 풀리면 다시 지난봄처럼 시장이 문을 열길 바란다. 류우종 기자

도시 한가운데 손바닥만큼 작은 시장이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서 한 바퀴 고개를 휘 돌면 한눈에 무엇이 있는지 다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여느 시장이 그렇듯 하루 종일 들어앉아 있어도 하나하나 다 들여다보기 힘들 정도로 재미있는 것이 많았다.

적정기술을 이용한 화로에 피자를 구워 먹는 가게가 있고, 일일연기교습소가 열리는 극장이 있었다. 쓰던 물건을 가져다놓고 다른 사람들이 두고 간 물건을 사가는 가게도 있었다. 그림책도서관, 영화도서관이 있고, 타로상담소, 작가들이 만든 수공예품, 친환경 면제품을 파는 곳이 있었다. 질 좋은 농산물을 파는 가게도 있었다. 주말에는 지역 주민들이 크고 작은 중고 물품이며 손으로 만든 작품을 들고 나와 ‘플리마켓’(벼룩시장)을 열었다.

시장의 이름은 ‘늘장’. 누구에게나 늘 열려 있는 공간이라는, 우리가 아는 뜻 그대로의 시장이다. 늘장은 서울 마포구 지하철 5·6호선 공덕역 인근에 2013년 8월 문을 열었다. 시장 터 인근에서 경의선 폐선 부지 개발 공사가 한창이던 때였다. 오래전 시장이 그래왔듯 빈 땅에 사람들이 모여 물건을 하나둘 풀어놓자 지나가는 사람들이 눈길을 주고, 모여들고, 북적이기 시작했다.

목마른 사람들이 판 오아시스

늘장을 들락거리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늘장을 “오아시스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어찌 보면 이곳은 일상적으로 재능과 자원이 교류하고 공유되는 문화예술공간에 목이 말랐던 사람들이 판, 도시의 오아시스였다. 공사판과 빌딩숲 한가운데서 보기 힘든 상설 야외 시장인데다, 문화적 요소가 많아 여러 매체에 대안시장으로 소개됐다.

하지만 늘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외로운 섬이 되고 말았다. 자본의 도시 개발 욕망이 모래바람을 일으키더니 손바닥만 하던 오아시스를 덮어버렸다. 현재 늘장은 마포구청으로부터 계약 만료 통보를 받고 휴장 상태이며 그 자리는 대기업이 출자한 회사가 개발사업을 시행할 예정이다.

2015년 10월29일, 마포구청으로부터 늘장협동조합 대표자를 수신자로 한 공문이 날아왔다. 제목은 ‘공덕역 개발사업 B부지(마포벼룩시장)의 개발사업 시행에 따른 조치사항 처리 협조 요청’이다. 전기가 부족해 겨울에는 난방 문제로 휴장을 하는 늘장은, 크리스마스 기획 마켓을 준비하며 한 해를 마무리할 계획이었다. 즐거운 고민이 오가는 와중에 갑작스러운 요청으로 시장 사람들은 황망해졌다.

폐장 통보를 받고 난 다음, 늘장의 타로상담소 ‘사람인타로’에서 일한 윤국일(33)씨는 어느 날 한숨을 쉬며 타로카드를 펼쳐보았다. 타로는 어떤 답을 내놓았을까. 2월25일 늘장 인근의 사람인타로 사무실에서 과 만난 윤국일씨는 웃으며 결과를 알려줄 수 없다고 말했지만, 어쨌거나 이곳 상담소 사람들도 다시 늘장에서 사람들을 만나길 염원하고 있었다.

“늘장에서의 시간은 정말 좋았어요. 사람들은 서울에 이런 장소가 없다고 얘기했어요.” 윤국일씨가 늘장이 좋았던 이유는, 이곳이 불특정 다수의 행인이 오가는 시장이라는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시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가벼운 고민부터 심각한 고민, 타로를 잘 아는 사람부터 모르는 사람까지 다양했다. 타로가 길흉화복을 점치는 도구가 아닌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소통하는 수단이 되길 바라는 이들의 모임인 ‘사람인타로’와 잘 맞는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손님들의 연령대도 넓었다. 마켓의 다른 셀러들이 그날의 고민을 상담하고 자기가 파는 물건을 주기도 했다. 윤씨는 늘장에서 오래전에 알던 친한 형을 우연히 만나 점괘를 풀어주기도 했다. 그렇게 시장은 필연과 우연이 쌓이는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바닥에 앉아 그림책 보던 아이들

늘장의 그림책미술관시민모임은 꼬마 단골손님이 가장 많은 곳이었다. 아이들이 시장 바닥에 앉아 그림을 그리며 놀고 있다. 한명희 제공

늘장의 그림책미술관시민모임은 꼬마 단골손님이 가장 많은 곳이었다. 아이들이 시장 바닥에 앉아 그림을 그리며 놀고 있다. 한명희 제공

개인적으로 잊지 못할 시간도 있다. “사무실이 많은 동네라 밤이 되면 정적이 흘러요. 여기는 철도가 있던 길이니까, 뻥 뚫려 있었어요. 옆은 빌딩숲이라 큰 건물들이 절벽처럼 서 있고, 그 사이로 별과 달이 떠요. 서울에 그런 풍경이 없죠. 그때는 시도 때도 없이 봐서 사진 한 장 안 찍었는데, 지금은 달이 보이던 그 자리에 빌딩이 건축 중이라 더 볼 수 없게 됐어요. 사방이 건물로 포위됐죠.”

늘장에서 ‘그림책미술관시민모임’을 운영하던 한명희씨도 사람들을 만나는 공간으로서 시장이 좋았다. 한씨는 시장을 “새로운 발견을 위한 자유가 있는 곳, 우연히 마음에 맞는 물건을 만날 수 있는 기쁨을 주는 곳”이라고 정의했다. 그림책미술관시민모임 사람들은 늘장에서 책을 소개하고 추천하면서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다.

햇볕을 쬐며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보고 싶은 책을 실컷 볼 수 있는 안전한 곳이 드물다보니 아이들에게 유독 인기가 많았다. 얼굴과 목소리가 떠오르는 소소한 인연들이 하나둘 머리를 스쳐간다. “아이들이 기억납니다. 가끔 아이들이 엄마·아빠랑 같이 와서 그림책을 읽다가 가기도 하는데, 부모님이 아무리 가자고 해도 일어나지 않는 아이들이 있었어요. 아이들끼리만 와서 물 한잔 얻어 마시고 그림책 보다 가는 무리도 있었고, 주말마다 오던 단골 꼬마 손님들도 있었어요. 아이들과 그림책에서 본 그림을 분필로 바닥에 그리기도 했고요.”

그림책을 보다 눈물을 훔치는 어른들도 있었다. “한 중년 남성은 그림책이 아이들만 읽는 책인 줄 알았는데 정말 재미있다며 혼자 오셔서 30~40분 그림책만 읽다 가시기도 했어요. 한번은 청년활동가들이 늘장에 견학을 와서 그림책 한 권을 읽어주었어요. 라는 그림책이었습니다. 청년들이 열중해서 듣더니 급기야 몇몇은 눈물을 글썽거렸어요.”

그렇게 공간과 사람들이 연결되어가면서 새로운 프로그램이 하나둘 추가됐다. 2014년 봄부터 ‘청년들의 그림책 읽기 모임’이 시작됐다. 참여자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을 고르다 점심시간을 놓쳐버렸다” “하루 종일 힘든 일이 많았는데 그림책 모임 가는 날이라 즐겁게 버텼다”고 말했다.

집에 쌓아두었던 그림책을 들고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자꾸만 그림책을 기증하는 사람이 많아 ‘돌고 도는 그림책’이라는 코너를 한켠에 마련했다. 절판되거나 오래돼서 구하기 어려웠던 좋은 책도 종종 나왔다. 그런 책들은 인기가 좋아 금방 주인을 만나 새로운 책장에 꽂혔다.

마실 나와서 ‘돌고 도는 물건’ 사가고

장에 가면 신선한 먹거리며 구경거리가 넘쳤다. 주민들은 인근 대형마트에서 찾을 수 없는 다른 것을 얻으러 늘장을 찾았다. 최정한 제공

장에 가면 신선한 먹거리며 구경거리가 넘쳤다. 주민들은 인근 대형마트에서 찾을 수 없는 다른 것을 얻으러 늘장을 찾았다. 최정한 제공

돌고 도는 책이 있다면, 돌고 도는 오래된 물건들도 있었다. 늘장에서 공동체형 중고 문화 마켓 ‘자락당’을 운영한 김성경 대표는 그곳에서 재사용 문화와 공유 문화를 확장하는 사업을 실험했다. 실험 매장의 성공으로 서울대학교 캠퍼스 안에 정식 1호 매장을 열기도 했다.

자락당은 늘장 인근 주민들이 쓰던 물건을 갖고 와서 사고 팔고 바꾸고 위탁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용객들은 안 쓰는 물건을 팔아 경제적 보상을 얻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관계와 이야기도 쌓아나갔다. 단골처럼 매일 오는 사람이 늘고,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듯 오는 사람도 있었다. 오면 한두 시간씩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다른 손님들 구경도 하고, 사람들이 새로 갖고 오는 물건도 구경했다.

자락당 김성경씨는 경의선 폐선 부지에 사회적 장터를 꾸미겠다는 공고를 보고 입주했다. 늘장은 마포 지역 사회적 기업과 협동조합이 주축이 되어 경의선 폐선 유휴지에 꾸린, 행정 예산 지원을 받지 않는 사회적 경제 장터로 출발했다. 김성경씨는 “시민들의 소유라고 생각했던 공유지가 사유화되는 것은 문제인 것 같다”고 말했다.

참고로 당시 늘장 터를 포함한 일대는 2011년 서울시가 발표한 ‘경의선 철도 폐선 유휴부지 공원화 계획’에 포함되는 땅이었다. 서울에서 신의주를 연결하는 경의선 철도의 일부가 지하화하면서 용산에서 마포까지 지상부 철도 구간을 숲길 등 녹지로 조성한다는 계획이었다. 늘장 터의 소유권은 한국철도시설공단에 있다. 사실상 공유지에 가깝다.

늘장협동조합 쪽은 지난해 10월28일 마포구청으로부터 철거 요구 공문을 받은 이후, 12월3일 구청에 공문을 보내 “사회적 경제에 대한 몰이해와 비협조적인 태도, 관리통제 일변도의 소통 부재로 일관해온 구청의 처사에 깊은 유감과 함께 실망감”을 표한다고 불만을 제기한 한편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사회적 경제에 대한 진정성 있는 고민과 대안을 모색”하자며 면담을 제안했다.

하지만 공원이 조성되고 값비싼 아파트가 들어서고 번쩍이는 빌딩으로 둘러싸일 때부터 떠밀림은 예고된 재난이었다. 지난 1월28일 구청에서 돌아온 답변은 단호했다. “한국철도시설공단의 개발 계획에 따라 2016년도 벼룩시장을 운영할 수 없게 되고 수탁기간 또한 2015.12.31자로 만료”했다며 원상 복구를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늘장 쪽에서는 계약 당시 5년간 장터를 여는 것을 구두로 보장받았다고도 했다. 하지만 마포구청 쪽은 “모집 공고시에 부지 소유자인 한국철도시설공단이 개발사업을 착공(부지 반환 요청)할 시 사업(위탁) 기간이 단축될 수 있음을 명시”했다고 에 알려왔다.

주차장에 떠밀린 자생적 시민 공간

“지역에서 이런 시민 공간이 자리잡는 데는 많은 시간과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해요. 1~2년의 시간은 짧다고 느껴요. (늘장의) 개별 공간들이 자신들이 가진 것을 소진해가면서 여기까지 왔어요. 이제 조금 시민들과 관계가 쌓여가나 싶었는데….” 그림책미술관시민모임의 한명희씨의 말이다.

이곳을 빌딩숲 사이 오아시스 같은 곳이라 말했던 사람들은 이제 어디에 가서 목을 축여야 할까. 늘장이 있던 자리에는 주차 및 문화 시설이 들어설 예정이라고 한다. 늘장 상인들을 포함한 시민들은 늘장 터를 포함한 경의선 폐선 부지 개발 방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경의선 공유지 시민행동’ 모임을 만들어 목소리를 모으고 있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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