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하다. 바람이 분다. 계절풍이다. 선거의 계절. 4월 국회의원 총선거, 2017년 12월 대통령 선거. 바람에 정치색이 물드는 시절이 다시 들이닥쳤다.
2016년 새해 첫 선거는 농협중앙회장 선거다. 1월12일 열린다. 농협중앙회장을 두고 ‘비상근 명예직’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이는 허구에 가깝다. 수억원의 연봉을 받고, 직원 수천 명의 임면권을 틀어쥐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총회·이사회의 의장도 맡는다. 그런데 직선제가 아닌 간선제다. 무언가 이상하다.
농협중앙회장 선거는 1988년 민주화 열풍을 타고 대통령 임명제에서 조합장 직선제로 바뀌었다. 그런데 2009년 이명박 정부에서 다시 간선제로 되돌려버렸다. 비리 차단과 선거 과열 예방이 이유였지만 허무맹랑한 논리였다. 전국 조합장 1140여 명 가운데 선거권이 있는 대의원은 292명이다. 선거운동 기간은 13일에 불과하다. 전체 조합장의 4분의 1에 불과한 이들이 농협중앙회 대강당에 모여 투표를 한다. 채 1시간도 안 걸린다. 선거판이 열리면 300명도 안 되는 대의원을 포섭하기 위한 후보들 사이의 책략이 난무한다. 간선제로 뒷걸음친 뒤 선거는 더 혼탁해졌다.
이명박 정부 때 직선제→간선제 퇴보
2015년 12월30일 서울 지역재단 사무실에서 만난 박진도 이사장. 박승화 기자
비리 차단도 헛구호였다. 1988년부터 이어진 ‘민선 중앙회장’ 3명이 모두 비자금 조성이나 뇌물 수수 혐의로 구속돼 감옥을 드나들었다. 최원병 현 회장 또한 1600억원대 리조트 특혜 대출 의혹 등과 관련해 검찰의 수사 선상에 오르기도 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농협중앙회장=감옥행’이라는 등식마저 나올 정도다. 직선제를 간선제로 퇴행시킨 이명박 정부의 명분은 사실상 거짓에 불과했던 셈이다. 농협중앙회 쪽은 2015년 말 검찰 수사가 종결됐고 최 회장에 대해 '혐의 없음'으로 결론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그사이 “중앙회는 회원의 공동이익의 증진과 그 건전한 발전을 도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농업협동조합법 제113조)는 법 규정은 휴지 조각이 돼버렸다. 농협중앙회는 조합원 234만여 명을 상대로 ‘갑질과 무책임’으로 일관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2015년 12월30일 서울 지역재단 사무실에서 박진도(64) 이사장을 만났다. 박 이사장은 ‘좋은 농협 만들기 국민운동본부’(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다. 운동본부는 2015년 4월 농협 개혁을 위해 농업계와 소비자 단체 등 시민사회, 전문가들이 두루 모여 출범한 단체다.
박 이사장은 말했다. “농림축산식품부·농협중앙회·청와대의 ‘삼각동맹’이 농협 개혁을 가로막는 중심이다.” 그리고 힘주어 말했다. “지금의 농협중앙회장 선거는 유신 시절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장충체육관에 모여 토론도 없이 무기명 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하던 것과 다를 바 없다.”
농협중앙회장에 가장 관심이 많은 데는 청와대다. 총선·대선을 앞두고 누가 회장이 되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전에 회장 선거 과정을 보면 청와대와 친분이 가장 중요했다.
무소불위의 권한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견제가 전혀 없다. 대의원회나 이사회에서 회장이 하려는 일을 반대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말로는 비상임이라고 하는데 비상임 회장에게 연봉을 7억원씩 준다는 게 말이 되나. 말만 비상임이지 중앙회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회장의 막강한 권한은 중앙회의 권한에서 나오는 거다. 해마다 교육지원사업 명목으로 지역 회원조합들에 몇조원씩을 집행한다. 얼마 안 되는 주식으로 그룹 전체를 지배하는 재벌 총수와 다를 바 없다.
군림하는 중요 수단이 교육지원사업(조합상호지원자금)이다. 회원조합들에 무이자 자금을 지원하는 거다. 조합당 평균 75억원씩 된다. 1년에 당기순이익을 2억원도 못 내는 조합이 많다. 이런 조합 입장에서 볼 때 엄청 큰돈이다.
조합장이 중앙회의 이사인 곳에는 120억원씩 준다. 회장의 ‘통치자금’인 거다. 반대로 중앙회가 해야 할 농정 활동은 전혀 안 하고 있다.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이 국가 전체로 이익이 된다, 안 된다 논쟁이 있지만 농민들한테 이익이 안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중앙회가 한-중 FTA에 반대한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다. 농민 백남기씨가 2015년 11월14일 민중총궐기 때 경찰 물대포에 맞아 지금도 사경을 헤매고 있다. 농민을 위한 중앙회라면 농민의 정당한 의사표현을 경찰이 과잉 진압했다고 말해야 하는데 역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
농협법 제113조에 나와 있다. 회원의 공동이익의 증진이다. 그러나 중앙회는 중앙회의 자체 이익을 극대화하는 조직으로 변질됐다. 2012년 신용사업과 경제사업을 분리해 지주회사가 되면서 더욱 그렇게 됐다. 중앙회가 경제사업은 안 하고 돈장사(신용사업)만 한다는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 말이다. 경제사업 잘한다고 회원조합이나 조합원의 이익이 반드시 되는 건 아니다. 중앙회가 이마트에 농산물을 잘 판다고 농민들의 직접 이익이 되지 않는다. 사업 내용 자체에 회원조합과 조합원의 이익이 반영돼야 한다.
시중은행과 똑같다. 중앙회는 원래 일반금융이 아니라 상호금융 중심이 돼야 한다. 상호금융을 활성화해서 조합원들의 대출금리를 내려줘야 한다. 하지만 금리가 시중은행보다 더 높다. 조합원 신용대출 비율은 2004년 14.2%에서 2013년 9.2%로 오히려 줄었다. 지주회사 개편 뒤 지역조합들은 보험 모집책이 돼버렸다. 카드 부문도 중앙회와 지역조합 사이에 갈등이 많다. 회원조합이 카드 모집을 하면 중앙회에서 수수료를 주는 구조인데, 정작 대금 연체 등 문제가 생기면 회원조합이 다 책임을 져야 한다. 말도 안 되는 구조다. 회원조합들의 권한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사업구조가 개편돼야 한다.
농협중앙회장 선거를 앞두고 2015년 11월25일 농협 전남지역본부에서 열린 선거 중립 다짐 결의대회. 연합뉴스
2015년 3월11일 처음으로 전국 조합장 동시선거가 열렸다. ‘깜깜이 선거’였다. 정책선거를 전혀 할 수 없었다. 2014년 6월 제정된 ‘공공단체 등 위탁선거에 관한 법률’에서 예비후보 등록이나 후보자 초청 토론회 등을 모두 금지했기 때문이다. 농협중앙회장 선거도 대의원 간선제에서 조합원들의 총의가 반영된 조합장 직선제로 바꾸려고 법안까지 발의됐지만 개정되지 못했다. 현재 시스템이 농식품부·청와대·중앙회가 다 원하는 시스템인 거다. 이들의 ‘삼각동맹’이 농협 개혁을 가로막고 있다. 이번 선거도 후보자 본인 말고는 누구도 선거운동을 할 수 없다.
농업의 중요한 기능은 안전한 농산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식량 자급률은 25%, 칼로리 자급률은 40% 정도다. 국민의 먹거리 대부분이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안전성 문제를 담보할 수 없는 실정이다. 앞으로 농업·농촌이 해야 할 일은 도시 청년을 위한 일자리 창출이다. 가령 마케팅이나 회계 담당 청년이 필요한데 막상 농촌에 사람이 없다. 농촌이 도시민들을 위해 휴식·여가 공간을 제공하는 것도 중요하다. 농업·농촌이 붕괴돼서 이런 기능들을 못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소농 구조인 우리나라에서 협동조합이야말로 소농이 살아남는 길이다. 농협이 제 역할을 해야 소농이 생존할 수 있다. 농협 개혁이 농민만의 문제인 것도 아니다. 재벌 개혁이 해당 기업 종업원만의 문제가 아닌 것과 같다. 재벌이 우리 경제를 다 차지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재벌 개혁이 중요하지 않은가. 농협중앙회장의 권한이 막강한 만큼 제대로 뽑아야 한다.
농민들 바람은 하나다. “농협을 농민에게 돌려줘야 한다.”
1만1853명. ‘좋은 농협 만들기 국민운동본부’(운동본부)가 2015년 9~11월 벌인 범국민 서명운동에 참여한 이들이다. 서명운동의 목적은 ‘농협중앙회 개혁과 중앙회장 직선제 도입’이었다. 그러나 12월24일 개정된 ‘공공단체 등 위탁선거에 관한 법률’에 중앙회장 직선제는 관철되지 못했다. 투표에 앞서 후보자들의 소견 발표를 허용하는 조항이 신설됐을 뿐이다. 그나마 발표 시간은 후보당 10분 안팎이다.
선거제도가 개선되지는 못했지만 운동본부는 후보들을 상대로 매니페스토 운동에 나섰다. 운동본부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3·11 전국 동시선거 정책선거 실천 전국운동본부’가 성과를 거둔 전례도 있다. 2015년 3월11일 열린 전국 조합장 동시선거 당시 운동본부는 공약권고안을 마련하고 후보자 협약을 이끌었다. 모두 141개 조합에서 187명의 후보가 협약에 참여했다. 이들 가운데 60명이 조합장으로 당선된 것이다.
운동본부에서 마련한 농협중앙회장 후보자 공약권고안은 6개 항목(총 24가지)으로 짜였다.
1. 회원조합과 조합원의 권한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의사결정 구조 개선
2. 회원조합 지원을 통해 조합원 소득 증대를 위한 경제사업 추진
3. 상호금융 활성화와 조합원 대출금리 인하 추진
4. 중앙회 고유 기능인 교육지도사업 강화
5. 회원조합 권한 강화와 조합원 실익 증대를 위한 사업구조 개편
6. 선거제도의 민주적 개선과 공정선거 약속
이번 선거 출마자는 모두 6명이다. 농협중앙회와 지역조합 혁신에 공감한 조합장들이 2014년 2월 만든 ‘정명회’ 회원인 김순재(51) 전 창원 동읍농협 조합장도 출마해 눈길을 끈다.
운동본부는 12월29일 후보자 번호 추첨 때 공약권고안을 전달했다. 1월2일까지 후보자 쪽으로부터 공약권고안 동의와 협약식 참여 여부를 확인한 뒤 1월5일 협약식을 열 참이다. 협약 결과는 일간신문과 농업전문지 등 언론에 공개하고 전국 조합장들에게도 알린다는 계획이다. 이를 통해 농협 개혁을 위한 정책선거를 유도한다는 게 운동본부의 목표다.
농협중앙회 임직원의 평균 연봉이 2007~2011년 5년 사이 4526만원 오른 8838만원(‘페이오픈’ 2011년 조사 자료)으로, 갑절 가까이 상승했다는 지적도 있다. 2012년 기준 억대 연봉자가 전체 임직원의 12.2%에 이른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에 대해 농협중앙회 쪽은 "최근 들어 줄곧 임금을 동결해왔으며, 급격한 임금 상승은 사실이 아니다"라는 입장이다. 반면 농업소득은 2004~2013년 1205만원에서 1003만원으로 추락했다. 10년간 물가상승률을 따지면 사실상 반토막이 난 셈이다. 농협중앙회 개혁이 농협 개혁의 출발점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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