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3주체’인 학생, 학부모, 교사는 국정 역사 교과서로 인해 헌법적 기본권에 직접 피해를 보는 이들이다. 지난 11월20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조합원들이 서울 중구 태평로에서 열린 한 집회에서 정부에 ‘국정교과서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정제도보다는 검인정제도를, 검인정제도보다는 자유발행제를 채택하는 것이 교육의 자주성,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고 있는 헌법의 이념을 고양하고 아울러 교육의 질을 제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
1992년 11월 헌법재판소(헌재)가 내놓은 판단이다. 국정교과서가 헌법의 취지에 맞지 않는 제도라는 점을 사실상 확인한 대목이다.
당시 남기정(56·서울 창덕여고 국어교사)씨는 “국정교과서 제도가 교사들에 의한 자주적·전문적인 교과용 도서 저작의 자유를 봉쇄하고 있다”며 국정제도 위헌 소송을 냈다. 헌재는 8 대 1로 남씨의 소송을 기각했다. 하지만 교사의 수업권과 학생들의 학습권이 충돌할 경우, 학습권이 우선돼야 한다는 취지였다. 이 때문에 판결문에서 헌재는 교과서 자유발행제를 원칙으로 하되, 예외적인 경우에만 국정제가 필요하다고 적시했다.
헌재는 이 예외를 “저작·발행에 비용은 많이 드는 반면 수요는 적어 어느 누구도 그러한 교과서를 집필·발행하려고 하지 않는 경우라든지 사인에게 맡기는 경우 그에 관한 연구가 충실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 경우”라고 풀이했다. “예컨대, 현재 중학교 1종 교과서로 되어 있는 가정, 농업, 공업, 상업, 수산업, 가사가 그에 해당할 수 있다”고 용례까지 곁들였다. 예외적인 경우를 빼면, 국정교과서가 헌법적으로 문제될 수 있다는 일종의 ‘예외적 합헌론’이었다.
특히 헌재는 ‘역사 과목’ 교과서 국정화의 문제적 요소에 대해 별도로 판단을 할애했다. “교과서의 내용에도 학설의 대립이 있고, 어느 한쪽의 학설을 택하는 데 문제점이 있는 경우, 예컨대 국사의 경우, 어떤 학설이 옳다고 확정할 수 없고 다양한 견해가 나름대로 설득력을 지니고 있는 경우에는 다양한 견해를 소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것이다.” ‘위헌 요소’를 지닌 국정교과서의 대표적인 사례가 역사 교과서라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는 국정 역사 교과서는 교육부 고시를 근거로 진행되고 있다. 일개 행정규칙에 불과하다. 반면 헌법은 ‘국가 통치 체제와 기본권 보장의 기초에 관한 근본법’이다.
국정교과서가 다시 헌법재판소 문을 두드리게 됐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소속 변호사들이 대리인을 맡아 ‘국정교과서 고시 위헌 헌법소원’에 나섰다. 헌법소원은 공권력에 의해 침해된 헌법상 국민의 기본권을 구제받는 제도다.
12월1일부터 민변(minbyun.or.kr)과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historyact2012) 누리집에서 시민 청구인을 모으고 있다. 국정화저지네트워크 쪽은 청구인이 모집 첫날인 12월1일에만 500여 명 참여했고, 12월4일 현재 1200명까지 늘었다고 밝혔다. 마감은 12월15일 오후 4시까지다.
청구인 참여는 1분만 짬을 내면 가능할 만큼 절차가 간단하다. 청구인 대상은 초·중·고등학생과 이들의 학부모를 비롯해 교사, 학교장, 검정제 교과서 집필자, 출판사, 앞서 국정화 고시에 반대 의견을 제출한 시민 등이다. 이번 소송을 이끌고 있는 송상교 변호사(민변 사무차장)는 “교육부 장관 확정고시는 위헌적인 공권력 행사다. 고시의 위헌성을 확인하고, 그 취소를 요구하는 헌법소원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헌법소원을 준비하는 민변 쪽은 보도자료를 통해 역사 교과서 국정화가 위헌인 10가지 이유를 댔다.
무엇보다 교육 3주체인 학생, 교사, 학부모가 헌법이 정한 교육 기본권을 침해받는 문제가 크다. 가장 큰 피해 당사자는 역시 국정교과서로 수업을 받아야 하는 학생이다. 국정교과서에 정부의 입맛에 맞는 내용이 담길 경우, 학생들은 ‘자유롭게 교육받을 권리’를 침해받을 수밖에 없다.
헌법에 따르면, 학생들은 ‘교육을 받을 권리의 주체’(제31조)다. 이 때문에 학생들은 창의력 계발 및 인성 함양을 포함한 전인적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교육기본법 제2조, 제9조). 하지만 교육기본법의 이념에 배치되는 국정교과서 때문에 학생들은 헌법이 정한 학습권을 침해받게 되는 것이다.
신옥주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학)는 “국정제는 국가가 교육 내용 독점권을 갖고, 국민이 이념적으로 일치된 생각을 갖도록 강제한다. 교과서 중심의 주입식 교육이 이루어져 교과서에 수록된 것 이외에는 전부 배척하는 풍토가 조성돼 가치관의 경직화가 초래된다. 이는 민주주의가 필요로 하는 다양한 세계관, 다양한 사상의 형성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등은 헌법재판소에 국정교과서 위헌 여부 판단을 요청하기로 했다. 이들이 12월1일 서울 서초동 민변 사무실에서 ‘헌법소원 청구인 모집’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정용일 기자
교사들은 헌법이 정한 교육의 자주성·자율성·독립성(제31조 4항)을 근거로 수업권을 보호받는다. 특히 ‘교육의 자주성’은 교사가 학생들에게 가르칠 내용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보장한다. 하지만 국정화는 단일 교과서를 통해 교육 내용을 획일화해 가르치도록 하고 있다. 이번 국정교과서는 국가가 원하는 하나의 ‘의제화된 진실’을 학생에게 가르치도록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헌재도 2006년 “국정교과서인 국사 교과서의 편찬 행위로서 학교의 장은 국정교과서를 의무적으로 교과용 도서로 사용하여야 하고, 중학교 또는 고등학교의 교육과정에 참여하는 교사나 학생의 경우에는 그 편찬된 내용대로 수업을 하거나 교육을 받아야 하므로, 그 범위에서 이들의 기본권이 직접 제한될 여지가 있다”는 견해를 내놓은 바 있다.
학부모들 역시 헌재가 인정한 중요한 기본권인 ‘자녀에 대한 교육권’을 침해받을 수 있다. 자녀가 국정교과서 탓에 획일화된 교육을 받지 않기를 원하는 모든 부모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국정교과서를 통해서 학생들은 국가가 원하는 특정 이데올로기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역사의 경우, 교과서 내용이 조작·왜곡되거나 지나치게 편향된 내용이라도 시험을 위해 주입식으로 배울 수밖에 없다. 부모로서는 국정교과서로 인해 헌법이 정한 자녀교육권을 국가에 빼앗기는 셈이다.
헌재는 2000년 “부모는 자녀의 교육에 관하여 전반적인 계획을 세우고 자신의 인생관·사회관·교육관에 따라 자녀의 교육을 자유롭게 형성할 권리를 가지며, 부모의 교육권은 다른 교육의 주체와의 관계에서 원칙적인 우위를 가진다”고 했다.
교과서를 제작하는 쪽에선 ‘학문과 예술의 자유’(제22조)를 침해받을 수 있다. 민변 쪽은 “정부가 하나의 역사 해석만을 공인하는 것은 자유로운 학문의 과정에 간섭해서 억압하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정부가 교과서 집필진을 일절 공개하지 않는 점도 이런 우려를 키운다. 정부가 국정 역사 교과서 집필을 밀실에서 추진하면서, 집필진에서 배제된 이들은 자신의 학문적 연구 결과를 교과서에 반영할 여지가 차단됐다. 민변은 이런 정부의 태도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제21조 1항)에 어긋날 소지도 지적하고 있다.
더 근본적인 문제도 남아 있다. 학생이나 교사가 교과서 발행에 관여할 가능성 자체가 원천적으로 차단되는 것이다. 현행 국정교과서 발행은 대통령과 교육부 장관의 의지만으로 가능하다. 초중등교육법에서 “교과용 도서의 범위·저작·검정·인정·발행·공급·선정 및 가격 사정 등에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제29조 2항)고 했는데, 대통령령은 “국정도서는 교육부 장관이 정하여 고시하는 교과목의 교과용 도서로 한다”(교과용 도서에 관한 규정 제4조)고 정했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교육부 장관 외에는 일절 개입하지 못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헌법은 교육제도와 운영에 관한 기본적 사항을 법률을 통해 정하도록(교육제도 법정주의) 하고 있다. 헌재도 1992년 “교육제도의 일환인 교과서에 대하여서도 법률주의의 원칙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밝혔다. 국가 공동체와 구성원에게 중요한 영역은 국민이 본질적 사항을 결정해야 한다는 ‘의회 유보의 원칙’도 있다. 국민이 스스로 교육제도를 선택하라는 것이다.
또 국정교과서는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 및 대학의 자율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는 헌법 제31조 4항과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정부는 교육자와 교육전문가의 반대 의견을 무시한 채 국정교과서를 강행하고 있다. 최근 기독교사들의 모임인 ‘좋은교사운동’이 전국 초·중·고교 교사 852명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 ‘국정화에 반대한다’는 응답이 90.4%에 이르렀다.
국정교과서 추진 자체가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헌법 전문)야 한다는 헌법의 근본정신을 침해하고 있다. 국정교과서 추진의 근거로 이용되는 ‘교과서 도서에 관한 규정’이 국가가 독점한 교과서를 모든 중·고교 학생들이 사용하도록 강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백년지대계’를 국민 다수가 반대하는 가운데 추진하는 정부 방침이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헌법 제1조 2항과도 어긋난다.
아울러 국정교과서 확정고시를 내는 과정에서 32만 건에 이르는 국정화 반대 의견을 무시한 것도 국민청원권(헌법 제26조)을 침해했다는 지적이다. 김정배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은 11월4일 기자회견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해가 1919년이냐, 1948년이냐’는 질문에 “그 얘기를 하면 불필요한 얘기가 나온다. 학계의 큰 문제”라고 답했다. 헌법 전문에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명시하고 있다. 국정 역사 교과서가 헌법 전문이 요구하는 것과 반대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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