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위안부 피해 소녀들의 꺾인 꿈을 이야기한다. 영화엔 이 소녀들을 절망으로 밀어넣는 일본군을 연기하는 배우가 여럿 나온다.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과 폭력성을 객관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보여줘야 하는 그들은 촬영하면서 위안부 소녀들의 고통이 전이되는 순간을 경험해야 했다. 임성철(39)씨는 그들 가운데 한 명이다.
“소녀들을 상대로 연기할 땐 ‘악마가 되자’고 생각했습니다. ‘이 소녀들이 나의 감정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다. 나의 스트레스를 쏟아붓는 대상이다’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촬영하고 나면 멍했어요. 위안소 세트장에는 다시 들어가기도 싫었어요. 그래서 이 영화에서 제가 죽는 순간이 가장 행복했어요. ‘죗값을 치르는구나. 소녀들에게 나쁘게 했던 것이 이렇게 끝나는구나’란 생각 때문에.”
지난 7월28일 아침, 미국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넘어가는 차에 탄 조정래 감독의 마음이 어지러웠다. 감독의 컴퓨터엔 의 촬영본을 6분으로 줄인 영상이 들어 있었다. 마이크 혼다 미국 하원의원의 초대로 이 영상을 틀기 위해 미 연방의회 의원회관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제작비가 없어 표류했던 이 영화가 미 의회에서 소개되는 순간이니 감격스러운 날이지만 감독에겐 가장 불안한 날이었다. 그 시각, 한 사람이 수술대에 올라 있었다.
“(임)성철이 수술 잘 끝났답니다.”
한국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은 감독은 그제야 억누른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몇 시간 뒤, 감독은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로 뛰어다녔던 임성철 PD의 마음이 담긴 의 영상을 미 연방의회에서 상영했다.
“수술이 잘못되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었습니다. 이 병은 스트레스에서 오는 병이라고 합니다. 을 위해 주야로 쉴 틈 없이 제작비를 구하러 다닌 결과인 듯해 그저 죄스럽고 슬픈 마음이었습니다.”
감독은 배우이자 PD로서 극심한 고통을 감내한 성철씨에 대한 고마움을 ‘죄스럽다’란 말로 표현했다.
감독과 성철씨가 처음 만난 건 6년 전이다. 감독은 배우 활동을 준비하던 성철씨의 얼굴에서 위안부 소녀들이 두려워하던 그 어떤 눈빛을 보았고, 그에게 일본군 배역을 제안했다.
미술을 전공한 뒤 미술학원을 운영하는 성철씨는 촬영 장면을 그림으로 시각화하는 ‘아트워크 감독’의 일도 맡았다. 그리고 지난 4월 첫 촬영을 앞두고 감독은 그에게 PD까지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영화계에서 PD 경험이 있는 이들이 참여를 주저해서다. ‘경험상’ 그들은 이 작품의 PD로서 가져야 할 고충이 만만치 않다는 걸 직감했을 것이다.
성철씨는 “(부탁을 받은 뒤) 영화 PD가 뭐하는 것인지 인터넷 검색부터 해봤다”고 했다. 영화 PD는 제작비를 조달해 촬영을 진행하고, 배우·스태프들을 관리해야 한다. 그는 PD, 아트워크 감독, 배우(일본군) 등 세 개의 다른 이름으로 이 영화에 참여하게 됐다.
그런데 성철씨도, 감독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성철씨의 얼굴과 손과 발이 붓기 시작했다. 280mm 신발을 신던 그의 발은 나중에 310mm 신발에 겨우 들어갈 정도로 부어올랐다.
“살이 이상하게 찐다”고 생각했지 ‘쿠싱병’이란 희귀병의 증상이란 걸 알지 못했다. 현기증이 일어나고 “걸을 때마다 가시밭길을 걷는 통증”이 그의 몸을 찔렀다. 어딘가에 살짝 부딪혀도 시커먼 피멍이 살갗에 피어올랐다. “열 걸음 이상 걸으면 숨이 차서” 전투 장면을 찍을 땐 야트막한 둔덕을 넘기가 버거웠다. 촬영하던 5~6월에 두 차례 입원한 병원에서도 간 치료 정도를 했을 뿐 ‘쿠싱병’의 존재를 찾아내지 못했다.
카센터 사장님, 배관공 아저씨가 내놓은 자금쇠약해진 그의 몸처럼 제작비도 빠르게 바닥을 드러냈다. 시민들의 후원금은 세트장 작업비, 장비 대여비 지출 등으로 촬영 초반에 고갈됐다. 제작비가 허락하는 정도까지만 일단 촬영할 계획도 있었지만 스태프들이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영화계 전문 PD들이 곧 닥칠 거라 예감한 것이 이런 순간이었을 것이다. 급히 조달해야 할 촬영비가 어떤 주엔 4천만원, 어떤 주엔 1억4천만원의 규모로 임성철 PD에게 밀려들었다.
이 영화를 밀고 간 건 이름이 알려진 투자자들이 아니었다. 에 동참해달라는 성철씨의 부탁에 그가 사는 동네 카센터 사장이 제작비를 보탰다. 다시 카센터 사장이 연결해준 배관공 아저씨가 결혼자금의 일부를 내놓았다. 성철씨가 다녔던 헬스장 트레이너도 촬영비를 보탰다. 성철씨의 장모님도 담보대출을 맡아 제작비에 쓰라고 쥐어주었다. 성철씨는 어릴 때 월세로 살았던 주인집의 아저씨에게도 연락했다. 아저씨는 자신의 아들과 동창인 성철씨에게 큰돈을 내놓았다. 학원에 붙은 포스터를 본 뒤 용돈과 세뱃돈으로 모은 50만원을 투자하겠다고 보낸 초등학생도 있었다. 이 아이의 부모님도 “(아픈) 역사에 투자하겠다”며 동참했다.
제작비에 직접 돈을 보탠 성철씨는 전세에서 월세로 집을 옮겼다. 이 영화엔 미술을 전공한 성철씨의 아내가 아트워크 작업에, 그의 친형이 미술감독으로 참여하고 있다.
병세가 더 나빠지면서 성철씨는 촬영이 모두 끝난 7월에 재입원했다. 이때 정밀검사를 더 하고 나서야 쿠싱병이 몸을 덮쳤다는 걸 듣게 됐다. 그의 갈비뼈 5·6번이 지난 4월쯤 이미 부러졌다는 것도 알게 됐다. 쿠싱병은 80~90대 노인 수준으로 뼈를 약하게 만든다. 이전에 입원한 병원에서 갈비뼈가 부러진 것을 찾아냈다면 쿠싱병의 존재를 더 빨리 발견해 병의 악화를 조금이라도 더디게 했을지 모른다. 그는 다르게 생각했다.
“갈비뼈가 부러진 걸 미리 발견했으면 영화를 찍지 못했을 겁니다. 촬영이 끝나고 발견한 건 (촬영) 진행비까지 다 마련해 촬영을 마치라는 하늘의 뜻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의 영상이 미 의회에서 상영되던 날, 4cm가 조금 넘는 종양을 제거했다. 수술 이후 회복 중이지만 최근에 또 갈비뼈가 부러졌다. 스트레스가 쿠싱병을 일으키는 주요한 원인이지만, 그는 오히려 “이 날 살렸다”고 했다.
“(제작비를 구해야 하는) 부담이 갑자기 밀려들면서 쿠싱병 증세가 급격히 겉으로 드러났다고 생각해요. 이 아니었으면 (점진적으로 병이 진행돼) 모르고 있다가 생명이 더 위험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는 느닷없이 이 고통이 찾아온 이유를 이렇게 이해했다.
‘고통을 느끼지 않고 찍을 수 있겠나’“촬영할 때 거울을 보면 내가 아는 내가 아니었습니다. 얼굴이 부어올라 몬스터(괴물)가 있는 듯 보였죠. 촬영장 숙소에서 샤워기를 틀고 울기도 했습니다. 걸을 때마다 통증이 어마어마했죠. 그런데 위안부 소녀들은 이것보다 훨씬 더 아프고 잔인하게 살해됐어요. ‘내가 이 정도의 고통을 느끼지도 않고 타지에서 숨진 (최소) 20만여 명 소녀들의 넋을 모시는 영화를 찍을 수 있겠느냐’고 생각했습니다. 나의 고통은 이 영화에 대한 나의 진정성을 테스트하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에서 위안부 소녀들을 밀어넣은 구덩이에 무심한 표정으로 불을 던지는 사람이 일본군 역을 맡은 성철씨다. 그가 “잔인하게 죽은 위안부 소녀들을 생각하면 나의 고통은 당연히 겪어야 할 고통”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가 영화에서 던지는 ‘잔혹한 불씨’ 때문이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은 의 제작비 마련을 위한 1차 뉴스펀딩에 이어 후반작업비와 전국 상영 비용을 마련하는 2차 뉴스펀딩(‘우리 딸, 이제 집에 가자’)을 포털 사이트 ‘다음’에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시민들이 제작비를 마련하고 전국적인 극장 개봉까지 직접 만들어가는 이번 시도는 영화계에서 처음 진행되는 문화운동입니다.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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