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7일 오후 3시께 부산 금정구 장전동에 있는 부산대학교 본관 건물 4층 테라스에서 한 교수가 몸을 던졌다. 근처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졌다. 이 학교 국문학과 고현철 교수였다.
“언론이 ‘54살 고아무개 교수’라길래 누군가 했는데…. ‘이 나이에 (건물에서) 떨어질 일이 뭘까’ 고민하면서 (빈소에) 왔어요.” 고 교수와 1980년 부산대 국어국문학과 입학 동기인 한경옥(55)씨는 뒤늦게 소식을 듣고 8월19일 저녁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금정구 남산동의 한 병원에 마련된 장례식장으로 찾아왔다.
고 교수는 투신 직전 A4 용지 유인물을 수십 장 뿌리고, “총장은 직선제 약속을 이행하라”고 외쳤다. 유인물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서 희생이 필요하다면 감당하겠다’는 제목이 붙은 1600자가량의 유서였다(하단 유서 전문 참조). 그는 유서에서 자신의 행동을 “지난날 민주화 투쟁의 방식”이라고 표현했으나, 과거에도 교수가 몸을 던진 일은 없었다. 부산대 교수회가 3년여 동안 학교 본부 및 교육부를 상대로 벌인 싸움은 그가 죽고난 다음에야 처음으로 전국적인 조명을 받았다.
경옥씨는 “(고 교수가) 학교 다닐 때 뒤에서 조용히 있는 타입이어서 더 놀랐다”고 말했다. 이들이 대학에 입학한 1980년은 신군부가 비상계엄을 발표하고 광주에서 저항하는 시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등 폭력과 억압이 정점에 달한 시기었다. 대학에서 합법 시위는 불가능했기에, 학생운동권은 모두 ‘언더’(지하)에서 활동했다. 고 교수는 학생 시절 부(산)대문학회, 귀성문학회 같은 모임에서 시를 썼다.
“(고 교수의) 유서를 읽어봤는데, 사회의 민주화에 있어서 부산대가 시발점이 된다는 인식은 나도 강하게 박혀 있긴 해요.” 고 교수는 1961년 제주도 성산읍에서 태어났지만, 고등학교를 부산에서 다녔다. 1979년 부산대 학생 수천 명이 시위에 나서 부마항쟁을 이끌 때, 그도 부산에 머물렀다. 1987년에는 육군 현역으로 군대에 있었다.
“나는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대단하다’ 소리는 못하겠어, 솔직히. 그런데 어쨌든 뛰어내릴 결심을 했다는 건….” 경옥씨는 잠깐 말을 흐렸다가, 힘주어 얘기를 이어갔다. “그런데 말이에요. 총장직선제가 어떻게 보면 대학 민주화와 사회 민주화와 관련해서 중요한 문제잖아요. (고 교수는 총장간선제가) 국립대 총장을 정부의 꼭두각시로 만들겠다는 의도가 있다고 보는 거잖아요. 이런 걸 크게 다루지 않는 사회가 더 문제 아닌가요?”
스스로 “충격요법”을 쓴다고 밝힌 고 교수의 표현은 현실이 됐다. 망자가 거쳐온 시대 상황을 고려한다 해도, 그의 삶과 극단적인 결단 사이의 격차는 쉽게 좁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고 교수는 대학 졸업 뒤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부산대 대학원에서 현대 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99년 같은 대학 교수가 됐다. 1990년 무크지 에 시를 발표하며 시인으로서 이름을 알렸으나, 주로 평론을 했다. 2000년대 영화 비평으로 영역을 넓혀 부산대 영화연구소 소장까지 지냈다. (태학사·1997) 등 평론집과 연구서를 다수 출간했고, 2013년에는 과거에 쓴 시들을 모아 시집 (전망)도 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평론가·교육자에 충실했던 평교수</font></font>
한국시문학회, 부산작가회의 등 각종 문학·학술 단체에서는 이사직을 맡아서 활동했으나, 시민·사회단체 활동 경력은 거의 없다.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회원도 아니다. 부산대 교수회에서도 임원이 아닌 평교수였다. 몇 차례 시국선언에 서명한 바는 있으나, 대학 문제에 대해 자기 주장을 펼치는 일은 드물었다. 평론가이자 교육자로서 문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삶에 집중했다.
“학생들 앞에서는 문학과 영화에 관한 이야기만 했다. 수업시간에도 상담시간에도 문학회에서도 정치와 사회에 무관심하다고까지 느꼈던 그런 교수님이기에 투신이 더 큰 충격으로 남았다. 유서를 보며 느낀 교수님의 고민에 그동안 교수님을 속단했던 것을 후회했다.”(부산대 국문과 09학번 윤창원)
“교수 커뮤니티에서도 자기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가슴은 뜨거울지 몰라도 판단은 냉철하게 하는 분이어서, 우발적으로 행동했을 것 같지 않다. 그래서 더 충격이었다.”(부산대 80학번 동기, 전 부산대 교직원)
올해 초 부산대 교수회장을 맡은 김재호 교수도 8월7일께 고 교수와 첫 전화 통화를 했다고 떠올렸다. 당시 서로 연락처도 저장돼 있지 않은 관계였다. 김 교수는 8월6일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못 도와줘서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몸이 아프다고 했지요.”
고 교수는 본관 앞 농성장도 방문했다. 8월 셋째주 어느 날이었다. “오후 1시쯤 땡볕에서 대화를 나눴는데, (고 교수의) 목소리가 많이 떨렸습니다.” 당시 고 교수는 미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고 교수가 돌아서는데, 내려쬐는 햇빛을 머리와 어깨 위에 가득 싣고 가는 것 같은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게 마지막이었죠.” 학교 본부 앞 농성천막을 지키던 김 교수는 단식 12일째를 맞은 8월17일 오후 2시께 몸 상태가 악화돼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이동했다. 고 교수의 투신 1시간 전 일이다.
고 교수의 투신 전, 3년여를 끌어온 부산대 교수회의 싸움은 벼랑 끝을 향하고 있었다. 싸움은 2012년 교육부에서 각 국공립대학에 “총장직선제를 폐지하지 않으면 사업비 지원 대상에서 제외하거나 지원금을 대폭 삭감하겠다”고 보낸 공문에서 비롯됐다. 명목은 총장직선제가 선거 비리 등 폐해가 많다는 이유였다.
교수 사회는 달리 받아들였다. 지지부진한 ‘국립대 법인화’를 발빠르게 이끌기 위해 총장을 정부 입맛에 맞춰 뽑으려는 속셈이 깔려 있다고 봤다. 이유가 어찌됐건 지원금과 연계한 방식은 대학 자치권을 훼손하는 강압성이 있다고 봤다.
전국 40여 곳의 국공립대학이 교육부 방침에 재정 압박을 느끼고 직선제 폐지에 나섰다. 2011년 ‘직선제 유지’를 공약으로 내걸고 총장에 당선된 김기섭 부산대 총장도 당선 이후 이같은 교육부의 압박을 겪은 뒤 공약을 뒤집었다. 부산대 교수회는 2012년 8월부터 210일 동안 총장실 부속 접견실 점거 농성을 벌이는 등 전국 국공립대 가운데 유일하게 저항 행동을 이어왔다. 지난해에는 헌법재판소에 교육부의 강압적인 총장직선제 폐지 정책이 ‘대학의 자율성’(헌법 제31조 제4항), ‘학문의 자유’(제22조 제1항)를 침해한다며 교육부 장관을 상대로 헌법소원도 청구했다.
교수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힌 김 총장은 직선제를 유지할 것처럼 했다가 올해 6월 직선제 포기 의사를 밝혔다. 8월25일에는 원래 차기 총장 후보자를 간선제로 뽑기 위한 교무회의가 열릴 예정이었다. 교수회는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갔지만, 총장은 휴가가 끝난 뒤 예정에 없던 서울 출장을 떠나며 교수들과의 만남조차 피하기 시작했다.
고 교수의 투신으로 상황은 급변했다. 김기섭 부산대 총장은 고 교수의 사망 당일 밤에 교수회 농성장을 찾아 사퇴 의사를 밝히고 차기 총장 선출 방식을 원점에서 다시 의논하도록 조치했다. 교수회와 대학 본부 쪽은 8월18~19일 수차례 회의를 걸쳐 19일 저녁 합의안을 발표했다. “총장직선제를 실현하기 위한 적법한 절차를 밟고 부산대의 발전과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자”는 내용을 담았다. 장례식장에서 합의 소식을 전해들은 고 교수의 부인은 한참 동안 눈물을 흘렸다.
8월19~20일 방문한 부산대학교 캠퍼스에서는 교수, 학생, 교직원을 가리지 않고 모두 검은 리본을 가슴에 붙이고 있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대학연합동아리 ‘인간과사회를위한교양공동체 쿰’ 소속의 부산대 학생들은 19일부터 본관 앞에서 피켓 시위를 벌였다.
바이오소재과학과에 다니는 김지훈(익명·22)씨는 “주위에 총장 선출 방식을 둘러싼 갈등을 ‘교수들 간의 밥그릇 다툼’이라고 여기는 학생들도 있다. 설혹 틀린 말이 아니더라도, 더 큰 걸 못 보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교육부가 국립대를 통제하려고 시도하는, 더 큰 그림을 살펴야 한다고 생각해서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피켓에 “대학은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입니다”라는 고 교수의 유서 인용 문구와 함께 ‘대학의 자율성을 억압하는 교육부의 간섭을 거부한다’고 썼다.
전국 9개 거점국립대학교 교수회 연합회에서는 20일 부산대에서 총회를 열고 고 교수의 뜻을 다른 국립대에도 확대해가겠다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싸움은 이제 시작”이라는 평가가 많다. 교육부의 방침이 바뀌지 않은 이상, ‘정면 대응’을 발표한 데 대한 불이익이 뒤따를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벼랑 끝 향하던 3년의 싸움, 투신으로 급변 </font></font>봄 햇살이 넘치던 5월에 부산대에서는 축제가 열렸다. 축제를 빌미로 학생들이 교수를 졸랐다. “휴강해주세요!” 국문과 전공 과목 ‘문예비평’ 수강생들도 그랬다. 고 교수는 받아줬다. “‘사람이 항상 일만 하고, 달려가기만 하면, 그래서 사람들이 병에 걸리는 거’라면서, ‘쉴 때는 쉴 줄도 알아야 한다’고 하셨어요.” 수업을 들은 국문과 학생 이지현(익명)씨가 말했다.
“‘내가 대학에 와 있구나’ 느끼게 해주는 분이셨죠. 전공 말고도 철학, 심리학 등 다방면으로 많이 알려주셨어요.” 지현씨가 생각하는 대학은 고 교수 같은 ‘르네상스형 지식인’에게 배울 수 있는 곳이다. “2학기에는 고 교수님이 강의하는 ‘현대시론’ 과목을 수강 신청해놨는데….” 말을 잇지 못했다. 이뤄질 수 없는 일이 됐다.
8월21일 고 교수의 장례가 ‘전국교수장’으로 치러졌다. 고 교수의 영결식은 부산대 안 ‘10·16기념관’에서 열렸다. 부마항쟁을 기억하려고 만든 곳이다. 2012년 대선 전 박근혜 당시 대통령 후보가 이곳에서 강연을 하려다 일부 학생들의 반발로 취소된 바 있다. 박 대통령은 지난 3월에도 학교를 방문하려다 “유신 체제를 연상케 하는 반민주적 행보를 규탄한다”는 학생 반발에 부딪혔다.
“스승의날 작은 선물에도 ‘이런 거 사올 거면 책이나 하나 더 사봐라’고 하신 분이었어요. 제자들이 올바른 학문을 하기를 바라셨고, 본인 스스로도 진정한 학문을 하기를 바랐습니다.” 고 교수의 제자인 이효림(석사과정 수료생)씨가 말했다. “그런데 지금 이 당연한 것을 이루기 위해 선생님이 희생했고, 저희는 선생님을 잃고 길을 잃었습니다. 그래도 (올바른 것에 대해) ‘무뎌지는 걸’ 원치 않는 선생님의 마지막 모습을 저는 물론 많은 사회 구성원이 함께 기억했으면 합니다.” 고 교수의 유서에는 ‘무뎌진다’는 단어가 5번 등장한다. 취재로 만난 사람들 대부분이 이를 따라 읊었다.
드디어 직선제로 선출된 부산대학교 총장이 처음의 약속을 여러 번 번복하더니 최종적으로 총장직선제 포기를 선언하고 교육부 방침대로 일종의 총장간선제 수순 밟기에 들어갔다. 부산대학교는 현대사에서 민주주의 수호의 최후 보루 중 하나였는데, 참담한 심정일 뿐이다.
문제는 현 상황에서 교육부의 방침대로 일종의 간선제로 총장 후보를 선출해서 올려도 시국선언 전력 등을 문제 삼아 여러 국공립대에서 올린 총장 후보를 총장으로 임용하지 않아 대학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란 점이다. 교육부의 방침대로 총장 후보를 선출해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후보를 임용하지 않는 상황이라면 대학의 자율성은 전혀 없고 대학에서 총장 후보를 선출하는 과정에서부터 오직 교육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는 점이 문제이다. 이는 민주주의의 심각한 훼손이 아닐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상황에 대한 인식이 대학과 사회 전반적으로 너무 무뎌 있다는 점이다. 국정원 사건부터 무뎌 있는 게 우리의 현실 아닌가. 교묘하게 민주주의는 억압되어 있는데 무뎌져 있는 것이다. 진정한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상황이 이렇다면, 대학에서의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서는 오직 총장직선제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말이 된다. 민주주의 수호의 최후 보루 중 하나이며 국공립대를 대표하는 위상을 지닌 부산대학교가 이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그래야 지금이라도 이런 참당한 상황을 변화시킬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현대사를 봐도 부산대학교는 그런 역할의 중심에 서 있었다.
총장직선제 수호를 위해서 여러 교수들이 농성 등 많은 수고로움을 감당하고 교수총투표를 통해 총장직선제에 대한 뜻이 여러 차례, 갈수록 분명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총장간선제 수순 밟기에 들어가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이 너무 무뎌 있다는 방증이다. 대학 내 절대권력을 가진 총장은 일종의 독재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교수회장이 무기한 단식농성이 들어갔고, 오늘 12일째이다. 그런데도 휴가를 떠났다 돌아온 총장은 아무 반응이 없다. 기가 찰 노릇이다.
그렇다면, 이제 방법은 충격요법밖에 없다. 메일을 통해 전체 교수들에게 그 뜻을 전하는 것은 내부적으로 교수끼리 보는 방법으로 이미 전체 교수 투표를 통해 확인한 바 있는 상황에서 별 소용이 없다. 늘 그랬다. 사회 민주화를 위해 시국선언 등을 해도 별 소용이 없다. 나도 그동안 이를 위해 시국선언에 여러 번 참여한 적이 있지만, 개선된 것을 보고 듣지 못했다. 그것보다는 8·90년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방식으로 유인물을 뿌리는 게 보다 오히려 새롭게 관심을 끌 것이다. 지금의 상황은 진정한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은 지난날 민주화 투쟁의 방식이 충격요법으로 더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그 희생이 필요하다면 감당하겠다. 근래 자기 관리를 제대로 못한 내 자신 부끄러운 존재이지만. 그래도 그 희생이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그 몫을 담당하겠다.
대학의 민주화는 진정한 민주주의 수호의 최후의 보루이다. 그래서 중요하고 그 역할을 부산대학교가 담당해야 하며, 희생이 필요하다면 그걸 감당할 사람이 해야 한다. 그래야 무뎌져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이 각성이 되고 진정한 대학의 민주화, 나아가 사회의 민주화가 굳건해질 것이다.
“털을 깎는다./ 그동안 눌어붙은 일상의 때/ 구석구석 숨죽여온 안일/ 빳빳한 그 욕망 위에/ 한겹 두겹 비누칠한다.// 한참 털을 깎다보면/ 비누 거품을 뿜으며, 유령 같은/ 허연 가면의 사내가/ 정신없이 나를 째려본다./ 잇몸을 드러내어 웃는다.// 흰 거품에 물려 잘리는 시커먼 털,/ 속을 숨기며/ 그럴듯하게 보이며/ 지끔껏 나를 은밀히 길들여온 끈적함이여!// 이 아침,/ 마주치는 투명한 살결을 위해/ 겨울 속의 그 사내를 한껏 노려보며/ 잔털의 밑바닥까지 아주 깎아버린다.”(1992년 고 교수가 발표한 시 ‘면도를 하며’)
부산=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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