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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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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이 돌고도는 대학을 아시나요?

2년제 대학 형태 ‘지식순환협동조합 대안대학’, 인문학·사회과학·자연과학
등으로 교과과정 짜여… 학생·교사는 동등한 자격 지닌 ‘조합원’
등록 2015-01-21 14:51 수정 2020-05-03 04:27
지식순환협동조합 대안대학의 개강날인 지난 1월12일, 서울 은평구 녹번동 강의실에서 ‘자본주의의 역사와 미래’ 강의가 진행됐다. 원으로 둘러앉은 이들이 서로를 가르치고 배우는 시간이다.

지식순환협동조합 대안대학의 개강날인 지난 1월12일, 서울 은평구 녹번동 강의실에서 ‘자본주의의 역사와 미래’ 강의가 진행됐다. 원으로 둘러앉은 이들이 서로를 가르치고 배우는 시간이다.

“책상을 원 형태로 배열하는 건 어떨까요?”

지난 1월12일 저녁 7시, 서울 은평구 녹번동의 한 강의실. 지식순환협동조합 대안대학(이하 지순협 대안대학)의 첫 저녁 강의가 진행됐다. 학생들 중엔 얼굴에 여드름이 채 가시지 않은 청소년, 정장 차림의 직장인도 있었다. 홍익대 앞 길거리에서 보일 듯한 차림의 20대, 그만한 아이가 있을 듯한 중년이 한 교실에서 수업을 들었다. 의견이 한창 오가는 도중 한 학생이 손을 들어 자리를 둥글게 바꾸자고 제안했다. 배열을 바꾸니 토론의 열기가 더해졌다. 예정된 수업은 밤 9시까지였지만 어느새 그 시간을 훌쩍 넘어섰다.

배우고 가르치는 이 따로 없는 대학

지순협 대안대학이 지난 1월12일 문을 열었다. 지난해 12월 입시전형을 거쳐 총 40명의 수강생을 뽑았다. 수강생들은 2년간의 교과과정을 거치게 된다. 지금까지 인문학 대안학교는 있었지만, 2년의 장기간에 걸친 ‘대학’ 형태는 거의 없었다. 한국에서의 대안대학은 2001년 ‘녹색대학’ 이후 두 번째다. ‘대학’이라는 칭호가 무색하게도 지순협 대안대학의 강의실에는 강단이 없다. 대신 학생과 선생이 눈높이를 맞출 수 있게끔 둥그렇게 책상이 배열돼 있다. 그 자리에는 지순협 대안대학에서 수업을 하고 학생을 관리하는 ‘담임교수’들도 앉는다. 둥근 책상에 앉았을 때만큼은 선생도 학생이다.

지순협 대안대학 사무국장 강정석(35)씨는 “지순협 대안대학에선 배우는 자와 가르치는 자의 구분이 없다. 우리는 이 구분 없음을 ‘배우는 자가 가르칠 수 있는 용기, 가르치는 자가 배울 수 있는 용기’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또 “서로 모르는 것을 이야기하며 지식을 순환시키는 것이 목표”라며 “수료한 학생들이 4~5년 뒤에는 직접 강의를 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지순협 대안대학의 바탕은 협동조합이다. 학생과 선생은 동등한 ‘조합원’이므로 위계가 없다. 학생이라도 자기 관심 분야를 살려 선생이 될 수 있고, 선생 역시 수업을 듣고자 원하면 학생이 될 수 있는 구조다. 민주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노력도 협동조합 모델을 택한 이유가 됐다. 강정석씨는 “학생이든 선생이든 같은 조합원으로서 학교 운영에 동등한 참여권을 가진다. 총회에서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를 나누지 않고 서로 만나게 하려면 협동조합의 원리가 적합하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지순협 대안대학을 꾸리려는 움직임은 재작년부터 있었다. 2013년 교과위원회가 만들어진 뒤, 대안대학을 열기 위한 회의가 매주 진행됐다. 인문학·사회과학·자연과학 등이 어우러지고 그 지식들이 삶에 맞닿을 수 있게 커리큘럼을 짰다. 고전강독부터 페미니즘, 정치경제학, 과학기술을 성찰하기 위한 이론까지 커리큘럼에 담겼다. 실천 과정인 워크숍도 포함됐다. 자기탐구 글쓰기, 몸짓언어 익히기, 꿈 말하기 등을 이론과 함께 배운다. ‘꿈 말하기’ 수업에서는 혼자서 풀기 힘든 꿈의 메시지를 함께 풀어간다.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던 내면의 목소리를 인식하게 해주는 과정이다.

경쟁·취업률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른 지식공동체와 달리 지순협 대안대학은 ‘대학’이라는 틀을 유지한다. 발을 들이면 2년간 커리큘럼을 이수해야 한다. 출석 관리도 엄격하다. 2회 이상 결석하면 그 수업은 F를 면할 수 없다. 지순협 대안대학의 등장은 기존 대학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는 측면이 강했다. 현직 교수들이 대학 강단에서 느낀 문제의식이 반영됐다. 경쟁으로 얼룩진 교육을 지양하고 공감과 협력을 꾀하는 것이 지순협 대안대학의 취지다. 대개 8번의 강의 정도로 끝나는 대중 인문강좌와 달리, 체계적인 배움을 전하려는 움직임도 2년제 대안대학을 설립한 이유였다. 지순협 대안대학의 등록금은 월 30만원이다. 조합원들이 내는 조합비와 이 등록금이 지순협을 운영하는 자금이다.

현재 수강생 40명 중 80%는 20대다. 나머지 20%는 10대와 40~50대다. 고향이 전북인 박강산(22)씨는 서울로 유학을 왔다. 그는 “인문학·사회·과학을 아우르는 커리큘럼이 좋아서 지원했다. 이걸 다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들떴다”고 입학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학위를 따는 것보다 배우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대학원에 진학하려 하지만 필요한 학점은 학점은행제 등으로 채울 생각이라 별 걱정은 없다.” 뒤늦게 공부가 절실해져 지순협을 찾아온 이도 있다. 엄문희(44)씨는 “마흔이 넘었는데, 최근에 글을 쓰려다보니 생각의 기준이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다시 공부를 하고 싶었다. 원서 접수 마감 이틀 전에 허겁지겁 원서를 썼다”고 말했다.

지순협 대안대학의 선생들도 대안을 꿈꾸며 이곳을 찾았다. 지순협에서 담임교수를 맡고 있는 권민정(29)씨는 공업고등학교 미술 교사였다. 그는 “공업고등학교는 대학교처럼 취업률이 떨어지는 과는 폐과가 된다”며 “이런 현실들을 마주하다보니 갈등에 휘말렸다. 교육에서 이상이 없다는 것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먹고사는 문제를 떠나서 가르치고 싶었는데 대안대학에서는 자신을 갉아먹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고 덧붙였다.

지난 1월7일 오리엔테이션 날, 수강생들은 직접 ‘담임교수’를 뽑았다. 선생들은 앞에 나가서 “나를 담임교수로 뽑으면 ○○를 할 수 있다”고 홍보했다. 선생들이 자기소개를 하자, 학생들은 손을 들어 호응했다. 그러곤 자신을 지도할 담임교수를 손수 뽑았다. 담임교수들은 5~6명의 학생을 맡고 6개월 동안 학업 및 생활 전반을 관리한다. 학생이 자습을 하러 녹번동 강의실에 오면 담임교수도 함께 나온다. 개강일 오전, 자습을 하러 온 학생들 때문에 담임교수인 이묘우(42)씨와 권민정씨도 이른 아침부터 강의실에 나와 있었다. 지순협 대안대학은 2년 동안 얼굴을 마주하며 지식을 공유하는 대학이자 작은 공동체다.

앞으로 지순협의 강의실에서는 10대와 20대 그리고 40~50대가 한 교실에 모여 수업을 듣게 된다. 2년간 계속 얼굴을 볼 ‘학우’다. 오리엔테이션 날, 자기소개 자리에서 한 수강생은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박강산씨는 “교과서에서만 보던 일을 직접 겪은 분과 함께 있어 신기했다”고 말했다. 엄문희씨는 “나이대가 내 또래일 줄 알았는데 젊은 사람이 많아 놀랐다”며 “획일화된 교육을 받지 않은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단단하게, 즐겁게, 자유롭게”

오리엔테이션 날, 지순협 수강생들은 각자가 그리는 ‘대안대학’의 그림을 그렸다. 백지에 ‘지순협 대안대학’이라는 글자 테두리를 그리고, 알록달록하게 색을 입혔다. ‘지순협’ 글자 옆에는 나무, 사람, 지구 등 각자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안’의 가치들을 그렸다. 그려내지 못한 것은 글로 적었다. “잘 살아보세. 단단하게, 즐겁게, 건강하게, 지혜롭게, 자유롭게 배워나갔으면 좋겠다. 손에 손 잡고. 하하호호!” ‘대안대학’의 글자 옆에는 그림도 글도 없었다. 강정석씨는 수강생들과 그 백지를 채워갈 것이라고 말했다. 더 나은 삶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하는 긴 여정이 막 시작됐다.

이수현 인턴기자 alshgogh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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