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웅, 북소리.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걸음. 투웅, 북소리. 두 무릎을 꿇고 두 팔을 앞으로 뻗어 이마를 땅에 붙입니다. 투웅, 북소리. 두 팔로 상체를 받치고 두 무릎을 세워 일어섭니다. 투웅, 다시 북소리.
평균 35초. 열 걸음 걷고 다시 열 걸음을 내딛기 직전까지 걸리는 시간. 1시간에 1030보. 대한민국 남성의 평균 보폭 75.5cm(2013년 남성 평균 신장 175.5cm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비트루비우스의 인체비례’ 적용). 오체투지의 시속 777m.
직립의 사람은 머리의 고도가 낮아질수록 걸음이 느려집니다. 앞사람과 250cm 간격을 두고 머리를 0m의 높이로 낮춰 배를 붙이고 배(拜)를 올립니다. 지렁이의 걸음으로 오체(두 팔·두 다리·머리)를 땅에 뿌리며 노동자들이 기어갑니다. 1월7일 그 행렬 끝에 붙어 저도 느리게 엎드렸습니다.
싸늘했습니다. 오체투지 경로(서울 구로구~영등포구)의 기온은 -9℃였습니다. 언 땅바닥이 피워올리는 냉기가 아지랑이처럼 얼굴로 육박했습니다. 땅에 엎드린 노동자들이 제 눈높이로 낡은 신발 바닥을 드러내며 냉기를 견뎠습니다. 26명을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보내며(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수십∼수백 일째 하늘 모서리에 매달리며(쌍용차·스타케미칼 해고노동자), 8년을 거리의 바람에 풍화되고 퇴적되며(콜트·콜텍 해고노동자), 어느 날 증발한 회사에 황망한 농성장을 차리며(기륭전자 노동자), 그들이 견뎌온 세상의 냉기는 더없이 차갑고 냉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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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 놓인 몸은 길의 굴곡을 따라 휘고 꺾이며 울퉁불퉁해졌습니다. 길의 모양과 노면 상태가 길 위의 몸을 흔들고 밀치고 당겼습니다. 바닥의 기울기에 따라 몸도 쏠리고 흘러내렸습니다. 상반신은 아래로 처지는데, 하반신은 위를 향했습니다. 머리는 횡단보도로 진입했으나, 다리는 인도에 걸쳐 있기도 했습니다. 굴다리를 지나고, 철길 옆을 지나고, 광장을 건너며, 상가를 통과했습니다. 쇠를 깎는 철공소에선 붉은 쇳가루가 튀었습니다. 길의 모양과 요철에 맞춰야 몸은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경기도 평택과 경북 구미의 고공농성자들도 굴뚝의 곡선에 따라 허리를 휘어야 몸을 누일 수 있습니다. 오체투지단에 모인 노동자들은 찢기고, 깨지고,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오늘까지 왔습니다.
가능하다면 몸을 교환하고 싶었습니다. 왼쪽 무릎에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습니다. 허벅지가 뻣뻣해지고 허리는 무거워졌습니다. 열 걸음을 걸어도 눈앞 건물은 1mm씩 다가왔습니다. 목적지까지 가야 한다는 단순하고 명확한 생각만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몸은 솔직했습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던 몸의 문제들이 길을 만나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노동자들이 배를 밀고 땅을 기어가는 장면에서 한국이란 병든 몸의 심부도 적나라하게 노출됐습니다. 쉬는 시간이면 작은 체구의 기륭전자 여성노동자들이 지친 표정 없이 웃었습니다. 열흘 전 청와대행을 막아선 경찰들의 두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고 통곡하던 그들입니다. 웃음과 통곡이 기묘하게 겹쳐지는 쨍쨍한 추위 속에서 저는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권력은 편의에 따라 언어를 부수고 조립합니다. 현 정부는 ‘정규직 해고 요건 강화’에 바늘을 꽂아 ‘비정규직 처우 개선’과 한 코에 꿰어버렸습니다. ‘비정규직 사용기간 연장’을 ‘비정규직 보호 대책’으로 둔갑시키기도 합니다. ‘중규직’(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중간 고용형태)이란 신조어를 탄생시키고, 기업이 불편해하는 ‘규제’는 혐오스러운 ‘암덩어리’(2014년 3월12일 박근혜 대통령의 무역투자진흥회의·지역발전위원회 연석회의 발언)로 몰아갑니다. 기업의 폭주를 규제할 장치는 ‘불타는 애국심’(같은 자리 발언) 앞에 반애국심으로 무릎 꿇렸습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익숙한 구호가 되는 동안 ‘노동하기 좋은 나라’는 생경하게 외면받습니다.
1월7일 오체투지 행진에 참여한 이문영 <한겨레21> 기자(왼쪽)가 수첩을 든 채 몸을 땅에 붙이고 있다. 한겨레21 류우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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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12일 대법원은 콜트·콜텍 노동자들에게 ‘정리해고가 인정된다’고 판결했습니다. 11월13일엔 쌍용자동차의 해고마저 정당하다며 2심 선고를 파기환송했습니다. ‘정규직 정리해고’는 ‘비정규직 처우 개선’이 아니라 ‘비정규직 양산’과 같은 뜻이라고 오체투지 노동자들의 삶이 입증해왔습니다. 정리해고법과 비정규직법이 그들의 몸에 새긴 흉터가 땅을 기고 하늘에 매달린 오늘입니다.
“박근혜 대통령님은 태어나서 한 번이라도 남의 밑에서 월급을 받으며 일해본 적 있나요?”
오체투지단의 국회 앞 기자회견에서 전국교육공무직본부 소속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는 물었습니다. “좋은 노예제도가 없듯 좋은 비정규직제도란 없다.” 오체투지 행렬을 따르는 방송차량에서 한 노동자도 말했습니다. 누군가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말할 때 ‘깎여나간 뼛가루들’은 생과 사의 길목에서 위태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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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표정은 다양했습니다. 빙판이 있었고, 젖은 도로가 있었으며, 쓰레기 더미도 있었습니다. 맨홀 뚜껑에 얼굴을 묻을 땐 짙은 하수구 냄새가 올라왔습니다. 오래된 담배꽁초와 얼어버린 침 자국 위도 오체투지는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길은 깨끗하든 더럽든 지나가야 원하는 곳에 이를 수 있습니다. 오체투지의 길에 몸을 싣는 노동자들은 그 모든 길을 오랜 시간 기어왔습니다.
“목욕탕에 가서 족욕을 해야 추위가 빠져.”
김정우 전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이 제게 ‘노하우’를 알려줬습니다. 지난 6년간 거리생활과 수감생활로 몸에 수많은 얼음을 박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이틀째(1월8일) 일정을 시작하기 전 마이크를 잡고 말했습니다.
“힘들어도 갈 거니까 힘내서 가자.”
오체투지를 취재하며 행진단보다 빨리 걷고 뛰는 한 쓸 수 없을 것 같은 글이 있었습니다. 언어가 부박하고 글이 무능력한 시대에 마감 때마다 관성적으로 찍어내는 앙상한 문자들의 쓸모를 자신하지 못했습니다.
쌍용차 해고자 복직 요구하는‘정리해고-비정규직법제도 전면폐기를 위한 행진단’이 오체투지를 이어가고 있다. 한겨레 김성광
지난해 여름 폐간한 을 복간한 뒤 벌써 4번째 마감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주간 고공21 기사 더 보기] 하늘은 매섭게 날카롭고 착륙의 징후는 보이지 않습니다. 쌍용차 사 쪽은 지난 1월6일(고공농성 25일째) 김정욱·이창근을 상대로 법원에 퇴거단행 가처분 신청(퇴거를 풀지 않을 경우 하루당 100만원 지급)을 냈습니다. 사 쪽은 지난달 이미 두 사람을 주거침입 및 업무방해죄로 형사 고소했습니다.
스타케미칼은 최근 김세권 사장이 처음으로 금속노조와의 교섭 자리(지난해 12월30일)에 나왔습니다. 차광호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대표의 굴뚝농성이 200일을 넘으면서 나타난 ‘변화’입니다. 변화라지만 노조의 요구(고용승계·단협체결·노조인정)를 전혀 수용하지 않아 진전이 없습니다.
반가운 소식도 있습니다. 하늘 노동자들의 빠른 귀환을 염원하며 ‘굴뚝 전문지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에 이어 최근 이 1호 지면을 내며 쌍용차 굴뚝 소식을 긴밀하게 보도했습니다. 도 기쁜 마음으로 ‘치열한 폐간 경쟁’에 동행하겠습니다. 시속 777m로 기어갔던 싸늘하고 차가운 길바닥을 잊지 않겠습니다. 의 조속한 재폐간을 위해, 오체투지!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이 글은 기사 마감 시점인 1월9일까지의 상황을 반영해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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