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신주가 하나도 없는 ‘서덕들’(경남 거창군 위천면)엔 샛노란 벼들이 반짝이며 출렁였다. 이 너른 들을 지나 중심으로 들어갈수록 교육·청정 도시임을 내세운 거창군의 평온함이 깨지고 있었다. 거창의 한 고등학교 교사는 10월23일 “거창이 생긴 이래 민심이 가장 흉흉하고,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탄식했다. 법무부와 거창군이 학교 밀집지역 근처에 구치소를 포함한 법조타운을 세우려는 국책사업을 두고 찬반 민심 갈등이 극심한 탓이다. 한 토박이 주민은 “이러다 밀양(송전탑 건설), 제주 강정마을(해군기지 건설) 사태가 나겠다”고 우려했다. 공사를 밀어붙이고, 반대 주민들은 포클레인 앞에 눕는 극한 저항이 곧 재현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찬반 갈등은 ‘귀농 선호도 1위 지역’이란 타이틀을 잠시 잊게 만들 정도다. 가족·친척·친구 사이에 찬반이 나눠져 다툼이 일어나고, 법조타운 유치위원장을 지낸 지역 건설업자의 자녀이기도 한 찬성파 군의원이 이번 일로 의견 충돌을 빚던 동창생을 고소한 일도 벌어졌다. 군청은 자발적으로 반대에 나선 학부모들을 향해 “일부 시민단체와 전교조의 선동”을 받았다고 매도하고, 반대 주민들이 내건 플래카드가 걸리자마자 칼로 찢기는 일도 생겨났다. 반대 주민들은 찬성파 핵심 인사들이 운영하는 의류매장의 브랜드 옷을 입고 외출하지 않는 것을 넘어 해당 매장 불매운동에 나서고 있다. 반대 쪽 학부모들은 최근 닷새간 자녀(거창군 내 초등학생 절반 이상)들의 등교 거부도 진행했다. 시내에 걸린 ‘학교 앞 교도소 아웃(OUT)’ ‘거짓으로 꾸민 찬성 3만 명 대리서명 무효입니다’ ‘법조타운은 군민의 노력으로 유치한 국책사업입니다’란 다른 얼굴의 플래카드들이 거창의 혼돈을 드러내고 있다.
찬성파 군의원이 동창생 고소하기도겉으로만 보면 학교·주택 인근 교정시설을 혐오시설이라며 반대하는 주민들의 집단 이기주의처럼 비칠 수 있다. 하지만 그 속엔 민의를 제대로 수렴하지 못한 지방자치단체(거창군청)의 속도전, 대리서명·명의도용이 이뤄진 서명부(교정시설 및 법조타운 유치를 찬성한다는 군민 서명)를 사업 추진의 주요 참고자료로 삼은 정부(법무부)의 무책임과 갈등 방치 등이 뒤섞여 있다. 경남 밀양, 제주 강정, 그 외 대형 국가사업이 진행된 여러 지역에서 익히 봤던 우리 사회의 ‘행정절차의 부실’이 거창에서도 도진 것이다.
‘거창의 평온함’을 허문 법조타운은 1725억원을 들여 한센병을 가진 주민 27가구가 사는 거창군 성산마을 일대(20만418㎡·6만732평) 땅을 개발하는 국책사업이다. 올해 12월부터 2017년까지 해당 부지의 80%에 해당하는 땅(16만818㎡)에 재소자 400~500명을 수용하는 구치소를 짓고, 나머지 땅엔 시내에 있는 거창지원·거창지청을 옮겨 ‘법조타운’을 만드는 사업이다.
거창군은 법무부가 경찰서 대용감방(유치장)을 없애고 법무부 소속 교정시설(구치소·교도소)을 확대한다는 방침을 세우자 2010년 말부터 교정시설 유치에 뛰어들었다. 양계장 악취 등이 심한 성산마을 일대에 교정시설을 짓고 법조타운을 조성하면 50여 년간 지역 문제였던 악취를 해결하고, 200여 명의 교도관 이주와 구치소 면회객 방문 등으로 지역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거창군은 민간 유치위원회를 꾸려 불과 19일 동안(2011년 2월14일~3월4일) ‘교정시설·법조타운 유치 촉구’에 찬성하는 2만9849명(전체 군민 중 47%)의 서명을 받아 유치건의서와 함께 2011년 3월9일 법무부에 제출했다. 법무부는 그해 7월22월 거창 교정시설 설립 결정을 군에 통보했다.
경찰서 유치장을 대신하는 정도의 교정시설이 포함된 법조타운을 생각한 주민들이 술렁인 건 지난 6·4 지방선거 때부터다. 재선을 노리는 이홍기 군수에 맞선 후보들이 사실상 교도소가 들어서는데도, 군청이 법조타운이라고 포장했다고 지적한 것이다. 4개 동 규모의 교정시설은 3개 동이 타지에서 이송된 기결수용이어서 교도소에 가깝다는 것이다. 구치소 반경 1km 안에 어린이집·유치원, 11개의 초·중·고등학교가 밀집해 있고, 일부 학교는 구치소와 직선거리로 195m 정도 떨어져 있는 등 학생들의 정서와 교육환경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걱정이 커졌다. 학부모들은 7월31일 ‘교도소 유치를 반대하는 학부모모임’을 결성해 다른 주민들과 함께 반대집회, 피케팅 시위, 법무부 상경 항의방문 등을 해왔다. 반대 주민들은 토지보상비가 광주교도소(100억원), 정읍교도소(38억원), 상주교도소(21억원) 등에 견줘 거창구치소 부지가 200억원으로 월등히 많은데도 학교 밀집지역 인근을 고집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불신 탓에 ‘땅 소유주-지역 건설업자-군청’을 둘러싼 특혜 의혹까지 풍문처럼 떠돈다.
“교도소 들어서는데 법조타운이라 포장”반대 주민들은 “유치 및 서명 과정에서 군청이 구치소(또는 교도소)라고 적극 밝히지 않는 등 정보 제공이 불충분했고, (법조타운 부지) 인근 아파트 동 대표 몇 명을 불러 식당에서 모임을 가진 것 외에 주민설명회·간담회도 없었다”며 의견 수렴 절차의 심각성을 제기하고 있다.
특히 구치소 유치에 기여한 ‘2만9849명 찬성 서명부’의 대리서명 등 조작이 뜨거운 문제로 부상했다. 면·리 단위별로 똑같은 필체로 이름·주소·전화번호·서명이 집단적으로 적힌 게 상당수 발견됐기 때문이다. 당시 제출된 서명부를 확인해보니, 주소나 전화번호조차 없이 같은 필체로 지역 주민들을 찬성 서명부에 적어놓은 사례도 많았다. 반대 쪽 범군민대책위는 “이미 사망한 사람, 부산 치매요양원에 있는 사람, 7살 미취학 아동도 서명부에 올랐다. 현재 유치 반대를 하는 시민단체 인사가 당시 찬성한 것으로 두 번 중복 게재되기도 했다”고 밝혔다. 거창군 웅양면의 경우 서명이 시작된 초기엔 62명만 참여했다가, 군청이 2011년 2월22일 읍·면장에게 서명 독려 공문을 하달하자 사흘 만에 비슷한 필체의 서명 인원이 1880명으로 껑충 뛰었다. 사업 찬성 쪽인 ‘거창법조타운 추진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시골의 경우 도장을 이장에게 맡기기 때문에 (이장이) 도장을 서명란에 한꺼번에 찍거나, 가족·형제 등 일면식이 있는 사람에 한해 대리서명한 경우가 있긴 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거창군청은 “서명부는 거창군의 유치 의지를 확인하는 참고자료일 뿐, 법적 필요요건은 아니다”라고 밝혔고, 법무부는 “거창군과 군민이 해결할 문제”라며 선을 긋고 있다.
2011년 7월 “예상 민원 없을 것” 유치 확정그러나 법무부가 찬성 서명(건의서)을 교정시설 유치 결정의 주요 근거로 삼은 것은 여러 공문에서 확인된다. 2010년 11월 거창군의 공문을 보면, 법무부는 교정시설 유치와 관련한 거창군과의 면담에서 “주민들의 유치건의서 등 거창군의 유치 의지가 확고하면 사업 착수가 용이하다”고 거창군에 제안한다. 법무부는 거창군이 찬성 서명부를 제출하자, “3만여 군민들이 서명해 교도소 유치 및 법조타운 조성을 건의함에 따라 거창교도소 신설을 적극 검토하겠다”(2011년 3월17일)는 긍정 회신을 보냈다. 법무부는 이후 현지 실사를 통해 “아파트·학교 밀집지역이라 민원 발생 소지가 다분해 구치소가 도심과 떨어진 곳(법원까지 20~30분 이내 거리)에 위치하는 것이 바람직”(2011년 4월)하며 “각종 보상 및 폐기물 처리 등 과다 예산이 소요될 것으로 판단해 후보지로 선정하기에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2011년 5월18일)며 유치 결정을 보류하는 듯하다가, 결국 그해 7월 “주민 유치 건의에 의해 예상 민원은 없을 것 같다”며 거창 유치를 확정했다. 주민 서명이 법무부의 판단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볼 수 있지만, 최근 거창군의 갈등에 정부의 조정 능력은 뒤로 빠져 있다.
학부모모임의 이소영 공동대표는 “법무부가 3만 명 서명부를 한 번이라도 봤다면 누군가가 (한꺼번에) 작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와서 서명부가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면 직무를 유기한 것”이라고 말했다. 학부모모임 등으로 구성된 범군민대책위는 거창군이 과학적 근거 없이 법조타운 조성으로 1천억원의 경제 활성 효과가 있다고 홍보하는 문제도 지적한다.
양쪽의 절충은 가능할까? 현재로선 쉽지 않다. 범군민대책위는 학교 밀집 지역이 아닌 외곽에 구치소를 유치하자는 안을 제시하고 있다. 한센인들이 지금은 양계장 운영을 거의 중단한 만큼 구치소 건설이 아니라, 성산마을의 악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을 다시 고민해보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상준 거창군청 창조산업과 과장은 “가축 축사 악취 문제는 50여 년간 해결하지 못한 숙제였다. 이 사업은 성산마을에 법조타운을 조성해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고 국가사업도 진행하는 윈윈 사업이다. 구치소 위치를 옮기는 건 생각할 수 없다”고 말했다. 구치소와 학교 사이엔 야트막한 야산과 구릉이 있어 학교와 구치소가 공간적으로 분리되며, 거창구치소는 경범 위주로 수용할 예정이라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고 반박했다. 지역 발전을 위한 사업인데도, 반대 주민들이 막연한 불안감을 부추기고 있다는 게 군청과 법조타운추진위원회의 시각이다.
그러나 구치소 예정 부지 인근 학생들이 느끼는 불안감은 단순히 심적인 문제를 넘어서고 있었다. 대성일고등학교의 한 학생은 “재소자들이 (호송)차를 타고 학교 근처를 지나간다고 생각하니 무서운 것도 있다. 거창의 교육 이미지가 훼손될 것도 걱정된다. 무엇보다 대리·부정서명이 있었던 것 아니냐? 그게 가장 큰 문제다”라고 했다. 국책사업에 지자체와 정부가 과연 민주적 절차대로 움직이고 있는지 학생들이 ‘교과서 밖 우리 사회’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군수가 민주적 훈련을 시키고 있다”범군민대책위는 ‘군수 주민소환’(주민투표로 군수직 수행 여부를 결정하는 것)을 계획하고 있다. 학부모모임 김은옥 공동대표의 얘기다. “주민 동의(서명)를 불법적으로 진행한 것 등에 대해 군수에게 엄중한 책임을 물으려 한다. 이번 일로 주민의 자각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한편으론 현 군수가 우리에게 민주적 (절차에 관한) 훈련을 시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거창군의 서명 파동-정부의 유치 결정-거창군민의 찬반 갈등’ 사태를 바라보는 거창 지역 다른 교사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우리 사회가 너무 빨리 가려고 합니다. (거창군 문제도) 천천히 주민 의견을 모으지 못하고 결국 빨리 가려다 벌어진 일입니다.”
거창=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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