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송희일 감독의 영화 은 동성애자로 알려진 고등학생 용주(곽시양)가 학교를 떠나는 것으로 끝난다. 내신 1등급 용주는 조여드는 학교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자퇴를 하며 학교 벽에 붉은 글씨를 남긴다. “여기도 게이가 있다.” ‘우리는 어디나 있다’는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오래된 슬로건을 붉은 스프레이로 재현한 것이다. 용주는 이런 행위를 통해 가려진 진실을 드러내고자 했다. 지금 교과서에서 그나마 존재하는 흔적을 고치려는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다.
이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9월 동성애대책위원회가 교육부에 교과서 관련 민원을 제기했고, 교육부는 이 민원 제기 내용을 (사)한국검인정교과서에 전달했다. (사)한국검인정교과서는 검인정교과서의 생산과 공급뿐 아니라 수정 업무도 담당한다. 9월24일자로 된 공문은 “(사)한국검인정교과서는 해당 출판사에 안내해주시고, 해당 출판사로부터 검토 결과 보고서를 수합하여 송부하여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요청했다. 중학교 , 고등학교 등 교과서를 만드는 출판사는 민원 제기 내용에 대해 ‘검토 결과’를 보고서로 보내야 하는 것이다.
교육부 공문과 함께 전달된 민원 제기 내용에는 ‘비정상’ ‘위험한 행동’ ‘에이즈’ 같은 단어가 나오고, 삭제를 요청한 그림에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제작한 ‘차이를 차별할 수 없어요’ 캠페인 포스터도 있다. 이렇게 동성애대책위는 민원에서 15개 교과서 25개 부분에 걸쳐 수정 또는 삭제를 요구했다.
<font size="3">인권위 ‘차이를 차별할 수 없어요’ 삭제 요청</font>먼저 YBM출판사의 중학교 267쪽에는 ‘성적 소수자’에 대한 풀이가 있다. “…과거에는 성적 소수자를 정신질환자로 간주하여 혐오감을 갖거나 치료를 한다는 명목하에 온갖 박해를 하기도 하였으나, 요즘은 다양한 성정체성 중 하나로 수용하는 추세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 사회에서는 성적 소수자라는 사실이 밝혀질 경우 각종 불이익을 당할 우려 때문에 숨기거나, 밝혀진 경우 ‘비정상’이라는 낙인이 찍혀 폭력이나 따돌림을 당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여기에 대해 동성애대책위가 ‘친절히’ 제시한 수정안의 일부는 이렇다. “그러나 서구 사회에서 성적 소수자의 인권이 과도하게 보장됨으로써, 오히려 성적 다수자의 자유와 인권이 침해되는 사례가 생기고 있다.” 이렇게 ‘모두’의 인권을 중시하는 동성애대책위는 이 내용에 대해 ‘수정(을 요청)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제시했는데, 일부를 옮기면 이렇다. “포르노를 합법화한 성적으로 타락한 일부 국가의 동성결혼 합법화를 세계 추세라고 기술하면 학생들에게 왜곡된 인식을 갖게 한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성적 소수자라는 이유로 폭력을 당하는 사례는 거의 없다. 오히려 한국의 드라마, 영화에서 동성애를 옹호하는 내용이 더 많이 나오고 있다.” “동성애는 자연의 섭리에 어긋난 비정상적인 성행위이다.” “학생들이 성적 소수자(동성애자, 트랜스젠더)가 되도록 부추긴다.” 중·고등 도덕·윤리 교과서를 샅샅이 훑은 25개 부분에 대한 지적에서 이런 논리는 반복된다.
<font size="3">꼬리에 꼬리를 무는 민원</font>미래엔 고등학교 75쪽에는 “성의 자기결정권이란 외부의 강요 없이 스스로 자신의 성적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이성애자이거나 성소수자이거나, 여성이거나 남성이거나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권리다”라는 서술이 나온다. 중립적 서술처럼 보이는 것에 대해서도 민원은 “‘이성애자이거나 성적 소수자이거나’를 삭제해야 함”이라고 주장한다. ‘수정하는 이유’ 중 하나는 “동성애를 위험행동으로 인식하지 않고 성적 자기결정권만 강조한다면 그것은 마치 알코올중독자에게 건강상 이유로 술을 못 먹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자유라고 하여… 그 사람의 건강과 삶을 망치게 하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라고 주장했다. 대책위는 ‘수정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첨부자료도 제시했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4년 신설된 고등학교 교과서가 공개되자 동성애대책위와 맥락을 같이하는 동성애입법반대국민연대가 2013년 6월 “동성애를 고등학교 도덕 교과서에서 편향되게 옹호하고 있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이어서 보수 개신교를 중심으로 개정 요구 서명운동이 벌어졌다. 결국 교학사 교과서는 바뀌었다. “성적 소수자를 비도덕적이거나, 정신적으로 이상하거나, 질병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으로 대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부분 등은 삭제됐다. 이렇게 수정되고 추가된 내용은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무지개행동)의 비판을 불렀다. 성적 소수자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고르고 논술하라는 부분에 “성적 소수자는 전염성 있는 질병을 옮길 수 있고, 성문화를 문란하게 한다” 등 부정적인 예시가 담겼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수 개신교는 교과서 내용에 주도면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벌어진 일이다. 미래엔 중학교 1학년 교과서 115쪽에는 ‘우리말 ‘사랑’의 의미’가 나온다. 이어진 뜻풀이의 첫째는 “상대에게 끌려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이다. 여기에 대해 동성애대책위 민원은 “‘남녀 간에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으로 수정해야 함”이라고 지적한다. “이성”이라는 말이 지워지고 “어떤 상대의 매력에 끌려 열렬히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이라고 2012년 12월 개정된 표준국어대사전의 ‘사랑’에 대한 정의가 다시 2014년 1월 “남녀 간…”으로 시작하는 풀이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역시 보수 개신교의 압력이 재개정의 중요한 이유였다.
현실 부정도 있다. 천재교육 고등학교 67쪽에는 ‘다양성과 관용’이 나온다. 여기엔 “차별금지 항목에는 무엇이 있을까?”라는 질문에 이어 세계인권선언 제2조와 국가인권위원회법이 규정하는 차별금지 항목들이 그림과 함께 나열됐다. 동성애대책위 민원은 “그림에서 ‘성적 지향’을 삭제하기 바람”이라고 수정안을 제시했다. 법으로 규정된 항목들 가운데 동성애를 포함하는 성적 지향만 빼라는 것이다. 비상교육 81쪽에는 퀴어문화축제의 포스터가 나왔는데, 이것 역시 삭제를 요구당했다. 민원은 “퀴어퍼레이드는 청소년들에게 보여서는 안 되는 음란 변태적인 공연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포스터는 삭제해야 한다”고 이유를 밝혔다.
<font size="3">인권이사회 이사국의 이중적 면모 </font>동성애대책위는 2013년 10월 “동성애 조장 반대운동의 유기적 활동 강화를 위한 시민연대”로 출범했다고 홈페이지에서 밝히고 있다. 교과서 민원에서 보이듯, 동성애 반대운동은 전체적인 그림 속에서 활동하고, ‘디테일’이 생겼다. 교육부는 동성애대책위 민원을 (사)한국검인정교과서에 보내 답변을 요청해서 책임을 떠넘겼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워 보인다. 한가람 무지개행동 활동가는 “지난 9월26일 유엔인권이사회에서 한국이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폭력에 반대하는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지기 불과 이틀 전에 이런 공문을 보낸 것”이라며 “정부의 이중적 면모가 여실히 드러났다”고 비판했다. 한국은 인권이사회 이사국이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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