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008ABD">“이건 정당방위야.” 일상 속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소중한 권리가 침해될 때, 누구나 작은 저항으로 스스로를 방어한다. 이를테면 화장실에서 새치기하려는 이를 어깨로 밀어낼 때, 싸움을 말리던 당신을 밀쳐낸 이를 반대로 밀어 내동댕이칠 때, 당신은 ‘정당방위’를 행사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 짧은 시간 내, 정당한 만큼의 방위 행위를 행사하려면 매우 까다로운 법의 요건들을 충족해야 한다는 사실은 잘 알지 못한다. ① 위협은 지금 당장 긴급하고 절박해야 하며 위법해야 한다(현재성, 침해의 부당성). ② 보복의 뜻이 개입되어선 안 된다(방위의사). ③ 침해당한 만큼만 침해해야 한다(상당성). 혹여 죽음의 위협을 느끼더라도 ‘현재’가 아니라면 방위권을 행사할 수 없고 실수로라도 스스로 침해당한 것 이상 침해한다면, 당신은 범죄자가 될 것이다.
지난해 서울의 한 지하방에서 남편을 숨지게 할 때, 윤필정(49·가명)씨 역시 무엇이 정당방위의 요건인지 알지 못했다. 죽음의 공포 앞에 그런 것을 따져물을 겨를도 없었다. 25년, 사반세기 동안 가정폭력에 시달린 그는 남편의 목을 졸랐다. 자신과 딸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한국 형법은 제21조 1항에서 “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에 대한 현재의 부당한 침해를 방위하기 위한 행위는 상당한 이유가 있는 때에는 벌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한다. 그에 따라 윤씨는 정당방위를 인정받지 못했다. 지난 5월 1심 법원은 ‘살인’의 죄목으로 징역 2년을 선고했다. 검찰은 “벌이 너무 가볍다”며 항소해 징역 5년을 구형했다. 10월25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윤씨의 항소심 선고 공판이 열린다. 은 윤씨 본인과 가족 인터뷰, 사건 기록 등을 검토해 사건을 재구성했다. 형법이 정한 정당방위의 요건이란 진정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묻기 위함이다. </font>
무슨 일인가 벌어질 것 같은 오후가 있다. 덜컹이는 전동차의 쇳소리가 신경을 긁고, 초가을 바람에도 살갗에 소름이 돋는 날. 수지(당시 25살·가명)는 옷깃을 여몄다. 지난해 9월9일 오후, 수지는 전날 밤새워 학교 과제를 마친 뒤 지친 몸을 이끌고 전철역 지하통로를 걷고 있었다. 졸음을 깨운 건 동생 수연(당시 17살·가명)의 전화였다.
“언니, 집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 휴대전화 단말기 저편에서 수연이 울음을 터트렸다. “울지 말고 똑바로 말해. 우리 집에 일 생긴 게 하루이틀이야?” 수지는 우는 일이 지긋지긋했다. 엄마의 하염없는 울음이 아버지의 주먹질 때문임을 어렴풋이 알게 된 뒤, 수지는 무슨 일에도 울지 않기로 다짐했다. ‘집에 무슨 일 좀 생겼다’고 울 것 같으면 날마다 울음 그칠 날이 없었을 것이다.
수연을 달래 전화를 끊었다. 곧 다시 요란하게 전화벨이 울렸다. 이번엔 나쁜 예감이 들었다. 경찰이었다. “엄마가 병원에 있다”고 했다. 무릎에서 힘이 쫙 빠졌다. 전철역에 주저앉아 수지는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그 순간을 정확히 기억해요. 아빠가 엄마를 병원에 가게 할 정도로 때렸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칼로 찔렀거나 약을 먹이고 도망쳤을 거라고요.” 지난 10월2일 과 만난 수지는 1년여 전 그날을 돌이키며 말했다.
<font size="3">아빠에게 짓밟힐 때마다 와르르와르르</font>계단은 지옥으로 연결돼 있었다. 5평(16㎡) 남짓한 서울 변두리 다세대주택의 지하방, 수지와 수연은 늘 그곳이 엄마의 무덤이 될까 가슴을 졸였다. 좁은 계단을 내려가면 등 돌린 채 일하는 아빠(당시 53살)와 엄마 윤씨의 뒷모습이 보인다. 두 사람은 전기 미터기를 만들었다. 오전 9시30분부터 밤 10시까지, 엄마는 쉬지 않고 일했다. 왼쪽에 앉은 아빠는 무언가가 성에 차지 않을 때마다 엄마를 때렸다. 작업장엔 공구가 많았다. 니퍼, 펜치, 드라이버, 망치. 가족을 먹여살리는 공구들이, 수지의 눈엔 엄마를 괴롭히는 무기와 같았다. 채찍처럼 휘두른 전기선에 엄마의 허벅지는 빨갛게 부풀었고, 인두로 지진 손에 흉터가 앉았고, 니퍼나 펜치에 얻어맞은 머리에선 늘 핏물이 배어나왔다. “차라리 죽여달라”는 엄마의 입을 벌리고 페인트 시너를 부으려 한 일도 있었다.
10살 무렵이었다. 아빠가 엄마를 죽을 만치 때리는 걸 수지는 그때 생생히 보았다. 자다가 일어나니 엄마가 시뻘건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머리가 찢어져 있었다. 민소매 티셔츠는 피에 흠뻑 젖은 채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전동드라이버로 아빠는 찢어진 엄마의 머리를 계속 내리쳤다. “엄마 머리에서 피나요.” 누구도 수지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대신 나중에 엄마는 말했다. “아빠가 화나면 무서우니까 저녁에 물소리도 내지 말고 집에 들어오면 걷는 소리도 조심하거라.”
그 무서운 일을 중학교 때 수연도 보게 됐다. 집에 오니 식기가 모두 깨져 있었다. 그 아수라장에서 엄마는 울며 빌고 있었다. 돈을 내놓지 않는다고 아빠는 닥치는 대로 집어던지는 중이었다. 맥주병이 날아가 엄마를 가격했다. “제발 딸 앞에서는 이런 모습을 보이지 말라”며 엄마는 깨진 유리병으로 손목을 그었다.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119를 부르면 아버지가 다른 사람에게 알렸다고 엄마와 저를 죽일까봐 부르지 않았어요. 빨리 돈을 찾으면 아버지가 잘했다며 병원에 데려다줄 줄 알고 같이 돈을 찾았습니다.” 나중에 엄마는 귀에서 기차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병원에 가니 ‘돌발성 난청’이라고 했다. 젊은 날 사진 속 하얗게 피었던 엄마는 아빠에게 짓밟힐 때마다 와르르와르르, 무너져내렸다.
그러니 그 지옥에서, 지하방에서 엄마는 어딘가 다시 크게 무너져내렸을 것이다. 전화를 끊고 병원으로 달려가며, 수지는 다짐했다. “엄마가 엄청 다쳤으면 내가 아빠를 죽일 거야. 내가 아빠를 죽일 거야.” 병원에 도착해 혼절해 있는 엄마를 봤을 때, 엄마의 몸에 핏자국이 없는 것을 봤을 때 수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경찰 아저씨가 말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font size="3">학습된 무기력·우울증·외상후스트레스장애</font>‘아! 엄마가….’ 엄마의 몸만큼이나 그 마음이 오래전에 이미 무너진 것을 수지는 알았다. 사건이 발생하기 며칠 전부터 엄마도, 아빠도 평소와 달랐다. 두 사람 다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아빠의 폭력을 참다못한 엄마는 지난해 8월 나흘 동안 가출했다. 지인이 입원한 병실에 가서 지냈다고 했다. 나중에 윤씨의 심리상태를 검사한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법정에서 윤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가정폭력 위험성을 측량하는 심리검사에서 대단히 높은 점수가 나왔습니다. 가정폭력을 그대로 내버려뒀을 때 피해자가 사망하거나 가해자를 사망에 이르게 하거나 자녀들이 사망하는 등 대단히 위험한 수위를 7이라고 할 때 13점으로 측정됐습니다. 오랫동안 학대 피해에 노출돼 정신상태가 학습된 무기력, 예컨대 우울증이나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여러 가지 학대에 기인한 후유증에 시달렸고 그래서 합리적인 사고나 선택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엄마가 없는 사이 아빠는 수연에게 무서운 일을 시켰다. “아버지가 한글을 잘 몰라서 항상 문자메시지를 쓰거나 검색할 때 부탁을 하였는데, 버튼을 누르면 챙 하고 나오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칼이 있다고 하면서 그 칼 파는 곳을 알아보라고 하였고 총을 파는 곳을 알아보라고 했습니다. 엄마를 죽이고 좀더 살다가 나도 같이 죽겠다라는 이야기를 자주 하였습니다.”
다시는 주먹을 휘두르지 않을 것을 약속받고서, 엄마는 돌아왔다. 약속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빠는 더 흉포해졌다. 그날부터, 엄마가 아빠의 목을 노끈으로 조르기 전까지 엄마는 매일 새벽 잠도 자지 못하고 아빠에게 시달렸다. 수연은 학교에서 자주 엄마에게 전화했다. “너무 불안했습니다. 아버지가 정말 어머니를 죽일 것 같아 너무 무서웠어요.” 사건이 벌어지기 전 일어난 일을 증인과 당사자 윤씨의 진술을 통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font color="#008ABD">#9월6일</font>: 남편은 욕을 하고 머리를 치는 등 폭행을 했다. 작업장의 노끈을 잘라 윤씨의 목을 졸랐다. 정신을 잃은 윤씨를 보곤 노끈을 풀었다. “너까지 죽으면 괴롭힐 사람이 없으니 넌 더 살아야 한다.” 그런 폭행 뒤엔 성관계를 강제했다. 폭행은 집에서 계속됐다. 뾰족한 칼을 들이대고 말했다. “피바다를 한번 만들어볼까. 내가 언제 너를 (칼) 꽂을지 모르니 눈 뜨고 자라.” 안방의 그 칼을 나중에 수연도 보았다.
<font color="#008ABD">#9월7일</font>: 공장 종업원이 출근을 하지 않았다. 남편은 했던 욕설을 반복하며 윤씨를 발로 찼다. 수지가 엄마를 챙겨 집으로 데려왔다.
<font size="3">“너는 오늘 내 손에 죽는 날이야”</font><font color="#008ABD">#9월8일</font>: “엄마 산소에 갔다 왔다. 너 죽이고 나도 죽을 거야. 총 쏴서 죽이든 사시미 칼로 죽이든 넌 내 손으로 죽일 거야.” 최후통첩 같은 이상한 말을 했다. 남편은 다음날 아침까지 폭언과 폭행을 거듭했다.
<font color="#008ABD">#9월9일</font>: “너는 오늘 내 손에 죽는 날이야. 우리는 여기까지야. 기다려.” 종업원이 듣든 말든 윤씨를 협박했다. 낮 1시께 종업원이 퇴근하자 망치를 책상 위에 놓으며 말했다. “너 오늘 이 망치로 대갈통을 부숴버릴 거야. 기다려. 이것만 끝내고 어디 한번 해보자.” 그 말을 마친 뒤 일을 끝내놓으려 등을 돌린 남편이 갑자기 스탠드 전등을 깼다. 자신을 죽이기 위한 신호 같았다. 그 순간이었다.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3일 전 남편이 윤씨의 목을 조르는 데 썼던 노끈이 보였다. 1~2초도 걸리지 않았다. 윤씨는 돌아앉은 남편의 목을 노끈으로 힘껏 얽어맸다. 자살하려 했지만 딸들이 눈에 밟혔다. 대신 자수를 택했다.
아빠를 죽이지 않는다면 엄마가 죽을 거란 걸 수지도, 아직 17살인 수연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걸 모르는 건 검사, 판사 아저씨들뿐이다. “누가 나를 해치려고 할 때 방어하는 게 정당방위라고 하잖아요. 아빠가 등 돌리고 있었을 때 사건이 벌어졌기에 이유가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건 좀,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요. 왜냐면 아빠가 무서워서 20년 넘도록 참고 산 사람인데 눈앞에서 그런 행동을 할 정도였으면 더 일찍 방어를 했겠죠. 그런 것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수지가 말했다.
25년에 걸친 폭력, 생사를 다투는 절박함에도 불구하고 1심 법원은 윤씨의 ‘정당방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서울북부지법 형사13부(재판장 이효두)는 다음과 같이 판시했다. “이 사건 범행 당시 피고인에 대한 현재의 부당한 침해가 있었다고 볼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중략) 피고인으로서는 피해자를 살해하기 이전에 피해자와 이혼을 하거나 피해자의 가정폭력을 수사기관에 신고하는 등 피해자의 가정폭력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함으로써 그러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보인다.”
변호인은 가정폭력의 본질을 간과한 판결이라고 지적한다. “피고인이 이혼을 하거나 가정폭력을 수사기관에 신고하는 것만으로는 남편의 학대, 살해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경찰에 신고한 이후에 가해자가 피학대 여성에게 더 심한 폭력을 행사하여 피학대 여성이 심각한 상해를 입거나 심지어는 살해를 당하는 사태도 상당수 발생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윤씨 역시 검찰 조사 당시 이렇게 말했다. “경찰에 가봐도 경찰서에서도 그냥 지금은 현재 상황이 아니니까 어떻게 해줄 수 없으니 싸움 직후에 연락하라고 하고 쉼터 같은 곳을 알아보면 당장은 봐준대요. 그런 데 오래 있을 수는 없잖아요.”
재판부는 정당방위의 ‘상당성’도 부족하다고 밝혔다. “남편이 윤씨에게 등을 보이고 앉아 있는 상태에서 뒤로 다가가 피해자의 목을 졸라 피해자를 살해한 점, 그로 인하여 그 어떤 가치보다도 고귀하고 존엄한 인간의 생명이라는 법익이 침해된 점 등을 종합해보면, 피고인이 피해자를 살해한 행위는 피해자의 가정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위 행위나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행위로서의 한도를 넘어선 것으로서 사회 통념상 상당성이 있는 행위라고 보기 어렵다.” 남편이 “너 오늘 이 망치로 대갈통을 부숴버릴 것”이라고 구체적인 범행 의사와 도구, 시기, 방법을 고지한 상태였다. 변호인은 “생명은 그 어떤 가치보다 고귀하고 존엄한 법익이나 윤씨의 생명도 남편과 마찬가지로 고귀하고 존엄한 법익”이라고 호소했다.
<font size="3">생사를 다투는 절박함에도 불구하고</font>“엄마가 아버지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았어요.”(수연) “대통령보다 경찰보다 아빠가 더 무서웠습니다. 저희 가족에게는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입니다. 이건 정당방위가 아니면 뭘로 설명할 수가 없어요.”(수지) 늘 참기만 했던 엄마는 지금 구치소에서 벌을 받고 있다. 죄로만 따진다면 엄마보다 아빠가 벌받아야 할 것이 많았는데 어째서 엄마가 벌을 받고 있는지, 딸들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의왕(경기)=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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