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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청 재건위, ‘폭력’ 선언한 일베 유저들

이전 ‘아스팔트 우익’으로 활동해온 사람들, ‘폭식 투쟁’으로 현실 공간에 나온 일베들과는
또 다른 차이 보여… 해방 정국처럼 권력의 비호와 방관을 전제로 극우극좌 세력화 가능
등록 2014-10-08 14:51 수정 2020-05-03 04:27
서북청년단 재건준비위원회 관계자들이 지난 9월28일 서울광장에서 세월호 추모 리본 철거를 시도하다 경찰에 저지당하고 있다. 한겨레 강재훈 선임기자

서북청년단 재건준비위원회 관계자들이 지난 9월28일 서울광장에서 세월호 추모 리본 철거를 시도하다 경찰에 저지당하고 있다. 한겨레 강재훈 선임기자

‘극우’는 보수도 달가워하지 않는 단어다. 진보가 붙이는 ‘딱지’처럼 여겨 반발한다. 사고와 행동은 극우여도 극우란 표현은 거부한다. 서북청년단(서청) 재건준비위원회는 극우를 표방한다. 말과 행동에 자기 검열이 없다. 극우의 자신감은 어떻게 배양되는가. 살인을 주저 않던 서청(1946년 11월30일 결성)의 백색테러는 ‘해방 정국의 현상’이었다. 폭력 행위를 부끄러워 않는 극우의 재현은 분명 ‘2014년의 현상’이다.

‘2014년판 서청’은 “전경보다 앞장서는 구국 결사대”(정함철 대변인)를 지향한다. 세월호 추모 리본 철거를 시도한다며 “죽음을 불사하고” 행동을 개시했다. 9월28일 서울수복일에 시점을 맞췄다. 경찰이 막아 실패했으나 “결행” 효과는 톡톡히 보고 있다. 명칭이 주는 기시감과, 구사하는 언어의 과격함과, 행동방식의 공격성이, 서청의 이름을 회고 혹은 회자시키고 있다.

“구국결행” 경과 일베에 소상히 보고오직 이승만 박사에게 충성을 바쳤다/ 나는 선우기성이 아니라/ 이승만 박사의 손가락이다/ 서북청년회 지도자 선우기성/ …철저한 반공노선/ 첫 투쟁은 좌익단체 습격/ 백색테러가 시작되었다/ 유혈낭자/ 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의 지원을 받았다/ 미군 첩보보조원으로/ 38선도 넘나들었다/ 김일성 별장도 습격했다/ 점점 살벌해졌다/ 인간보다 비인간이 더 치열했다….(고은 ‘선우기성’)

영화 (1976년·감독 고영남)에서 배우 이순재가 연기한 선우기성(위원장)은 서청의 이미지를 상징한다. 웃통을 벗은 남자들과 강당 마룻바닥에 줄지어 꿇어앉아 주먹 쥔 오른손을 하늘로 뻗으며 ‘좌익 사냥’의 결의를 다진다. 머리엔 ‘서북’이라고 쓴 하얀 띠를 둘렀다. 해방 직후 서청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백색테러의 선두에서 수많은 사람(20만~40만 명)을 죽였다. 4·3 당시 군과 경찰의 요청으로 파견된 서청의 학살은 제주도민들에게 깊은 한을 남겼다. ‘서청 단원들의 폭력이 도민들을 격분시켜 4·3으로 이어졌다’는 당시 경비대 지휘관(9연대장 김익렬)의 증언도 있다. 4·3 단체들은 10월2일 ‘서청 재건위를 형사범죄로 처벌하라’고 요구(공동성명)했다. 서청의 폭력을 극우테러리즘의 한 유형으로 보는 학계 견해도 있다.

‘구국을 위한 폭력’이란 논리가 70여 년을 건너 똑같이 재생되고 있다. 서청 재건위도 “생즉사 사즉생”으로 “거짓과 위선의 수괴 종북매국세력에 맞서지 않는다면 결단코 저들의 망국적 위협과 선동에 이길 수 없음을 알기에” 나섰다고 주장한다. 9월28일 저녁 정함철 대변인은 “구국 결행” 경과를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에 보고했다. “오늘을 기점으로 전국에 산재한 구국 행게이들이 행동에 나서길 바란다”고 촉구했다. 이튿날엔 ‘살해 협박을 당했다’며 전날 행동에 분노하는 한 남성과의 전화 통화 녹음을 유튜브에 올렸다. 정 대변인은 “문재인을 간첩이라고까지 언급하며 기자회견을 하였으니 저들이 저를 살려둘 리 만무”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내 갈 길 간다”(일베 9월30일)고 했다.

서청 재건위는 일베에서 인큐베이팅되고 있다. 제안자가 나타나 발기인 모임을 공지(9월15일)하고, 모임 후기를 올려(9월18일) 동참을 호소한다. 노란리본 철거를 예고(9월25일)해 주목을 끌고, 철거 당일 행동 계획을 거듭 밝히며(9월28일), 다시 경과와 반응을 공유해 논란을 잇는다. 생존해 있는 과거 서청 간부(손진 경남도지부 선전부장·의 저자)를 방문한 뒤 “정통성을 확보했다”(10월3일)고 알린다. 일베를 거점으로 존재를 드러내고, 행동하고, 반박하며, 세 확산을 시도하고 있다. 서청 재건위 멤버들 자신이 ‘게이’나 ‘홍어’ 등 일베 용어를 구사하는 일베 유저다. 그러나 서청 재건위를 다수 일베와 구별짓는 차이가 있다.

10년 전 9월18일, 박사모 창립 기념일

물리적 폭력. 세월호 정국에서 회원 일부가 서울 광화문에 나와 ‘폭식 투쟁’을 연출했지만 현실 공간에 스스로를 공개한 일베의 폭력은 조롱과 모욕이 주를 이룬다. 서청 재건위는 다르다.

“일찍이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미친개에게는 몽둥이가 약’이라고 하셨다. 청계천과 광화문 그리고 전국의 미친개들을 때려잡을 제2의 서북청년단의 활동이 절실하게 요망된다. 서북청년단처럼 몽둥이를 들자. 이는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이다.”

배성관 재건준비위원장이 발기인 모임을 공지하며 쓴 글(9월15일)이다. 과거 서청이 했듯 ‘증오 폭력’을 추구하는 듯하다. 정 대변인은 노란리본의 경우 ‘폭력을 행사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떼어 서울시가 보관토록 하겠다’고 주장하나 강제철거 자체가 물리력을 동반한 폭력이다. 서청 재건을 환영하며 폭력을 주문하는 일베 회원도 적지 않다.

“소수정예의 신출귀몰 특전대”로 “경우에 따라서는 콩밥도 가볍게 먹겠다는 투철한 정신”(10월1일 #Tje_土V^)이 필요하고 “폭력엔 폭력으로 욕설엔 욕설로 반역엔 암살과 참수로 대응하는 실질적인 힘을 행사하는 전사들”(9월30일 상문천)이 되길 고대한다. 재건위 활동 시작 전인 6월8일의 글(월간조선 ‘서북청년단이 필요하다’)은 “자동차 타이어 펑크”나 “공포탄 발사”를 제안하기도 했다. 규모는 확인할 수 없지만 폭력 행동은 분명 일베 내에 존재하는 욕망이다.

공개적 활동. ‘극우 행동대 서청’의 탄생을 열망하는 일베 회원이라도 자기 신분을 노출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지난해 일베가 사회문제로 부각된 이후 여전히 회원의 절대다수는 익명 뒤에 자신을 감추고 있다. 서청 재건위는 숨지 않는다. 얼굴과 이름과 전화번호까지 공개한다. 미디어도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언론의 인터뷰 요청에 적극 응하고, 인터뷰 내용을 서청 재건의 정신이라며 전파한다. 기자와의 전화 통화를 녹음해 인터넷에 그대로 올리기도 한다.

재건위 주요 멤버는 오래전부터 ‘아스팔트 우익’으로 활동해온 사람들이다. 배성관 준비위원장은 예비역 육군대령이다. 2011년 5월 그는 ‘한국극우당’(이후 호국우익당) 발기인을 자처하며 “시대정신은 극우당”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발기문에서 헌법도 부정했다. “대한민국의 적통성은 상해임시정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승만 건국대통령-박정희 근대화 대통령-전두환 태평성대 대통령에게 있음을 확인한다”고 했다. 그는 과거 서청 조직원 안두희가 김구를 살해했다는 비판이 일자 최근 ‘재건준비위원장 입장’(9월30일)이라며 일베에 이렇게 썼다. “김구는 김일성의 꼭두각시였고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했다. 반공단체인 서북청년단원 안두희씨가 김구를 처단한 것은 의거다(김인수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대표는 10월2일 허위사실 유포로 배 위원장을 서울중앙지검에 고발).” 정함철 대변인은 ‘창립 때부터 활동해온 박사모 회원’이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그는 지난 9월18일 서청 재건위 첫 모임이 박사모 창립 뒤 첫 단독 대규모 집회가 열린 2004년 9월18일로부터 정확히 10년이 흐른 날이라며 의미를 부여했다. 발기인 모임 제안이 있기 한 달 전부터 그는 “서청의 후신 구국결사대” 조직을 촉구하며 수차례 글을 올렸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 반대 행동을 벌여온 주옥순 엄마부대봉사단 대표도 재건위 멤버다.

“배후엔 경찰 행동철학은 이승만 박사”

인터넷에 깃든 아스팔트 우익이 인터넷에서 비축·규합한 힘을 더해 인터넷 밖에서 ‘극우 행동대’로 등장한 것이 서청 재건위다. 대중 앞에 당당히 나서며 물리적 폭력을 공개 선언한 첫 일베 유저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서청의 이미지와 현 재건위의 과격함이 보수 전체에 누를 끼칠 수 있다는 목소리가 일베 안에도 없진 않다. 서청 재건 움직임에 우려를 표하는 보수 정치인도 있지만 소수다.

한국의 극우행동주의는 2014년에 이르러 ‘계기’를 얻고 있다. 영향력과 무관하게 징후적이다. 정부가 폭력을 독점한 근현대 국가에서 폭력을 표방하는 극우·극좌의 세력화는 권력의 비호나 방관을 전제로 가능했다. 유럽 파시즘과 일본 군국주의의 대중 동원은 그렇게 상하가 맞물려 작동했다.

과거 서청의 폭력 뒤에도 그들에게 ‘살인면허’를 준 정치권력이 있었다. 이승만 정권이 서청을 비호했고 자금을 지원했다. 문봉제(후기 서청 위원장)는 “우리의 배후엔 경찰이 있었고 행동 철학은 이승만 박사로부터 나왔다”고 했다. 서청의 테러가 성공하면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이 서청 합숙소를 찾아가 연회를 베풀었고, 서청의 테러가 극심해져 미군정이 단체 해산을 명령하자 조병옥 경무부장이 서청을 두둔했다(김평선 ‘서북청년단의 폭력동기분석’). 서청 사무실은 동아일보사에 있었다.

서청 재건위의 등장은 극우의 깃발이 떳떳하게 펄럭일 만큼 한국 사회에 극단적 보수의 기운이 강화됐다는 뜻으로 읽힌다. 폭력은 자신감 혹은 위기감에서 나온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보수의 강한 자신감이 관찰돼왔다. 박 대통령은 정권 정당성의 최대 아킬레스건이던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사건 수사를 무력화하고, 통합진보당 해산 청구,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불법화 시도 등을 공세적으로 몰아가며 위기를 뒤집는 자신감을 선보였다. 다른 생각과 비판에 행사하는 보수·극우 단체의 폭력 수위가 동반 상승했다. 정치권과 법조계·종교계를 포함해 전 사회적으로 ‘종북 낙인찍기’가 노골화됐다.

“서청 재건위는 역사학적 상상력을 넘어서는 출현이다. 그들 자신감의 기반은 현 집권세력이 조성했다. 공포와 폭력을 수반하는 행동조직을 계승한다는 당당한 자신감은 한국 사회가 합의해온 민주주의의가 후퇴하고 있는 현실과 맞닿아 있다.”(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

서청 재건위는 ‘등판’의 적기로 세월호 정국을 활용했다. 참사 뒤 5개월 사이에 벌어진 ‘대반전’을 지켜보며 극우는 행동에 나설 자양분을 얻었다. 세월호는 현 정권과 사회구조 전반의 난맥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면서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을 처음으로 30%대로 떨어뜨린 위기 요인이었다. 동시에 거대한 ‘추모 국면’까지 ‘혐오 국면’으로 전환시킨 정부·여당의 과단성이 야권의 몰락과 맞물리며 보수의 자신감을 끌어올린 ‘역전의 드라마’기도 했다.

5개월 사이에 벌어진 ‘대반전’이 자양분

서청 재건위 멤버들이 현실 공간에서 ‘아스팔트 우익’으로 싸울 때 그들은 주목받지 못했고 영향력은 미미했다. 일베를 업고 세월호를 꺼내들며 그들은 마침내 화제의 인물이 됐다. 극단을 자정해낼 수 있을 만큼 다양성이 성숙했을 때 사회는 자신감을 갖고 극단에 대처할 수 있다. 극단의 자신감과 사회의 자신감은 반비례한다. 보수·극우의 자신감이 팽창하는 동안 한국 사회가 가져야 할 자신감의 행방은 묘연해지고 있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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